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가 학문으로 길을 돌린 사람들이 투신하는 분야는 대체로 역사학(특히 한국사), 아니면 동양철학이다.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 재야운동가이자 한학자인 기세춘(奇世春)씨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난해한 묵자(墨子)를 지난 92년 국내 처음으로 완역한 그는 같은 민주화 운동가인 신영복 교수와 함께 '중국역대 시가선집' 4권을 내고, 환갑이 넘은 뒤에는 더욱 작업속도에 피치를 올려 동양철학과 관련한 개론서나 역주본을 연이어 선보였다.
칠순을 맞은 그가 이번에는 '성리학 대전'을 들고 나왔다. 상ㆍ하 전 2권에 1천100쪽에 이르는 묵직한 분량이다. 성리학이란 카드를 꺼낸 이유를 "성리학을 모르면 한민족이 아니다"는 말로 대신한다.
"지금 우리의 국교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자본주의다"고 자문자답하는 그는 똑같은 질문을 전통시대로 치환해 700년 동아시아 국교는 성리학이었다고 말한다.
이번 저작에서는 "박물관에 보관된 신비로운 유물로만 박제된 성리학의 복원"을 위해 상ㆍ하권을 각각 중국과 한국편으로 나누었다. 대체로 연대순서를 밟아 동아시아 사상이라는 큰 흐름에서 신유학 즉, 성리학이 어떤 시대적 배경에서 출현했으며,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원전 텍스트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평이하게 풀어 나가려 했다.
저자는 성리학을 유학의 테두리에서만 묶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유학은 본래의 공자학을 근간으로 노장(老莊)과 불교를 결합시켜 만든 통합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리학은 오늘날 동양사상이라고 일컫는 특징들을 주물하게 된다. 인간과 자연, 천지와 우주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바라보고 사회 속에서는 자연과의 조화, 공동체 정신의 강조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그 폐단이나 부족함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예컨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조선성리학의 최고봉을 이룬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퇴계의 경우 천심은 곧 인심이라는 인성평등론을 주장했지만 사람마다 타고난 성질이 다르다는 공자로 회귀하는 바람에 인권평등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이 또한 개혁적 주기론자였으나 사대ㆍ모화사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와중에서 기씨는 성리학이 가장 큰 병폐로 거론되는 당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전개된 사단칠정론이나 노론 당내에서 벌인 낙호 논쟁과 같은 학술토론을 당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사입력 2007-07-26 17: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