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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5-07-26 09:20
이재난고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3,291  
이재난고》에 나타난 조선후기 湖洛논쟁


서동일 (역사전공, 통합2차)


1. 머리말

17세기 중반 이후의 조선사회는 丙子胡亂을 경험하면서 淸에 대한 복수를 의미하는 北伐論이 국론을 이루었다. 그러나 약 1세기가 지나면서 그 현실성에 의구심을 표출하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淸의 비약적인 발전소식을 목도한 후 명분론적인 反淸의식을 버리고 선진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것이 이른바 北學論이었다.
한편 사상계에서는 湖洛논쟁이 주요 쟁점으로 부상하였다. 호락논쟁이란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는데, 18세기 전 기간에 걸쳐 폭넓은 논의가 전개되었고, 참여계층도 처음에는 기호학파內 호서지역의 논쟁으로 출발하여, 나중에는 기호학파 전체를 아우르고 영남학파까지 끌어들인 논쟁이었다. 이들은 정계에도 깊이 투신하여 왕실-붕당세력과도 親疎의 뚜렷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호락논쟁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하는데 이바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반 위에서 당시 조선사회의 변화상을 규명하고자 한 시도였다는 점이다.
다음에서는 18세기 조선사회의 다양한 변화상을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평가되는 黃胤錫의 일기 《이재난고》통하여 湖洛논쟁의 전말을 이해하고자 한다. 황윤석( 齋, 1729-1791)은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보인 인물로써, 그 성격을 하나로 단정짓기에 힘든 측면이 있다. 더욱이 그는 독자적인 성리설을 개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황윤석은 주희 이후 정론이 세워졌기 때문에 후대인들은 독실히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朱子尊信論者였으며, 한때 송시열을 배향한 고암서원의 講長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자세히 기록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어 호락논쟁에 대해서도 당시 주변 정황과 더불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황윤석의 학문적 특징에 근거하여 18세기 호락논쟁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2. 18세기 국내외 정세 및 학계의 동향

湖洛논쟁은 18세기 초반 畿湖학계 내부에서 발생한 논의로서, 16세기 중반의 四端七情論·人心道心論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논쟁이다. 權尙夏(遂菴, 1641-1721)는 이이,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을 이은 학자로 평가되는데, 그의 제자 李柬(巍巖, 1677-1727)과 韓元震(南塘, 1682-1751)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두고 이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人物性同異論이다. 그런데 이 논쟁에 서울 주변의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서울[洛下] 및 충청도[湖西]의 학자들간의 견해 차이가 분명해지면서, 지역적 분립을 의미하는 호락논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쟁은 18세기 조선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논쟁이기도 했다.
17세기 전반기의 병자호란과 明의 멸망은 조선사회에 두 갈래의 반응을 몰고 왔다. 먼저 병자호란은 反淸意識과 北伐論을 강화시켰고, 뒤이어 오랑캐의 나라인 淸에 의해 도덕문명의 종주국인 明이 멸망하자 이제 인간문명의 중심은 중국에서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小中華意識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명분론은 성리학의 엄격한 華夷論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明의 두 황제(神宗과 毅宗)의 신위를 모신 大報壇과 萬東廟는 그러한 화이론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1세기에 걸쳐 국론으로 정해진 북벌론이 점차 현실성을 결여해 가자, 일부에서는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맹주로 등장한 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北學論을 제기하였다. 선진문물의 수입경로는 주로 淸國 使行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淸의 상업적 번영을 확인되고, 조선사회의 상공업화가 촉진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대변하는 곳이었다. 