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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03 16:15
<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610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 <기황후> 방송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타 배우들의 호연으로 월화극 정상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기황후>는 월화극 독주체제를 이어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원작인 <기황후 1, 2>가 e-book 베스트셀러 순위 8위와 9위에 올랐다고 한다.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지지를 얻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한 것이라는 데, 드라마의 극본을 맡은 작가 2인이 직접 집필함으로써 드라마 <기황후>의 전개와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선사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인기를 떠나서 냉정히 바라보면 이 드라마는 상당히 심각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기황후 논란]
●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기황후>, 역사를 작가의 상상에 맡기다

첫째, 기황후 관련 사료가 부족한데도 전문가들의 조언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한국에는 몽골 학회가 있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흔적이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시청하는 드라마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작가의 상상에 맡긴다니 기가 찰 일이다.

둘째, 방송 소비자들의 기호에 지나치게 영합하여 소비자가 보려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실어 담으려 하고 있다. 역사드라마가 가진 한계의 하나이지만 나관중 <삼국지>식의 통속 무협지의 형태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면서도 화려한 궁중 생활이나 치정 장면에 비해서 대몽골제국의 전투장면이 너무 허술하게 묘사되어있는 점도 크게 거슬린다. 동네 건달들의 패싸움보다도 전투 씬(scene)이 형편이 없어 저 군대로 몽골제국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하였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물론 제작비 등 여러 가지 문제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것이라면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셋째, 무지한 작가와 PD의 상상력만으로 만든 드라마는 역사 왜곡도 왜곡이지만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한몽 관계에 부적절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드라마 초반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공녀 문제와 폐주 왕유(충혜왕?)가 고려유민으로 구성된 총알받이(화살받이) 군대를 이끌고 돌궐 정벌에 참여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당대의 권신(權臣) 연철목아(燕鐵木兒 : 엘테무르)의 자제인 당기세(唐其勢 : 탕키시)와 심양왕이 야합하여 고려왕을 폐위시키고 그를 다시 백안(伯顔 : 바얀) 휘하에 포로로 보낸다. 드라마 제작진은 고려의 폐주인 왕유가 백안장군의 수하로 들어가 고려인들의 리더로 '화살 받이'를 해야 하는 대목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이 부분을 폐주 왕유가 다시 부상하는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다. 몽골의 군대가 고려의 민간인들을 전쟁 '화살(총알) 받이'로 사용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대도(베이징)에서 가장 더럽고 비루한 슬럼가(slum)로 고려인촌이 나온다.

그리고 그 고려인 슬럼가의 촌장으로부터 왕유는 멱살이 잡히면서 온갖 수모를 겪는다. 그러면서 또 그 촌장이 전(前) 고려왕(왕유)에게 "망조가 깃든 힘없는 나라는 더 이상 이국 땅에 끌려간 제나라의 백성을 보호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드라마에는, 고려 슬럼가 촌장이라는 자가 前고려왕에게 "왕인지 지랄인지 하는 놈 그 놈 말이냐?(<기황후 15회>)"라고 한다. 도대체 이 이상한 말들은 모두 어떤 기록들에서 나온 것인가?

이 드라마를 보면 누구라도 몽골에 대해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작가들은 어떤 기록에서 고려 군인들을 '화살받이(총알받이)'로 쓴 장면을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역사 왜곡에 관해서 제작진이나 작가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해서 드라마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한 바 있다. 물론 기황후 자체에 대한 사료는 부족한 것이 맞지만 그러나 원나라와 고려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너무 방대하다. 실제로 <원사(元史)>와 같은 사료처럼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을 보면 사료가 무궁무진한데도 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일반 대중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도록 적당한 내용으로 그럴듯하게만 묘사하고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고려사> 원문도 이미 일반 대중을 위해 번역되어 있다.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니 드라마에서는 이런저런 내용을 창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드라마는 당시의 정황을 검토하여 개연성이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한다. 그 개연성들은 기존의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서 얼마든지 사실에 가까운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고 오히려 그 개연성들이 드라마의 재미를 오히려 높여줄 수도 있다.

개돼지로 태어날지언정 고려인으로는 태어나지 말라니?

1990년 타이완(臺灣)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하칸추루(한촐라) 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 몽골과 코리아(高麗)는 함께 몽골세계 제국을 창업했습니다 !"라고 하여 한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 이 말의 비밀들을 찾아가 보자.

