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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7-01-20 09:49
숭인전비문(崇仁殿碑文)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2,833  
숭인전 비명[崇仁殿碑銘]

은(殷) 나라가 망할 때 세 사람(기자, 비간, 미자)의 행동은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세 사람을 똑 같이 대우했습니다, 주자 역시 같은 처지(處地)라면 모두 그러했을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에게 (방탕생활 보다는 나라 일을 돌보도록) 건의한 것은 비간(比干)이 했던 것보다 먼저 이지만 주왕이 (비간을 죽인 것처럼) 기자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기만 한 것은 하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자를 다른 나라의 (제후로) 임명하지 않고 조선(朝鮮)의 (제후로) 임명한 것 또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하도(河圖)를 복희(伏羲)에게 주었지만 팔괘(八卦)의 변화를 해석하지 못했는데 문왕(文王)이 감옥에 갇혀서 비로소 주역(周易)의 단사(彖辭)를 풀이해내었고, 하늘이 낙서(洛書)를 우(禹)임금에게 주었지만 구주(九疇)의 수리(數理)를 해석하지 못했는데 기자가 역시 감옥에 갇히어 고통을 당하면서 비로소 홍범(洪範)을 서술하여 풀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의 교묘한 이치가 그때서야 크게 밝혀졌으며, 제왕(帝王)이 세상을 다스리는 큰 원리와 큰 법칙이 천하와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문왕(文王)이 주역을 풀이해내지 못하고 기자가 홍범을 설명해내지 못하였더라면 하도와 낙서라는 것도 한갓 알 수 없는 모호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 겁니다. 하늘이 하도와 낙서를 복희와 우에게 주었던 것은 어찌 진실로 그렇게 하려고 하였던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하늘이 백성을 낳고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내려주어 임금과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백성의 삶을 완수(完遂)하게 하고 백성의 가르침을 확립하게 하였으니 복희(伏羲), 헌원(軒轅), 요(堯), 순(舜)이 지나의 백성들을 교화한 일이 그것입니다.
동쪽의 우리나라는 비록 변두리에 치우쳐 있지만, 역시 하늘이 낸 백성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단군(檀君) 이래로 인문(人文)이 드러나지 않아 혼란하고 어지러웠으니 기자가 만든 8조목(八條目)의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면, 끝내 오랑캐의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자가 우리나라의 백성들을 가르친 일은 복희, 헌원, 요, 순이 지나의 백성들을 교화한 일과 같은 것이니, 거기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이 기자를 죽게 하지 않았던 것은 도(道)를 전해주기 위해서였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였으니, 기자가 비록 죽고자하였던들 가능이나 하였겠으며 무왕이 비록 그를 조선의 제후로 임명하지 않으려고 하였던들 가능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기자가 우리의 도(道)에 공훈(功勳)을 끼친 것에 대해서는 실로 천하 만국(萬國)의 사람들이 함께 그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직접 받은 경우를 본다면 우리나라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치우치게 (많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만세(萬世)토록 사람이 사람답게 될 수 있었던 공덕(功德)이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공자(孔子)의 도(道)는 비록 넓어서 포함하지 않음이 없다고는 하지만, 변두리 오랑캐의 나라는 그래도 교화를 입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자가 우리나라를 교화한 일은 공자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공자는 뗏목을 타고 조선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뜻을 가지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예의(禮義)와 문명(文明)의 교화는 그 유래가 오래된 것입니다. 만약 기자의 교화가 공자 이전에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뒤에 비록 공자의 도가 전해졌다 할지라도 그 교화가 어찌 쉽게 스며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기자를 존숭(尊崇)하고 보답(報答)하는 예절은 마땅히 공자를 받드는 정도로 꼭 같이 높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祭祀)를 지내는 제도가 확충되지 못하고 후사(後嗣)를 세우는 전례(典禮)도 아직 빠뜨리고 있으니, 참으로 결례(缺禮)를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는 혹시 기다리는 (다른) 일이 있어서입니까?

