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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8-06-18 10:09
원당선세성묘안내문
 글쓴이 : 기노환
조회 : 1,658  
   원당선세성묘안내문.hwp (31.0K) [1] DATE : 2013-04-21 10:09:08
(一)원당 선세 성묘 안내문
(1) 정무공(휘 건 1390?~1460)은 조선왕조 단종때 생六신의 한분으로 추존하여 오고 사적은 많은 사기에 있으며, 우리 奇성을 중흥하신 명조이시다. 우리 奇성은 고려말 변태성의 공민왕에게 두차례 박해를 당한 1371년도부터 공의 출세시 까지 약 반세기 동안은 대단히 침체 하였던 것이다. 公은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헌부 지평에 탁배되어 판중추원사(종일품으로 지금의 무임소장관) 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무요, 녹은 청백리이시다. 시호는 제왕, 영상, 명현의 업적을 상증하여 사후에 존칭하는 명칭이요, 녹은 이런 업적을 표창하여, 물자나 토지로 하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문벌에 청백리 집을 제일로 치는데, 우리 奇성은 청백리 집이다. 제주도에는 公의 생사당이 있었고 장성의 추산사에 향사 하였었다. 公의 신도비는 월사 이정귀(좌의정) 선생의 찬으로 경수공(휘 亮衍)께서 준공 하였는데, 비명전자는 영의정 홍순목 (갑신정변때 개화당 홍영식의 부친)이 비문소자는 이조판서 김병서(세도제상)가 썼으며, 一男二女를 두셨다. 公의 분묘는 545년이 되는데 삼국시대부터 고려조까지 수백의 역대 왕능이 거의 실전되여 있는 것으로 보아 公의 분묘처럼 五세기를 고이 수호하여 오는일은 여러 씨족중에 드문 일이다.
(2) 정무공의 子 장령공(휘 軸 1418~1464) 은 관직은 장령(종四품)이요, 五男二女가 다 출세 하였으나, 둘째 응교공집 외에는 다 번창하지 못하였다.
(3) 정무공의 孫 응교공(휘 襸 1440~1492)은 관직은 응교(정四품)요, 시호는 정렬공(시보에는 누락)이요, 五男一女가 모두 번영 하였다.
(4) 정무공의 증손 복재선생(휘 遵 1492~1521)은 기묘 명현으로 조광조 선생과함께 혁신정책을 급진 시키려다가 二十九세에 수구파 남정에게 몰려 함경북도 온성에서 三十一세 에 수명하였다. 약관으로 명만천하 하였고 문집二권이 있고, 고양등 七개 서원에 향사 하였었다. 시호는 문민공이요, 호당의 우대를 받았었다. 문자 시호나 호당이 있는 씨족은 좋은 문벌로 치는데, 우리 奇성은 문자 시호가 복재, 고봉, 노사,세분이 계시고 호당은 만전 영의정까지 세분이 있다. 一男一女이다.
(5) 정무공의 현손이요, 복재선생의 子 판윤공(휘 大恒 1519~1564)은 조정에서 발언권이 세였었고, 관직은 한성판윤(정二품)이고, 시호는 정견공이요 二남을 두셨다.
(6) 정무공의 五대손이요, 복재선생의 孫 삼강공(휘 應世 1539~1585)은 만전(휘 自獻)의 부친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의 증직이 내렸고, 덕창부원군을 封하였으며, 시호는 효행으로 삼강공이요, 묘비문은 중원의 명필이고 명나라 흠차대사인 주지번이 썼고 三男五女를 두셨다.
(7) 정무공의 七대손 덕풍군(휘 協)1572~1627)은 병자호란때 선천부사로 능한산성에서 되놈의 침범 을 방어하다가 순직하여 충신 정여문이 내리고 덕풍군을 封하였고, 강화부사와 황해감사를 역임 하였는데, 역사소설에 많이 나와있다. 이런 충열집 자손이 번창하여야 할터인데 슬프게도 중년에 무후 되었다.

이상 선세분묘는 매년 10월 1일에 전국문중대표가 모여 성묘후 제실봉사를 서원대제 예절로 창홀향사하여 선세의 음덕을 추모하고 대종중 총회를 개최하여 종사를 진행한다.

(二) 幸州古記 안내
행주(덕양산)는 우리 奇성의 발상의 성지임으로 선세부터 행주를 본관으로 삼어왔고, 지금 우리는 이를 기념하는 큰 유허비를 세워 선세의 찬란한 업적을 널리 알리고 추모하여오고있다. 우리 선세는 이곳에서 세거하여 오면서 장상이 배출하고 혈류가 계승하여 국가에 공훈과 사회의 교화가 많았으며 대원제국의 奇황후가 출생하여 그 부조를 왕으로 추봉 하였고 後원(몽골)의 왕세자도 모두 행주 奇씨의 후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세에 공헌이 많은분을 국가에서 부원군이나 군을 封할때에는 반드시 이땅에 관련이 있는 옛 지명으로 덕양고봉이라 불러왔었고 이지방에서는 이곳 바위를 奇가바위, 우물을 奇가 우물이라 기념하여 왔었다.
조상을 추모하고 고향을 그리워함은 인간 본능의 감정이므로 우리는 이땅을 본관으로 삼아 살아서는 문벌을 표시하고 죽어서는 남자는 행주기공 아무 여자는 행주기씨라 하여 선세로 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기념하여오고 후세에까지 이렇게 기념하여 갈 성지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귀중한 땅을 기념할만한 아무 흔적 하나를 남겨놓지 못하였슴으로 六⋅二五의 혼란기에 이곳 권력배가 저의 가족묘지로 오손하였던 것을 우리는 이를 정화키 위하여 四년간의 피땀어린 투쟁으로 여러 관서를 교섭 하였으되 도리어 문교부장관은 행주기씨 기념비는 세우지 못한다고 통고를 四차나 하여왔다. 최후 국회에 청원하여 문공위원회의 四차례의 심의를 거칠때에 여야간의 찬부는 격론 노호로 험악한 장면을 비쳐 휴회 사태까지 이르렀으나 사필귀정으로 六五년八월三일 제五二회 국회에서 우리 청원대로 의결을 얻어 이땅을 국유화시켜 영구보존시키고 횡폭을 부리던 권력배의 가족묘 三기는 자진발굴 화장하여 이를 정화하고 문교부 장관의 거부통고를 번안시키고 당당한 허가를 얻어 유사이래의 큰 유허비를 세웠다. 그런데 호사다마로 천만뜻밖에 안성이씨란 무지배들이 장난하여 아무증거없는 무명고총을 자기네 六백년전 선대 분묘라 망단하여 봉분을 조성하고 상석까지 가설하여 우리 유허비를 침해 하였으니 우리 수만씨족이 건재하면서 이런 모욕을 그대로 당하며 유산으로 후세에까지 줄수도 없는것이다.
하잘 것 없는 이것도 권력 대상이라 五년간의 비상한 노력으로 1970년 十二月 二十八日에 강제철거 시켰는바 도리켜 보건데 그당시 우리문중의 처지에는 기적인것이나 이는 모두다 여러종친들의 협력과 선세의 여음인것이다. 우리는 선세의훌륭한 핏줄을받아온 씨족이다.
또다시 이런 모욕을 당할리는 없으려니와 만일의 후환을 방지키 위하여 유허비 게하를 깨끗이 정리하고 나무를 심으며 통로를 내고 사적 안내판을 세워 내외 관광객의 관광 여건을 조성하여야 할것이며 매년 봄에는 많은 자손들이 반드시 순례식을 거행하여야 할것이다.

幸州奇氏 大宗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