반면 지방사회는 여전히 농업생산을 본위로 하였으며 기존 신분질서체제를 꾀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사회·경제적 분기현상은 학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서울의 자유로운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성장한 일련의 학자들은 정치적으로는 영·정조의 탕평정국에서 時派의 영역에 있으면서 국왕으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얻어내고 있었으며,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선대의 학자들과는 달리 탄력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동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세기에 걸쳐 진행된 湖洛논쟁이었다. 권상하는 1675년(숙종 1) 스승 송시열이 慈懿大妃의 喪服문제로 德源에 유배되고 이를 계기로 남인들이 득세하자, 충청도 淸風의 黃江에 거주하면서 독서와 사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당시 권상하 문하에서는 江門八學士라는 8명의 대표적인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한원진과 이간은 함께 道學을 강론하면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한원진은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고 보아 人物性異論을 주장하였으나, 이간은 인간·사물 모두 타고난 본성은 같다 하여 人物性同論을 제기하였다. 1709년 충청도에서 시작된 이 논쟁은 훗날 서울[洛下] 및 충청도[湖西]의 학자들이 폭넓게 참여하면서 기호학계 전체로 확대되었다. 한원진을 지지한 尹鳳九·崔徵厚·蔡之洪 등은 주로 湖西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견해를 湖論 혹은 湖學이라 하였고, 이간을 지지한 李縡·朴弼周·魚有鳳 등은 대개 洛下 즉 서울에 거주했기 때문에 洛論 혹은 洛學으로 불려지면서, 湖洛논쟁으로 명명되었다. 洛論은 개체간의 공통성을 강조함으로써 북학론으로의 전개가 용이하였던 반면, 湖論은 개체간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써 북벌론·화이론 및 체제고수론과 연결될 가능성이 강하였다. 한편 洛論계열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견해를 金昌協에 연결시킴으로써 기호학파의 계보를 湖論중심의 '송시열-권상하-한원진'에서 洛論중심의 '송시열-김창협-이재-김원행'으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럼 湖論과 洛論의 근거는 무엇이고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洪直弼은 호락논쟁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근세 湖洛 諸儒의 논변을 보면 조건이 어지럽게 얽혀 있으나, 그 대강에 셋이 있으니 ① 사람의 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이고, ② 心의 본체가 純善이나 兼善惡이냐 하는 점이며, ③ 明德에 갈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중용장구》 天命之謂性 장에 나오는 대목을 따라서 "사물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五常을 품부받지만 氣質에 국한되므로 그 性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고 하고,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맹자》에서 이른바 개·소·사람 三性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따라서 "사물이 氣를 받음이 치우친 까닭에 받은 理 역시 치우치게 되니, (사람과 사물은: 인용자) 나면서부터 이미 다름이 있다"고 한다. 心의 본체가 純善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程子의 설을 따라, "氣 가운데 精爽한 것이 心이 되니 본체에 어찌 不善이 있겠는가. 思慮에 발하게 되면 善도 있고 불선도 있다"고 하며, 兼善惡을 주장하는 자들은 "心은 氣質이고 기질에는 淸濁의 가지런하지 않음이 있어서 心 역시 善惡함이 있다"고 한다. 明德에 갈래가 있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明德은 本心이요, 心은 氣이다. 氣는 가지런하지 않으므로 明德에도 갈래가 있다"고 하고, 갈래가 없음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람의 虛靈함은 품성에 구애되지 않는데, 虛靈은 明德의 體이다. 어찌 기품의 다름을 가지고 갈래가 있다고 하겠는가" 라고 한다.


3. 황윤석의 湖洛논쟁 이해

황윤석이 인물성동이론의 내용을 이해해간 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家學수련기이다. 家學的 전통 속에서 성리학 및 호락논쟁의 주요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제2기는 洛論전수기이다. 당시 老論 낙론계열을 대표한 김원행(渼湖, 1702-1772)과 사제관계를 맺고, 낙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관련된 주요 사건에 간여하였다. 황윤석 개인적으로는 관직수행에 있어서나 학문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시기였다. 제3기는 낙론정리기이다. 필생의 숙원이던 수령직 제수가 성사되지 않자 더 이상의 관직생활을 포기하였다. 한편 그간의 학습내용을 낙론계의 입장에서 정리한 〈湖洛二學始末記〉을 저술하였다.