우리 전하(殿下;광해군)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지 3년째인 만력(萬曆) 신해년(광해군 3, 1611년)에 평안도(平安道)의 사인(士人) 조삼성(曹三省), 양덕록(楊德祿), 정민(鄭旻) 등이 잇따라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역사(歷史)에서 기자의 후손은 41대를 전하여 기준(箕準)에 이르렀는데, 기준은 위만(衛滿)에 의해 쫓겨났다. 마한(馬韓)의 끝 무렵에 그의 잔약한 후손(孱孫)이 세 사람 있었는데, 친(親)이 그 하나로 후손은 한(韓)씨가 되었고, 평(平)이 그 하나로 기(奇)씨가 되었으며, 양(諒)이 그 하나로 용강(龍岡)의 오석산(烏石山)에 들어가서 선우(鮮于)의 세계(世系)로 전했다> 하였습니다. 또 운서(韻書)에는 <선우(鮮于)의 자손(子孫)에 관한 일이다. 주(周)나라에서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封)했는데, 그 갈라진 아들(支子)인 중(仲)이 우(于)땅을 채읍(采邑)으로 받았으며, 그 이유로 선우(鮮于)를 성으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목(綱目)에는 <기자가 조선(朝鮮)에 봉해졌는데, 그의 자손이 우(于) 땅을 식읍으로 받았으므로 선우(鮮于)를 성으로 삼았다.> 하였으며, 조맹부(趙孟&#38955;)가 선우추(鮮于樞)에게 준 시(詩)에는 <기자의 자손은 털이 많은 노인이 많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우(鮮于)씨가 기자의 후손임은 이미 분명히 드러나서 상당히 뚜렷하지 않겠습니까? 홍무(洪武)년 사이에 선우경(鮮于景)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중령별장(中領別將)을 지냈습니다. 그의 7대손(代孫) 식(寔)이 태천(泰川)에서 옮겨와 숭인전 옆에서 살고 있기를 지금 10년이 되었습니다. 청컨대 선우식(鮮于寔)으로 하여금 기자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는 그 일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셨고, 또 평안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모두 근거가 있는 것이어서 조정(朝廷)의 의논이 모두 옳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정했습니다. 그 다음해인 임자년(광해군 4, 1612년) 봄에 ‘숭인전(崇仁殿)’이라는 전호(殿號)를 달게 하시고 선우식(鮮于寔)에게 벼슬을 주어 전감(殿監)으로 임명하고 그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받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옛날 주나라 무왕(周武王)이 황제(黃帝), 요(堯), 순(舜)의 자손들을 찾은 다음 삼각(三恪)으로 세워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은 성인(聖人)께서 덕(德)있는 인물을 높이고 끊어진 후사(後嗣)를 이어주는 뜻은 참으로 천 년이 지나도 같은 일입니다.
또 평양부윤(平壤府尹)에게 명령하여, 묘에 이르는 길(墓道)을 봉(封)하고 사우(祠宇)를 수리할 것이며, 제전(祭田)과 관리할 노비(守奴)를 더 마련하여 제수(祭需)를 지공(支供)하게 하고 사우를 청소하게 할 것, 그리고 무릇 선우(鮮于)씨를 성으로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군적(軍籍)에 올리지 말 것이며, 사우 아래에 모여서 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근신(近臣)을 보내어 재계(齋戒)한 후 사당에 향축(香祝)을 올리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그 사유를 고(告)하게 하였으니, 기자를 존숭하는 전례(典禮)가 이에 이르러 빠집이 없어 유감(遺憾)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윤리(倫理)를 부식(扶植)하고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는 하나의 중대한 기회이니, 아, 성대한 일입니다.
이에 앞서 만력(萬曆) 병자년(선조 9, 1576년)에 평안도의 선비(士子)들이 성사(聖師)의 유택(遺澤)을 사모하여 평양부의 서남쪽 창광산(蒼光山) 아래에 서원(書院)을 설립하여 강당(講堂)을 만들어 그 이름을 ‘홍범(洪範)’이라 하여 여러 선비들이 기자를 존숭하고 도리를 강명하는 장소로 삼았고 무신년(선조 41, 1608년) 겨울에 ‘인현(仁賢)’이라는 편액(扁額)을 달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 정사호(鄭賜湖)가 보고하기를, 이번에 기자를 모신 전당(殿堂)에‘숭인전(崇仁殿)’이라는 전호(殿號)를 걸고 후손(後孫)을 세워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실로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이에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모두 마치 다시 부사(父師)께서 끼쳐준 문명(文明)의 교화를 입은 듯이 기뻐하고 고무되었으며, 모두 이러한 사실을 비석에 새겨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부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전후의 사적(事跡)을 빠짐없이 기록하게 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뚜렷이 드러나게 하고 후세 사람에게 영구히 전해지게 하소서 라고 하니, 전하께서 그리하라 하시고, 마침내 신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서술하게 하셨습니다.
신은 마침 예관(禮官)을 맡아 끝자리에서 의논에 참여하였으며 세상에 다시없는 전례(典禮)를 지켜보았으니, 두려운 마음으로 명령을 받았지만 글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빠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명문(銘文)을 올리오니, 그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큰 규범을 우(禹)임금이 받아서 은(殷) 나라의 기자(箕子)에게 전해주었다.

