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문집 집에서 낡아간다
2012.09.03 한겨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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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1527~1572) 선생의 16대 종손 기성근(71)씨 |
퇴계와 ‘사단칠정이기’ 논쟁
한국사상사 새 출발점 열어
저작 등 370점 중 18점만 문화재
‘주자문록’은 오역 지적 많아
“시 문화재 일괄 지정” 제안
빛바랜 문집과 고문서에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조선의 거유 고봉 기대승(1527~1572) 선생의 16대 종손인
기성근(71·사진)씨는 지난달 24일 광주시 남구 월산동 자택 안방에서 철제 금고 안에 들어 있던 각종 고문서와
문집들을 꺼내 보였다.
조선 성리학의 틀을 세운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에게 받았던 편지도 오롯이 보관돼 있었다.
광주광역시 광산 너브실에서 태어난 고봉은 퇴계와 8년 동안 ‘사단칠정이기’(四端七情理氣) 논쟁을 벌였던 대학자였다.
두 사람은 1558년부터 1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상적·인간적 교유를 이어갔다. 고봉과 후손들이 남긴 문집과
고문서, 간찰 등 문적 370여점 가운데 광주시 유형문화재(제22호)로 지정된 것은 18점에 불과했다.
기씨는 “고봉의 주요 저작인 <주자문록>(朱子文錄)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약탈돼 영인본만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주자문록>은 고봉이 100여권에 이르는 <주자대전>을 읽고 중요 대목을 뽑아 3권으로 요약한 것이다.
고봉의 후손이 일본 내각문고에 있던 원본을 사진 촬영한 뒤 영인본을 제작해 1976년 <고봉집>에 수록됐다.
2003년 한글로 번역한 <국역 주자문록>이 나왔지만, 오역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안동교 한국고전번역센터 선임연구원은 “한국 주자학이 정착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고봉의 성리학적 관점이 집약돼
있는 <주자문록>은 퇴계와 사상적 논변을 할 수 있었던 출발점이었다”며 “<주자문록> 한글화 작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봉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문서나 후손들의 저작물 중 일부도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다. 고봉의 손자에게 임금이
내렸던 <원종 공신록>은 광주시 유형문화재(제22호)로 지정됐지만 국역본이 없다.
고봉의 장남 함재 기효증(1550~1616)의 <근왕록>(勤王錄)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도 시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한글 번역도 되지 않았다. <근왕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기효증이 군량미 3200석을 모아 해로로
임금이 있던 의주까지 수송했던 내역 등이 기록돼 있다.
기효증이 작성한 고봉의 연보 원본이나 분재기(分財記), 서간문 250여건 등도 당대 생활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들이
어서 한글 번역 작업을 서둘러야 할 때다.
이 때문에 고봉과 그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와 문집을 일괄적으로 광주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학자 박경래씨는 “아직까지 고봉 종가의 문집과 고문서를 목록화한 도록조차 없는 것이 안타깝다”며 “자치단체에서
호남 유학 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안동교 선임연구원은 “고봉 종가 소장 문적은 지역유교 문화 공동의 자산”이라며 “고봉 종가 문서와 간찰 등을 연구해
일괄적으로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