제1기 家學수련기(1729-1759)는 황윤석이 김원행과 사제관계를 맺기 이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가까운 조상 가운데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은 없지만, 증조부로부터 3대에 걸쳐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미 先代부터 전해진 家藏圖書가 수천 권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이러한 가학적 배경을 잘 보여준다. 1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과거공부 이외에 성리학이라는 심성수양의 공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세(1755)에는 朴弼周(黎湖, 1680-1748)를 師事하기 위해 편지를 준비하였으나 박필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27세(1755)에는 金文行의 소개로 훗날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김원행과 처음 대면하고 간단한 대화를 가졌다. 당시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지나친 과거공부를 경계시키면서 《小學》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황윤석의 성장배경에서 유념해야할 부분은 그의 가문이 이미 송시열 및 金昌協(農巖, 1651-1708)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증조부 黃世基(1628-1680)는 송시열을 당시 유학계에서 가장 존경한 인물이었고, 그의 제자인 奇挺翼과 교류하였다. 숙조부 黃載重(1664-1718)은 기정익을 사사하여 송시열의 再傳제자가 되었고, 중년에는 김창협을 사사하였는데 학문을 잘한다 하여 칭송되었다고 한다. 특히 부친 黃廛(1704-1771)은 송시열과 김창협을 私淑하고 주희를 깊이 숭모하여, 자제들에게 이들의 학문에 전념할 것을 항상 종용하였다.
이러한 가학적 배경은 황윤석이 낙론 즉 인물성동론을 이해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황윤석이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박필주는 洛論을 지지한 학자였고, 이어 부친의 명에 따라 최초의 만남을 가졌던 김원행도 후일 洛論의 효시로 추숭된 金昌協의 손자이자 李縡(陶菴·寒泉, 1680-1746)를 이어 洛論을 주도한 노론의 영수였다.
황윤석의 호락논쟁에 대한 입론은 21세(1749)에 나타난다. 당시는 이재가 〈寒泉詩〉를 지어 한원진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湖洛논쟁이 서울지역과 충청지역으로 확연히 나뉘어지고, 논쟁이 점차 가열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황윤석은 丁 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직 이재와 韓元震이 주장하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나, 대략 性을 本然之性으로 볼 것인가 氣質之性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 발생한 시각 차이로 이해하였다. 즉 인간이나 사물이나 태어날 때에는 하늘로부터 똑같이 理를 받는다. 그런데 왜 인간, 소, 개의 본성은 다르다고 여겨지는 것인가? 타고난 성품 자체가 다르기 때문인 것은 아닐까? 황윤석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대답한다. 理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氣라는 형태에 의지하여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이라는 맹자의 性善說도 결국 인간과 사물이 가진 본연지성이 본래 선한 것임을 가리킨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성을 본원지성이 아닌 기질지성으로 잘못 이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황윤석은 호락논쟁의 기본전제가 되는 전거인 《中庸》《孟子》의 주희 주석을 참고하였다.
27세(1755)에는 김원행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단계 진전된 견해를 제시한다. 김원행이 한원진의 犬牛人三性說(개·소·사람의 본성은 각기 다르다는 맹자의 설)을 비판하며 황윤석에게 의견을 묻자,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하였어도 다른 몸에 들어가면 다른 성질로 전환된다고 보는 一原異體의 견해가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한원진이, 사람과 사물이 만들어질 때 각기 받는 氣의 내용에 완전하거나 불완전하게 되는 상황 자체[氣之偏全]를 本然之性으로 파악하는 한편, 권상하를 이이와 송시열보다 높이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한원진과 같은 호론계열인 尹鳳九(屛溪, 1681-1767)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는 낙론의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이재의 詩와, 호론의 입장이 강하게 나타난 신간 한수재문집의 권상하 행장[寒水齋 行狀](1736)을 건거로 삼았다.
이상과 같이, 황윤석은 김원행과 사제관계를 맺기 이전부터 송시열-김창협을 존숭한 가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고, 아직 정식으로 사제관계를 수립하지는 않았으나 김원행과의 관계를 통해 낙론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이해하였다고 보여진다.