은사(殷師;기자)가 뒤를 이었으나 어려움을 당한 뒤에야 그 이치를 천명(闡明)한 인문(人文)이 처음 나타났다.

이에 인륜을 설명하여 무왕(武王)의 물음에 답하였으니 실로 제왕을 깨우치는 교훈이다.

이미 무왕에게 스승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표준을 주었으니 의리로 볼 때 신하가 아니다.

천지(天地)가 변화하자 기자는 그 옳고 밝고 온화하게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다.

마침내 동쪽 땅을 돌아보고 그 이치를 확충하였으니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먼 곳도 없고 좁은 곳도 없이 8조목(八條目)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여 오랑캐(夷)를 문명국으로 만들었다.

인의(仁義)의 도리가 스며들어 길에서는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으니 예의(禮義)로써 다스린 결과이다.

높도다, 훌륭한 덕이여! 백세(百世)토록 존숭하나니 그 은택을 입음이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패수(浿水)의 서쪽 언덕에 정전(井田)의 도랑 자취 아직도 남아 있으니 신묘한 유적(遺跡)은 어제처럼 생생하다.

고려 때에 처음으로 사당을 세웠으나 예식(禮式)이 갖추어지지못하고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해이(解弛)해졌다.

멀고 먼 성학(聖學)의 계통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으나 이리 흩어지고 저리 갈라졌다.

오로지 밝으신 우리 임금님만은 천도(天道)를 따르고 표준을 세웠으니 오래도록 끊어졌던 천도를 이어셨다.

전당(殿堂)에는 아름다운 이름이 걸려 있고 서원(書院)에는 화려한 편액이 붙었으니 더욱 빛이 나고 웅장하다.

후사(後嗣)를 세우고 절손(絶孫)을 이어주어 영원토록 자자손손 작위와 록(祿)을 이어받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무왕 때의 삼각(三恪)이다.

이 사당에 특별히 제사를 지내니 서직(黍稷)이 향기롭고 예의(禮意)가 양양(洋洋)하다.

아, 훌륭하시도다, 우리 임금님이여 훌륭한 계책을 이어받아서 우리 나라의 중흥을 빛나게 하시다.

무너진 전례(典禮)가 다 복구되어 화려한 예식이 성대히 거행되니 천고(千古)에 한번 새롭게 되었다.

아, 크게 드러났으니 문왕(文王)을 이에 몰세(沒世)토록 사모한다.

숭록대부 행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 동지서연사 세자우빈객(崇祿大夫 行禮曹判書 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同知書筵事 世子右賓客) 신(臣) 이정구(李廷龜)가 전교(傳敎)를 받들어 글을 지음.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嘉善大夫 同知敦寧府事) 신(臣) 김현성(金玄成)이 전교를 받들어 글씨를 씀.
정헌대부 지제교 돈녕부사(正憲大夫 知製敎 敦寧府事) 신(臣) 김상용(金尙容)이 전교를 받들어 전액(篆額)을 씀.
가의대부 평안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평양부윤 순찰사(嘉義大夫 平安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 平壤府尹 巡察使) 신(臣) 김신국(金藎國)이 전교를 받들어 비석을 세움.





