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과연 고봉선생(高峯先生)의 사칠논(四七論)의 형성(形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었는가? 먼저 퇴계(退溪)와의 관계는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다시 더 할 나위도 없지만 하서(河西)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못 미묘(微妙)한 바가 있다.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1635~1695)는 그의 하서행장(河西行狀)에서 매양 고봉선생(高峯先生)은 사칠논(四七論)에 대하여 하서(河西)에게 나아가 질문(質問)한 후 자신(自信)을 얻었다 했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89)이 하서신도비명(河西神道碑銘)에서 이를 원용(援用)하자 하나의 설(說)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고봉선생의 후손 겸재(謙齋) 기학경(奇學敬;1741-1809)은 그의 겸재집(謙齋集) 변(辨)에서
[삼가 생각컨대 고봉선생(高峯先生)과 일재선생(一齋先生)이 태극도(太極圖)에 대하여 논(論)하였으나 일치하지 아니하였고, 하서선생(河西先生)이 일재서(一齋書)를 보고서 논변(論辨)한 바 있다. 사칠리기설(四七理氣說)에 이르러서는 무오년(戊午年)에 고봉선생(高峯先生)이 서울에 있을 때에 정추만(鄭秋巒)이 찾아와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설명(講)하자 고봉선생(高峯先生)은 따라(逐條)가면서 정추만(鄭秋巒)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이 이소식을 듣고 서신을 보내왔는데, 고봉선생(高峯先生)은 곧장 답서를 냈다. 어느 틈에 서울에서 장성으로 하서(河西)에게 달려가서 질문하고 또 그의 뜻을 전술할 수 있었겠는가? 하서집(河西集) 중에는 이미 사칠논변(四七論辨)에 관한 글이 없고, 고봉집(高峯集) 중에도 하서(河西)와 더불어 논난(論難)한 글이 없고, 하서(河西)의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휘(梁子徽)이 하서가장(河西家狀)을 지었(選)건만 거기에도 사칠설(四七說)은 없으며, 하서부집(河西附集)에 나오는 많은 글 중에도 사칠설(四七說)은 보이지 않는데, 하서(河西) 돌아가신지(沒後) 거의 200년이나 되어서 박현석(朴玄石)이 하서행장(河西行狀)을 지을(撰) 제 비로소 고봉(高峯)이 퇴계호발지설(退溪互發之說)을 듣고서 깊이 이를 의심하여 하서(河西)에게 묻고 많이 하서(河西)의 설(說)을 인용(引用)하였다고 하였으니, 현석(玄石)은 어디에 근거하여 가장(家狀)에도 없는 말을 첨입(添入)하였는지 알 수 없다.]
라 하여, 박현석(朴玄石)의 설(說)이 근거없음(無根)을 변논(辨論)하였다. 이러한 시비(是非)는 하서(河西)를 위해서나 고봉(高峯)을 위해서나 그러 달갑지 않은 일이기에 이러한 시비사이(是非叢中)에 뛰어들기를 누구나 꺼리겠지만, 어쨌든 400년 후의 후학(後學)들에게는 숨김없이 분명히 해둘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봉(高峯)이 사칠논(四七論)을 하서에게 물었(問于河西)다고 해서 고봉(高峯)이 격하(格下)되고 하서(河西)가 높여질 리도 없으려니와, 문우하서(問于河西)한 사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봉(高峯)에게 이를 강요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시비(是非)는 현석(玄石) 이전으로 돌릴 때는 문우하서(問于河西)는 사실무근(無根)이오, 현석(玄石) 이후에야 비로소 문우하서(問于河西)가 한낱 고정된 셈이다. 그러나 현석(玄石)이 만일 겸재(謙齋)의 변(辨)에 대답이 없다면 후학(後學)의 입장에서는 현석(玄石) 이전으로 돌아갈 수 밖 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함에 있어서는 하서(河西)는 일재(一齋)와 더불어 가장 가까웠던 선배의 한 사람이었고, 하서(河西)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退溪)에게 알리는 서한에서 [매번 의문이 있어도 찾아가 물어볼 곳이 없어졌다 每當思索有疑無處告訴]라 할 정도의 깊은 정(情)을 기울인 사이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