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개관
송촌리는 본래 교하군 청암면 지역이다. 마을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촌이라 하였으며, 마을 옆을 흐르는 곡릉천 가에 웅덩이가 많아‘소라지’라고도 불렸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촌리의 일부를 신촌리로 하고, 현내면 갈현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촌리라 하였으며, 파주군 청석면에 편입되었다. 1934년 와석면과 청석면이 합하여 교하읍이 되자 이에 편입되었다.‘아랫말’은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 박봉령(1671~1718)이 큰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 ‘대촌동’또는‘큰말’이라고도 한다. 한편‘새터골’은‘신기동’이라고도 하며, 교하 노씨가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송촌리는 예로부터 전의 이씨, 행주 기씨, 교하 노씨가 대성을 이루었다. 이들 성씨 중에서 마을에 제일먼저 입향한 것은 이씨로 약540여 년 전에 마을에 들어왔다. 그 뒤, 30년 간격으로 기씨와 노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때문에 송촌리를 가리켜‘이∙기∙노 3성이 사는 마을이라고도 하며, 이들 3성은 서로간의 통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현재 송촌리는 162가구 정도로, 이중 외지인은 약 10%를 차지한다. 대성을 이룬 3성씨도 외지로 많이 나가서, 현재는 행주 기씨가 40호, 교하 노씨가 17호, 전의 이씨가 9호 정도이다. 그 밖의 성씨로는 안동 권씨가 아랫말에 많이 사는데, 마을에 들어온 지는 200여 년 정도 되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나루가 있어 마을에서 배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포까지‘돌배’를 부려서 횟돌을 운반하거나‘낙배’라고 하는 작은 배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을사람들은 주로 송촌벌판에서 벼농사에 종사했다. 고기를 잡는 것은 자가소비가 대부분으로 어로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새우젓을 인천에서 받아다가 서울서 직접 파는 사람도 있었다. 해로와 달리 육로교통은 불편했는데, 1980년대 중엽에 이르러서야 마을까지 길이 포장되었다.
학교는 마을에서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 청석초등학교를 다닌다. 장은 70 80년전에는 봉일천장을 이용했으나 금촌역이 생기면서 금촌장을 이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