무엇보다 먼저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고려 시대에 고려군과 몽골군의 첫 만남은 1218년 12월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퇴하기 위해 연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깊은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고려와 몽골의 개략적인 관계사는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첫 만남에서 고려군와 몽골군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는데 몽골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형제의 맹약 이후 고려와 몽골은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특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고려 측에서는 김취려, 조충 장군이 몽골은 카치온(哈眞, Khachi'un) 장군이 주도하였고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들이 의형제를 맺어 카치온이 아우로 고려 측의 장수들이 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카치온 장군이 말하기를 "우리가 만리 밖에서 와서 고려와 힘을 합해 적을 격파하니, 1000 년 동안에도 보기 드문 행복입니다. 마땅히 국왕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이나, 우리 군사가 너무 많아서 멀리 행군하기 어려우므로 다만 사자를 보내어 사례를 하겠습니다."하였다. 카치온 장군과 잘라(扎刺, Jala) 장군이 조충과 김취려를 불러 동맹을 맺으며 말하기를 "우리 두 나라는 영원한 형제가 되었나니, 만세(萬世) 뒤의 우리의 아이들이 오늘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주1) 이 기록은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시대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고 몽골은 이 맹약을 우둔하리만큼 지키려 했다(이 부분도 다른 장에서 충분히 해설할 것이다.)

드라마 <기황후>의 작가나 PD가 무지하다는 것은 고려왕 왕유의 여러 가지 행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 보면 왕유가 황태후의 초청을 받아 만찬을 가서 그 앞에서 읊은 시가가 두보(杜甫)의 춘망(春望)인데,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노래한다. (<기황후 15회>)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 나라는 망하였는데도 산과 강 여전하고)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 봄이 오니 성 안에 초목이 무성하네)
感時花濺淚 (감시화천루 : 시절을 아는 꽃들은 눈물을 보이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 이별이 한스러워 새들조차 놀라네)


마치 그의 목소리가 일제 강점기에 윤봉길 의사만큼이나 비장하다. 고려 슬럼의 촌장도 "다음 생애는 개돼지로 태어날지언정 고려인으로는 태어나지마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이들 작가의 수준이라면 수준이겠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고 글을 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드라마에 도가 넘은 엉터리 지식을 가지고 글을 쓰면 그것은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다.

이 무지한 작가들에게 묻고 싶다. 원나라 시기의 고려가 진정으로 망했는가?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다 망했을지언정 오직 고려만이 멀쩡하였는지를 왜 모르는가?

세계를 지배한 몽골, 고려는 존중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몽골은 세계를 지배하면서도 고려에 대해서 국체를 유지하여 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같은 고려의 독립적인 지위는 여러 차례 지적되어왔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도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2005년판 <국사>교과서. 88쪽) 고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 전문가를 자처하는 외국의 역사가들은 고려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고려까지 몽골 제국 안에 편입되게 원나라 지도를 그리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 부분은 원 황제 무종(武宗: 하이산, 1307∼1311)이 지대 3년(1310) 고려에 보낸 제서(制書 : 조서[詔書]와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원 황제 무종은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서 자기의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위를 누리는 나라는 오직 삼한(三韓)뿐이다. 선왕 때부터 생각하면 거의 100년 가까운 기간에 부자가 계속 우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또 서로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이미 공훈을 세웠고 또한 친척이 되었으니 응당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주2) 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당시의 기록이다.

몽골학자 B.하과(Лхагва)의 연구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대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국가는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 무력으로 점령해 영토나 권력 전체를 자신의 아래에 두는 형태의 통치 방식이다. 금나라, 위구르, 콰레즘, 페르시아의 일부분, 남송이 이 형태에 해당한다. 둘째, 몽골의 일부 대칸과 그들의 가계 소유지에서 기원해 그 통치 구역 내에 정권을 수립하는 형태의 통치 방식이다. 어거데이 칸국, 차가타이칸국, 일칸국이 이에 해당한다.

이 형태는 해당 칸국의 지도자들에게 국내 정치를 총괄하는 메커니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대몽골제국이나 몽골 대칸들의 지배 체계를 입혀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셋째, 그 나라의 영토나 독립된 권력을 그대로 남기고 자신을 대변하는 기구나 사신 또는 그 나라의 왕이나 칸들을 통해 지배하는 통치 방식이다. 고려는 위의 형태 중 세 번째에 속한다.(주3) 이 경우에는 인질을 바치고 군을 도우며 양식을 운반하고 역을 설치하며 백성들을 제공하기도 하고 원나라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현지국을 감시하도록 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게 된다.