제2기 낙론전수기(1759-1770)는 황윤석이 31세 되던 1759년 2월에 김원행과 비로소 사제관계를 맺고 낙론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에 들어간 시기이다. 김원행의 거치인 양주 渼陰과 그의 강학지인 石室書院을 왕래하면서 성리철학의 요체가 담긴 《대학》 및 《중용》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175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66년 6월 蔭官으로 莊陵 參奉을 제수받으면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비록 말단관직이지만 義盈庫 奉事-司圃署 直長-宗簿寺 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 황윤석은 당색을 불문하고 다양한 인사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이러한 계기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조선 사회에 간접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청·장년시절 황윤석은 과거공부와 심성수양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두고 깊이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는 부모의 권유나 입신양명의 욕구 이외에도 개인의 학문적 역량을 현실사회에 적용하고자 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청년기부터 과거시험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 김원행이 그에게 과거공부와 성리학공부의 시간비율을 묻자 과거공부에 10분의 3 내지 4를 할애한다고 대답한다. 뿐만 아니라 부친 황전이 《소학》공부에 몰두하여 이를 황윤석 형제에게도 독려하였던 데에 비해, 황윤석은 오히려 治人의 학문인 《대학》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관리지향적 성격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김원행은 이러한 황윤석의 과거지향적 학문태도를 경계코자 하였다. 김원행은 경종 2년 즉 1722년 申壬士禍에서 종조부 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일원으로 賜死되고, 생부와 두 형 역시 이 과정에서 사사되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김원행의 가문은 조선후기 노론집권층의 핵심세력이었으며, 영·정조연간에는 노론학계를 대표하는 산림으로 정계와 학계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원행은 황윤석에게도 과거지향적 학문태도를 경계시키면서, 《소학》를 계속 종용하고, 공리를 앞세우는 小人儒가 되지 말고 의리를 앞세우는 大人儒가 되라고 충고한다. 결국 황윤석이 과거공부 일변도에서 벗어나는 배경에는 김원행의 영향력이 강했고, 황윤석의 학문연구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시점에 이르러서는 스승의 견해를 적극 변론하는 위치에까지 도달한다.
36세 되던 1764년 2월에는 호남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李基慶을 만나 호락논쟁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하고 湖論비판을 강화하였다. 여기에선 한원진과 더불어 호론계의 영수인 윤봉구의 견해를 비판한다. 윤봉구는 理라는 보편적인 개념에서 性이라는 개체적인 개념을 분리시킴으로써,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호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윤봉구가 송시열의 묘를 옮기는 과정에서 마련한 祭文 즉 〈尤菴遷葬祭文〉에 투영되었다. 즉 그는 '理는 같으나 性은 다르다'는 理同性異의 논리를 도출해냈다. 황윤석은 이것이 각각의 개체가 가진 性의 차별성을 강조한 한원진의 학설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윤봉구가 찬한 〈우암천장제문〉과 신간 한수재문집의〈서문〉은 한원진이 찬한 한수재문집의 〈행장〉과 표리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한편 이기경은 황윤석에게 《중용》의 주희주석을 하나하나 인용하면서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理가 다르다고 한다면 '사람은 모두 堯舜처럼 (성인이) 될 수 있다[人皆可以爲堯舜]'고 한 성인의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한다. 철저한 주희 신봉자였던 황윤석은 주희 이후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는데 후학들이 적합지 않은 단어들을 추가하여 이러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한편 황윤석은 〈우암천장제문〉, 신간 《한수재문집》의 서문, 김원행의 편지를 추가적으로 이용하면서 호론의 입장에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같은 해 4월에는 김원행을 만났으며 석실서원에서 여러 선생을 만났다. 5월에도 역시 김원행을 배알하고 《대학》을 공부했으며, 석실서원에서는 다른 동문들과 함께 《중용》을 학습하였다. 한편 황윤석의 호락논쟁에 대한 이해는 人物性同異論과 더불어 '성인과 범인에게 주어진 本心이란 같은가 다른가' 라는 聖凡本心同不同論이라는 영역에 접근한다. 이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황윤석의 관심과 학습상태가 진전되면서, 인간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라는 기초적이고 거시적인 이해단계에서, 연구대상을 인간의 심성으로 환원하는 구체적인 이해단계로 자연스럽게 진입하였음을 보여준다.