平壤 崇仁殿碑
崇仁殿碑(篆 題)
崇仁殿碑銘幷 序
殷之亡也三人之行不同而孔子&#20006;稱三仁朱子以爲易地則皆然臣竊&#29982;以爲箕子之諫紂在於比干之先而紂之囚以不殺天爲之也武王之不封於他邦而封於朝鮮亦天也何者天以何圖授伏羲而八卦之變猶未著文王囚而始演易彖天以洛書授神禹而九疇之數猶未明箕子&#25145;而始&#21465;洪範天人之妙於是大明而帝王爲治之大經大法得傳於天下後世使文王不演易箕子不&#21465;疇則河之圖洛之書特一未竅之混沌耳天之授羲禹豈亶使然哉玆非天意而誰歟且天生烝民必降聖賢作之君作之師以遂其生以立其敎羲軒堯舜之敎中土是已我東雖僻亦天民也而曰自檀君人文未彰泯泯&#26876;&#26876;&#20795;상징箕子八條之敎則終未免爲左&#34941;之俗箕子之敎東方是猶羲軒堯舜之敎中土盖有不可得而已者此又非天意而誰歟天之不死箕子爲傳道也爲化民也箕子雖欲死得乎武王雖欲不封于朝鮮得乎然則箕子之有功於斯道實天下萬國之所共賴而其親灸之恩則吾東國最偏受三韓萬世人得以爲人之功德爲如何哉孔子之道雖大而無外蠻貊之邦猶有所不化箕子之敎東方在孔子未生之前故孔子至有乘&#26740;欲居之志禮義文明之化其所從來久矣&#20795;使箕子之敎不有以先之則後雖有孔子之道其化豈易以入哉然則我國崇報之禮當與孔子&#20006;隆然而享祀之制不廣立後之典尙闕誠欠事也豈亦有待歟我殿下嗣服之三年萬曆辛亥本道士人曹三省楊德祿鄭旻等相繼抗&#18429;言史稱箕子之後傳四十一而至準爲&#34910;滿所遂馬韓末有孱孫三人曰親其後爲韓氏曰平爲奇氏曰諒入龍岡鳥石山以傳鮮于世系韻書曰鮮于子姓周封箕子于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氏鮮于綱目稱箕子封於朝鮮其子食采於于因姓鮮于趙孟&#38955;贈鮮于樞詩箕曰箕子之後多&#39663;翁鮮于之爲箕子後不旣章明較著矣乎洪武間有鮮于景者爲中領別將其七代孫寔自泰川來居殿側今十年請以寔主箕子祀殿下重其事命禮官詢于大臣且令本道採訪覆 啓事皆有據廷議咸以爲可遂以鮮于氏定爲箕子後至明年壬子春命揭殿號曰崇仁官鮮于寔爲殿監子孫世授焉昔周武王求黃帝堯舜之後立爲三恪以奉其祀聖人崇德繼絶之意可謂千載一揆也且 命府尹封墓道修祠宇增置祭田及守戶使之供&#31906;盛備&#27922;灑掃凡姓鮮于者復其家無籍于軍&#20478;聚居祠下仍 遣近臣齋香祝祭于廟以&#21567;厥由尊崇之典至是而無復遺憾此實扶植&#24413;倫 挽&#22232;世道之一大機會嗚呼盛矣始萬曆丙子本道士人慕聖師之遺澤立書院於府西南蒼光山下設講堂名曰洪範以爲多士欽崇講明之所歲戊申冬 命扁額曰仁賢至是觀察使鄭賜湖上聞曰今&#33586;箕殿揭號立後致祭實數千年來所未有之盛擧一域臣民擧歡欣聳動有若重被父師文明之化咸願勒之貞珉以揚&#38286;休乞 命儒臣備述前後事跡庶幾表著觀瞻傳示無極殿下曰可遂 命臣&#21465;之臣適&#24541;禮官與聞末議而獲覩曠世之典承 命祇慄不敢以文辭淺陋不足以自效爲解謹拜手稽首而獻銘

銘曰

天錫大範神禹則之以傳殷師
殷師嗣興蒙難乃闡人文始顯
爰&#21465;&#24413;倫以承聖問寔維帝訓
旣師武王錫民之極義罔臣僕
天地變化我得其正明夷自靖
乃(耳+卷)東土乃推斯道實天所造
無遠無陋八條以化變夷爲夏
仁(水+&#20990;)于膚道不拾遺禮義之治
巍乎盛德百世以欽受賜到今
浿水西涯不&#27820;井&#27947;神跡如昨
肇祠于麗禮式不備寢遠以弛
遙遙聖緖不絶來雲派散支分
惟明我后遵範建極遠紹絶學
殿有美號院有華額益光且碩
立後繼絶永襲世爵式是三恪
特祀于廟黍稷馨香禮意洋洋
&#29463;歟我王聖謨其承賁我中興
墜典畢擧縟義彬彬千古一新
於乎不顯文在於&#33586;沒世之思


崇祿大夫行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館成均館事同知 書筵事世子右賓客臣李廷龜奉 敎&#35668;

嘉善大夫同知敦寧府事臣金玄成奉 敎書

正憲大夫知敦寧府事臣金尙容奉 敎篆

嘉義大夫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平壤府尹巡察臣金藎國奉 敎立石

萬曆四十一年三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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