예컨대 <고려사>〈원종〉조에는 "태조 칭기즈칸의 제도에는 무릇 내속된 나라는 인질을 바치고 군을 도우며 양식을 운반하고 역(驛)을 설치하며 백성들을 차출하기도 하고 다루가치를 설치한다는 것은 일찍이 명백히 제시된 바 있다.(太祖成吉思皇帝制度, 凡內屬之國, 納質・助軍・輸糧・設驛・供戶數, 籍置達魯花赤, 已嘗明諭之矣)"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려의 경우에는 부마국이 되면서 다루가치가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 원 무종(하이산칸)의 영정(원대 그림).

5000년 기나긴 역사에서, 한국에 대규모의 식량을 제공한 나라는 미국을 제외하면, 대몽골 제국밖에 없었다. <고려사>에는 원나라 황제가 많은 거금(巨金)을 고려 왕실에 보낸 내용이 무수히 실려 있다. 그 같은 큰 규모의 대외 원조(援助) 뿐만 아니라, 고려왕실이 원나라 황실과 가족관계였던 관계로 충렬왕(1274~1308)의 탄신일에 원나라 태후가 40여 마리의 양을 보내기도 하고, 고려는 국내에 가뭄이 들면 원나라 중서성에 곡식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주4) 고려 원종(1259~1274) 15년 원나라는 쌀 2만 석을 고려에 보내주었고 충렬왕 17년 원나라는 강남미(江南米) 10만 석을 무려 47척의 배로 고려에 보내주기도 했다. 한반도의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엄청난 쌀이 공수되었다.(주5) 물론 일본 정벌의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한국 역사책들은 몽골에 의해 고려가 받은 많은 원조나 혜택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당시 일본 원정에 대한 분석은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복잡한데 이 부분도 다른 장에서 다룰 것이다.)

원나라 황제 "고려를 일가로 본다"

고려에 대해 남다른 사랑을 보인 대표적인 원나라 황제가 바로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다. 세조는 고려왕이 누차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자 분통을 터드리다가도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라고 하기도 한다.(주6)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한다. 원 세조는 "지금 짐(쿠빌라이칸)은 고려를 일가로 본다. 고려에 어려움이 있다면 어찌 짐이 고려를 구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주7) 이와 같이 원나라 세조의 고려왕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도처에 나오고 있다.(주8) 원나라 황제들이나 다루가치의 고려에 대한 애정은 다소 지나친 감도 있다.

▲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영정과 사냥하는 모습(1280) 자료. ⓒ위키피디아

드라마에서 보듯이 원나라 일개 장수가 고려국왕을 함부로 하대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흔히 문제가 되는 다루가치도 천자의 부마국인 고려에서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려사>에서 다루가치가 국왕에게 절을 하지 않자, 황제의 칙사가 "(고려)왕께서는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같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고 나무라는 장면과 이에 다루가치가 허둥지둥 변명하는 대목도 나온다.(주9)

심지어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굳이 다루가치를 둘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반문한다.(주10) 그래서 1278년 경에 이르면 다루가치의 존재는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왕은 세계 대제국인 원나라 전체 종친(宗親) 서열의 4위에서 7위에 해당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1300년) 6월 임자(壬子)에 (충렬)왕이 상도(上都)에 이르러 종전(椶殿)에서 황제(성종 테무르칸)를 알현하고 고려의 특산물을 바쳤다. (이에) 황제가 지순 잔치를 크게 열었다.

지순이란 중국말로 '색깔'이란 뜻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색으로 옷을 통일하여 입는 것이다. 황제가 왕에게 명하여 참석게 하였는데 왕은 여러 제왕(諸王)들과 부마(駙馬)들 가운데서 (고려왕의) 서열이 4번째로 배정될 만큼 황제의 총애가 특별하였다."라고 한다.(주11) 특히 충선왕(忠宣王, 1308~1313)은 원나라 무종 황제 옹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고려 왕실의 세력이 원나라 내에서도 절대적으로 강대하게 되기도 하였다.(주12)

고려와 몽골의 관계, 왜 이토록 특수한가?