황윤석은 스승과의 대화에서 湖論의 입장인 聖凡本心異論을 비판한다. 즉 人物性同異論이나 聖凡本心異論은 송시열 생존시에는 없던 것인데 권상하 이후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는 기호학파의 정통계보인 湖論의 입장을 이이-송시열의 연결선상에서 벗어난 이단으로까지 부각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김원행은 황윤석에게 호락논쟁과 관련된 주요 문헌을 베껴가도록 권유한다. 洛論의 종지가 사제관계를 전수되는 과정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호락논쟁은 학문적 지향점이 명확해지면서 내부의 異說을 배척해 가기 시작했다. 洛論에서는 李顯益의 학설이 배제되고, 湖論에서는 李柬의 학설이 스승의 종지에서 벗어난 것을 판단되었다. 이들의 견해는 각 계열에서 그 위상이 의도적으로 축소되는 한편, 반대계열에서는 이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洛論에서는 권상하의 대표적인 제자 8명 즉 江門八學士 가운데 자신들과 유사한 학설을 개진한 이간과 玄尙璧을 높이 평가하였다.
37세(1765)에 남긴 글에 의하면 황윤석 역시 이간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간의 문집인 《巍巖集》을 본 후, 여기에는 이간이 스승 권상하와 편지를 왕복하며 변론을 한 것이 많은 데 비해 《한수재문집》에는 두 인물간에 왕래된 편지가 의도적으로 적게 실렸다고 하였다. 또한 권상하의 연보 즉 〈黃江年譜〉에는 人物性異論과 聖凡本心異論이 송시열의 견해로부터 출발한 것처럼 기술하였으나 실제로 《尤庵集》 어디에서도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밖에도 윤봉구가 《외암집》 간행과정에서 이간의 견해 가운데 권상하의 학설 즉 湖論에 반하는 부분을 삭제토록 강력히 건의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이간의 자제들이 문집의 서문과 발문을 윤봉구에게 부탁하지 않음으로써 이간의 문집이 서울 주변에서는 널리 읽혀지면서도 충청도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폐단이 생겼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김원행은 중요한 논점을 발견할 때마다 그 개요를 제자 황윤석에게 설명하고, 다시 이를 비평하게 하였다. 일례로 38세(1766)에는 송준필이 찬한 黔潭書院 廟廷碑文을 보여주는가 하면, 楊應秀의 詩와 윤봉구의 한수재문집 서문을 주고 논평을 유도하였다.
황윤석은 40대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학업과 관직생활에 있어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당색을 초월하여 申景濬·鄭景淳·李家煥·徐命膺·洪大容과 같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나 정치가와 교류하였다. 또한 司僕寺 主簿와 東部 都事을 역임하면서 수도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함으로써 국내의 물정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다양한 인물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폐단에 대한 개혁론도 제시하였다.
40세(1768)에는 꿈에서 김원행을 본 후 낙론계에서 김원행이 차지하는 위상을 재확인하였다. 황윤석은 자신이 人物性同論과 聖凡本心同論을 이해, 수용하는데 김원행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였다. 특히 《朱子語類》와 《朱子大全》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김원행의 견해가 정밀함을 파악하고, 더욱 신봉하는 자세를 보인다. 특히 김원행이 평소 강조한 주희의 '마음은 氣의 가장 맑은 것[心者氣之精爽]'이라는 부분을 강조하였다. 이는 氣를 心氣가 아닌 形氣로 이해한 한원진-윤봉구 계열의 湖論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황윤석이 41세 되던 해인 1769년에는 호락논쟁과 더불어 정계의 흐름에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이른바 華陽書院 廟庭碑文 사건이다. 이는 화양서원의 묘정에 세울 비석의 銘文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호론측이 자신들의 입장을 비문에 삽입하려는 시도가 낙론측에 의해 제지되자, 이를 강행하기 위해 비밀리에 화양서원에 通文을 발송한 사건이었다.