<원사(元史)>에는 세조(世祖) 쿠빌라이칸이 서거한 뒤 그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오직 몽골인과 고려인만이 출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 기록은 그대로 <고려사>에도 나타난다. 또 원나라 성종 테무르 황제(成宗, Temür)가 "고려와 몽골의 관계가 왜 이토록 특수한가"라는 것을 주변 신하들에게 반문한 적도 있다. 요수(姚燧)는 그의 문집(<목암문집(牧庵文集)>)에서 "몽골과 고려의 관계와 같은 특수한 밀착관계는 만고에 유례가 없다."고 적었을 정도이다.(주13)
▲ 원 성종(테무르칸)의 영정(원대 그림).

통일신라나 고구려 이후 한국인들의 대외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고려와 현재의 한국일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오늘날과 매우 흡사하다. 마치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토익(TOEIC)과 토플(TOEFL)에 목숨을 걸듯이 공부하여 미국으로 가는 것처럼, 당시 고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2011∼12년 기준으로 10만 7054명의 한국인이 미국에서 수학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유학에 따른 비용이나 미국과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이 규모는 엄청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몽골학의 국내 대표적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몽골학회 이사장)는 당시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에는 그 인구의 절반이 고려 사람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고려인들이 많았다고 한다.(주14) 그래서 현대의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영어에 목숨을 걸듯이 당시에는 몽골어에 목숨을 걸은듯하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몽골어 참고서의 존재가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 즉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몽어유해(蒙語類解)>라는 이른바 몽학삼서(蒙學三書)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몽골 사랑이나 현대 한국인들의 미국 사랑이나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필자의 귀에는 마치 <몽골어의 왕도>, <성문 종합 몽골어>, <맨투맨 몽골어> 등의 제목으로 들린다). 2013년 현재 한국인들이 영어를 죽기 살기로 배우듯이 고려인들도 몽골어를 그런 행태로 배웠으리라는 것을 몽학삼서(蒙學三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원나라 당시 조금이라도 잘 나가는 고려인치고 몽골 이름을 안 가진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예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몽골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이 주장에는 상당한 근거들이 있다.(다음 편에서 상술함)

현재 한국에서는 대몽골 시대에 몽골과 협력한 일에 대해서 매도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이 지나치게 팽배한 결과로 보인다. 명나라와 협력한 일은 오히려 존경의 대상이 되는데 원나라와 협력한 일에 대해서는 '오랑캐의 앞잡이'쯤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소중화의 병이 깊은 것이다. 교류가 활발해 질수록 몽골의 귀족이나 장군들은 고려 여인들을 아내로 맞기를 원했다. 사실 양국 간에 활발히 전개된 문화교류는 어느 면에서 양국인들의 결혼으로 시작되고 또 촉진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고려와 몽골과의 혼인관계는 다음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보고서에는 몽골 병사들이 신흥 명나라 주원장의 공세에 밀려 요동반도에서 전쟁을 치르면서도 현지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동족'이라 하여 살상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조선 세종 때에도 몽골은 조선에 사신을 파견, '형제국이니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공격하자'는 국서를 전달했다. 일제 침략기엔 일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이 몽골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주15)

우르진훈데브 페렌레이 전(前) 주한 몽골대사는 언론 인터뷰(2004년)에서 "몽골 사람은 한국을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몽골은 운명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했다. 관련 학술 대회(2007년)에서 이상면 서울대 교수는 "양국 국민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 어느 나라 국민 간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며, 양국 국민 간 우호 관계가 무르익어 어느새 '우리가 남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동질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몽골어는 어순이 비슷하고 토씨가 있으며 기초적인 어휘에서도 비슷한 것이 적지 않다. '눈'이 같고 '귀'가 비슷하며, '바른쪽으로'를 몽골어로는 '바른쭉으루'라고 말하고, ' 왼쪽으로'를 '준쭉으루'라고 발음한다. 팽대아(彭大雅)ㆍ서정(徐霆)의 <흑달사략(黑韃事略)>에서는 "몽골인들이 말을 타고 달리다가 서로 마주치게 될 때 (상대방의) 왼쪽으로 통과하면 '(나는 당신을) 존중한다(相順)'는 의미이고 남에게 고기를 바칠 때 왼손을 사용하면 '(나는 당신을) 깔본다(相逆)'라는 의미"라고 한다.(주16) 신기하게도 이런 습속은 오늘날 한국에 그대로 살아있다.

이상을 보면 한국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적 배신을 한 나라는 고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제 관계를 단순히 개인적 의리의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가 망한 후 한반도의 지배층들이 보인 행태는 철저히 숭명반청(崇明反淸)으로 지속되었던 것과 대조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파탄으로 몰고 간 대표적인 사건의 일부이다. 당시 한반도의 지배자들이 청나라와 보다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만주인(滿洲人)들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입관(入關)한 후 텅 빈 만주 대륙을 청나라와 협조하여 지켰더라면 오늘날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같은 역사적 시련은 없었을 것이다.

드라마로 돌아가 보면 당시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서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홀대받았다는 작가나 PD의 시각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이것은 작가나 PD가 이 시대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제작 방향에 대해서 좀 더 세심한 주의와 자문인단의 역할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 주석

(주1) 哈眞曰: "我等來自萬里與貴國合力破賊千載之幸也. 禮當往拜國王吾軍頗衆難於遠行但遣使陳謝耳."哈眞札刺請冲就礪同盟曰:"兩國永爲兄弟,萬世子孫無忘今日." (<高麗史> 列傳「金就礪傳」) 이 기록은 <고려사>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歲戊寅太祖聖武皇帝應天奮擧之初有亡遼遺種金山王子驅掠中原陸梁東土略無歸順之意妄有興復之謀. 朝廷命哈眞扎刺以討其罪天寒雪深粮道不繼. 我五代祖忠憲王遣趙冲金就礪助兵餽餉恊力攻破. 於是兩元帥聞奏朝廷與冲等結兄弟之盟世世子孫無忘今日.(<高麗史> 36卷 「世家36-忠惠王」)

(주2) 朕觀今天下有民社而王者惟是三韓. 及祖宗而臣之殆將百載厥父菑而子復肯播曰我舅則吾謂之甥.旣勳以親宜貴與富 (<高麗史> 忠宣王 1年)

(주3) B.하과(Б.Лхагва), <13~14세기 몽골-한국의 관계와 전통으로부터>, 1996(서울)을 박원길 S.촐몬 <한국·몽골 교류사 연구> (이매진, 2013)에서 재인용.

(주4)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5) "庚寅元遣中書舍人愛阿赤來先是爲征日本運江南米十萬石在江華島今遼瀋告飢帝詔以五萬石賑之. (<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주6) "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元史> 世祖紀)

(주7) "今朕視爾國猶一家, 爾國若有難,朕安敢不救乎"(<高麗史>列傳「李藏用傳」)

(주8) 예를 들면 <高麗史>의 기록에 "삼가 생각컨대 세조께서 특히 우리나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조 증조가 계속하여 親朝하였으며 마침 1천년에 際하여 부자가 따라서 입근함이 우금에 70년이 넘었나이다 "라고 한다. 원문은 庚寅以五道人民流入雙城女眞遼陽瀋陽等處表請刷還曰:"天本無私雖高卽聽人如有告所欲必從故罄卑情冀回大度. 欽惟世祖偏恤我邦高曾繼以親朝適此一千年際父子因而入覲于今七十歲餘.(<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 그리고 세조는 고려군신의 내조를 크게 기뻐하면서 고려를 여러 나라에 자랑하는 장면들이 <高麗史>에 보인다. 즉 "高麗君臣感戴來朝. 義雖君臣歡若父子. 計王之君臣亦已知之.' 褒獎小邦誇示諸國光寵至矣. 繼以帝女齊國大長公主嬪于忠烈王誕得一子卽太尉王年十六入侍天庭冊爲世子詔曰:'嗣惟汝嫡親是我甥. 世爲藩輔.'"(<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