화양서원은 영남의 도산서원에 비견되는 기호유학계의 본산이자 노론집권층의 학문적 근거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항상 중앙정계와 학계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서원의 비명을 호론이 짓느냐 낙론이 짓느냐에 따라서 기호유학계의 정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원래 이 비명은 송시열-권상하의 학통을 이은 호론의 윤봉구가 짓기로 되어 있었다. 한편 권상하가 송시열의 墓表를 짓고, 윤봉구 자신이 墓誌를 지음으로써 기호유학계의 주도권은 권상하-윤봉구·한원진으로 이어지는 호론에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비명작업을 맡은 윤봉구가 비문을 돌에 새기기에 앞서 1767년 갑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사태가 급변하였다. 즉 서원 원장인 김원행을 중심으로 작업을 제지하려는 낙론측과 이를 강행하려는 호론측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1769년 윤봉구의 제자이자 성균관의 掌議인 姜弼言이 비밀리에 통문을 작성하여 화양서원과 청주향교에 발송함으로써 사태가 급박해졌고, 1770년에는 洪量海의 사주아래 동생 洪理會의 2차 통문이 발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황윤석은 김원행의 저지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동문들과 함께 공동전선을 취하였다.
《이재난고》에서 41세 즉 1769년은 역시 묘정비문사건과 관련된 내용이 가장 비중있게 다뤄진다. 다소 흥미로운 것은 1차 통문을 주도한 강필언이 사건 발생 4, 5년전만 해도 황윤석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즉 그는 황윤석과 먼친척되는 인물로써 호론을 이단으로 모는 낙론을 비판하였는데, 황윤석이 학문적인 논변은 오히려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말로 무마하려 하자, 이후 완전히 발길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황윤석의 전하는 묘정비명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윤봉구의 제자 강필언은 9월 16일 성균관의 장의로서 몰래 노복에게 자신이 작성한 통문의 초본을 베끼서 화양서원에 발송토록 지시하였다. 황윤석은 통문 전문을 일기에 모두 적어두었다. 이에 따르면, 강필언은 윤봉구가 화양서원의 발전에 끼친 공로가 지대하며, 이미 비명이 완성되었으므로 비명을 새기는 것은 순리라는 입장이다.
이에 김원행은 윤봉구의 비명이 송시열이 찬한 紫雲書院 묘정비명의 例를 본받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였다. 또한 설사 그것이 송시열의 견해라고 하더라도 주자의 설에 배치되어서는 안되며, 후세에 분분한 의론을 낳을 것이라면 서둘러 처리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한동안 침묵하였던 호론계 院儒들이 화양서원의 묘정비 건립과정이나 비문의 체제가 이이의 산소 근처에 세운 자운서원 묘정비의 건립과정를 모범으로 삼은 것임을 논거로 하여, 이를 추진한 윤봉구의 묘정비명 刻石 추진을 강하게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일이 정지된 것은 이미 송시열의 후손으로써 기호유학계의 원로인 宋德相과 협의된 사항임을 강조하면서, 일개 성균관 장의가 祭主 김원행에게 반항하는 것은 무례한 일임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낙론측에서는 성균관에 있던 생원 金履顯과 김원행의 제자 徐有防이 대책을 상의하는 한편, 서원의 차원에서 사건을 주도한 홍양해를 治罪코자 하였다. 이 사건의 전개과정에서는 낙론과 호론간의 반박논리가 송시열의 견해 및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후손들의 입장과 연결지어 설명하고자 하였음을 보여준다.
묘정비명사건을 계기로 양측은 상호간에 심각한 인격적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재난고》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같은 해 10월, 황윤석은 李火憲의 말을 옮기면서 그의 백부 李 命이 윤봉구와 함께 권상하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윤봉구가 일생동안 科擧 蔭仕에만 몰두하여 경전문자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으므로, 이런 인물이 묘정비명에서 송시열의 생애와 더불어 화양서원에서 가장 중시하는 崇明反淸의 의리를 제대로 정리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하였다. 이는 화양서원에서 윤봉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위로는 권상하의 권위마저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한편 황윤석은 이 시기에 金昌翕(三淵, 1653-1722)의 문집인 《三淵集》을 장기간 열람하면서 洛論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면 황윤석은 윤봉구가 찬한 묘정비명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였고, 어떤 부분에 반대했던 것인가? 황윤석은 스승의 입을 빌어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또한 경기·호서의 두 파가 있는데, 대개 寒水齋(권상하: 이하 괄호 인용자) 문하에서는 南塘(한원진)과 屛溪(윤봉구) 양쪽이 스승의 뜻을 祖述하였다고 하면서, 聖人과 凡人의 本心은 같지 않으며, 인간과 사물이 본래 타고난 성품이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理는 같으나 性은 다르다[理則同 而性則異]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동문 가운데 巍巖[李柬]과 玄洗馬[尙璧] 같은 이는 굳게 말하기를 스승의 종지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 한천은 생존시에 이미 남당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미음 선생께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병계로부터 나온 화양서원 묘정비문이 理는 같고 性은 다르다는 설에 근거하고 있는데, 반드시 尤翁(송시열)의 본의라고 할 수 없는데 하물며 화양동 서원 전체에 있어서랴! 오로지 萬東廟 本事로서만 놓고 말을 하더라도 병계 제자들의 말에 따라 지금 곧장 돌에 (윤봉구가 찬한 비문을) 새길 수 없는 것이라며 크게 꾸짖으셨다. 宋持平[德相]은 (미음) 선생과 뜻을 함게 하는데 洪啓能은 유독 이 의견에 따르지 않으면서, 옆을 보며 또한 스스로 별도의 門戶를 세울 따름이다.

즉 理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고 있으나 개체마다 가지고 있는 性은 다르다는 理同性異의 견해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이는 기호유학계에서 정통으로 삼고 있는 송시열의 입장을 왜곡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1770년 봄에는 홍양해와 홍이해 주도로 2차 통문이 발송되어 洛論·湖論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황윤석은 이 부분 역시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湖通'으로 불려진 2차 통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6월 18일 金某로부터 충청도에 나돌고 있는 통문의 진상을 전해듣는다. 전언에 따르면, 2차 통문은 자칭 윤봉구의 제자라는 홍양해의 아우가 작성한 것인데, 대략 비명의 刻石을 제지한 김원행을 강력히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김원행은 화양서원에서 이 통문을 더 이상 공개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론 및 김원행 자신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1차 통문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월 26일 김원행의 조카인 金天安을 통해서 통문을 직접 열람한다. 김천안은 원래 김원행이 이 통문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여주지 말도록 당부하였으나, 황윤석이 博識雄辯의 인물이라 하여 특별히 보여준다고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崔 이라는 인물은 낙론계의 이재를 변론한 《泉門俟百錄》을 편찬한다. 이는 이재가 한원진 및 윤봉구를 만나면서 제기한 心性論과 각종 왕래서신을 이재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황윤석은 이 책에 대해 최석이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조리있게 저술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3기 洛論정리기(1771-)는 필생의 숙원이던 수령직 제수가 성사되지 않자 더 이상의 관직생활을 포기한 시기이다. 이 기간에 주목할만한 사항은 낙론의 입장에서 호락논쟁을 정리하는 한편, 기호유학계의 계보에 대한 재정립을 시도한 《湖洛二學始末記》를 저술하였다는 점이다.
이 저술에 의하면, 황윤석은 우선 기호학파를 김창협·이재·김원행으로 이어진 洛學과 권상하·한원진으로 이어진 湖學으로 나누고, 권상하의 제자 黃江十學 가운데 이간과 현상벽이 가장 출중하나 아쉽게 일찍 사망하였고, 한원진은 장수하고 고관의 지위에 올랐으나 과도한 행동으로 일관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한원진·윤봉구에 대한 인격적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한원진에 대해선 自尊이 심하여 전대의 사람을 헐뜯는 데에만 힘쓴다고 하였고, 윤봉구에 대해선 어려서부터 과거공부에 매달려 성리학 공부가 정교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기본적으로 송시열-김창협-이재-김원행으로 기호학파의 정통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황윤석은 김원행의 낙론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 心과 氣는 구별된다. 둘째, 氣에 나아가되 단지 理만을 지목하면 本然之性이요, 氣를 가지고 理를 함께 말하면 氣質之性이다. 셋째, 明德은 本心이고, 聖人과 凡人 구별없이 동일하다. 넷째, 五性은 사람과 동물이 하늘로부터 동일하게 받았으나, 단지 사람은 온전히 발현시킬 수 있는데 반해 동물은 그렇지 못하다. 이는 心의 본체를 氣로 보고, 인간의 본성을 氣質之性을 중심으로 이해하며, 聖人과 凡人의 本心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보고, 사람과 사물의 五性이 각각 다르다고 파악한 湖論과 대비되는 것이다.
한편 왕실에 연계된 호론측 인사들을 공격하였다. 즉 호락논쟁은 주요 정치세력간의 협력·갈등관계와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당시 洪鳳漢과 金龜柱 두 외척간의 갈등관계가 심하였는데, 湖學者라 하는 부류는 홍봉한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김구주에 붙어 홍봉한을 죽이려고 하였다. 홍봉한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대대로 친했던 가문관계 및 혼인관계로 김원행의 이름을 빌어 행세하려는 뜻이 있었다. 또 鄭厚謙 두 외척간을 오가며 김원행에게 자신의 先世가 송시열로에게 발탁되었으니 자신은 노론에 속하며 따라서 문하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그러나 김원행은 조용히 보은·영동으로 물러나 부모봉양에 힘썼다. 결국 홍봉한과 김구주는 섬에 수감되었고, 송환경은 유배되었으며 홍계능은 장살되었고 홍양해는 능지처참되었으며, 한원진의 조카 韓後翼 또한 誅殺되었고, 金漢祿은 공초에 거명되었으니 이로 인해 왕실과 연계된 호론일파와 흉악한 노론세력 일부가 제거되었다고 하였다.

4. 맺음말

이상에서는 황윤석의 일기를 통해 18세기 조선사상계의 주요 쟁점이었던 호락논쟁의 전개과정을 살펴보았다. 호락논쟁은 외형적으로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놓고 벌인 논쟁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한동안 지연된 조선사회의 재건을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탐색과정과도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 혹은 성인과 범인의 본심이 같은가 다른가라는 질문은 신분질서가 와해되는 조선후기의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를 원상태로 환원시킬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구조로의 이행을 인정할 것인가 라는 가치판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오랑캐로서 중국을 지배한 淸의 발전사항을 인정하고 그 선진적인 문물을 수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와도 연결되는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낙론계 인사들은 송시열 계통과는 달리 金昌協과 趙聖期의 비교적 자유로운 학문태도 아래에서 율곡이래 우암까지의 학설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고집하던 호론계열과 분명히 구별되었다. 이는 황윤석이 주희를 존신한 학자로서 양명학 등의 이단 배척에 진력하면서도, 서학·역학·불교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인식체계를 가지고 적극 대응하였던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이나 홍대용이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직시하고 주자성리학을 반성하는 기반 위에서 북학론을 經濟之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반해, 황윤석은 博物學的 관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세기 조선정국을 주도한 남공철과 김정희에 이르러 북학론이 실천적인 학술체계로 정립되지 못하고 청대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과 미시적인 분야에 대한 관심에 머무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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