(주9) (충렬)왕이 조서 받기를 마치자 경령전에 배알하고 강안전으로 돌아와 황포를 입고 즉위하여 군신의 하례를 받았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조사(詔使 : 황제의 사신)를 접대하여 잔치를 베푸는데 詔使가 왕이 황제의 부마이기 때문에 왕을 남쪽으로 추양하고 조사는 동쪽으로 다루가치는 서쪽으로 앉았다. 왕이 행주하매 詔使가 절하며 받고 마신 뒤에 또 절하는데 다루가치는 서서 마시고 절하지 아니하자 詔使가 말하기를 "왕께선는 천자의 부마인데 늙은 놈이 어찌 감히 이 같이 무례하게 행동하느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라고 꾸짖으니 다루가치가 답하기를 "공주께서 계시지 아니하고 또 이것은 그 동안의 관례였습니다."라고 변명하였다. 원문은 [王受詔畢謁景靈殿還御康安殿服黃袍卽位受群臣朝賀仍宴詔使詔使以王駙馬推王南面詔使東向達魯花赤西嚮坐 王行酒詔使拜受飮訖又拜達魯花赤立飮不拜詔使曰: "王天子之駙馬也老子何敢如是吾等還奏汝得無罪耶?"荅曰: "公主不在且此先王時禮耳."(<高麗史> 28卷「世家28-忠烈王1」)]

(주10) (충렬)왕이 합백평장(哈伯平章)에 이르기를 "왕경 다루가치의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랑가알(郞哥歹)은 일찌기 우리나라에 왕래하였으니 그를 대신하면 가히 쉽게 부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합백이 천자(세조)에게 이를 아뢰어 여쭈어 보니 천자가 말하기를 "굳이 (고려에) 다루가치를 둘 것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랑가알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고? "라고 말했다. 원문은 王語哈伯平章曰: "王京達魯花赤秩滿而郞哥歹嘗往來小邦若以爲代可使如耳目也."哈伯以奏帝曰:"安用達魯花赤爲抑郞哥歹么麽人也?"(<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또 <고려사>다른 부분에는 "(충렬)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천자께서는 가깝고 믿을만한 타타르인으로 다루가치를 삼아주소서.'라고 말하니 천자가 말하기를 '어찌 꼭 다루가치가 필요하겠는가 ? 네가 스스로 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王曰: "願得上所親信韃靼一人爲達魯花赤." 帝曰: "何必達魯花赤汝自好爲之."(<高麗史>28卷「世家28-忠烈王1」)

(주11) "六月壬子王至上都謁帝于椶殿仍獻方物帝大設只孫宴.只孫華言顔色赴會者衣冠皆一色帝命王侍宴王於諸王駙馬坐次第四 寵眷殊異."(『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 또 다른 기록에는 "甲午皇太子卽皇帝位是爲成宗王與公主獻金盞銀鏤葵花盞各一副金甁金鏤銀尊壺湯甁酒甁各一事半鏤銀尊胡甁各一事銀盂八十一事銀鍾十八事紫羅九匹細苧八十六匹豹皮十八領水獺皮八十一領以充庭實表賀禮訖帝命王赴宴時諸王駙馬畢會王坐第七"(<高麗史>31卷「世家31-忠烈王4」)라고 되어있다.

(주12) 壬申太上王餞于金郊酒酣使臣孛魯兀以帝命取國王印授逸壽王. 於是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凡十年.武宗仁宗龍潛與王同臥起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及右丞相荅刺罕院使別不花與王定策迎立懷寧王海山.左丞相阿忽台平章八都馬辛等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太子知其謀先一日執阿忽台等使大王都刺院使別不花及王按誅之. 五月皇姪懷寧王卽皇帝位是謂武宗. 三十四年五月戊寅元以定策功封瀋陽王制曰: "咨爾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世祖外孫先朝貴壻方朕纘承之始寔叅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保孝父忠君之大節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進封瀋陽王."又令入中書省叅議政事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及黃金五百兩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所賜珍寶錦綺未可勝計.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이에 대하여 충선왕 스스로도 백관(百官)에 하교(下敎)하는 자리에서 "부마가 되어 삼조(세조ㆍ무종ㆍ성종)를 겪어 모신 것이 어언 19년이 되었다. 더구나 년전에 황제 황태후 황태자를 우러러 의지하여 공을 일으키고 황제 폐하를 옹위하여 그 뜻과 일을 도와 사해를 숙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辛未王在金文衍家百官會梨峴新宮王下敎曰: "肇自祖王統合三韓臣服述職者尙矣.逮我父王上國顧遇夐異於前獲承釐降厚沐寵光孤亦入侍繼爲駙馬歷衛三朝于今十有九年越於年前仰憑皇帝皇太后皇太子奮庸熙載肅淸四海至於本國奸佞之儔亦皆蕩除內外安寧. (<高麗史> 33卷 「世家33-忠宣王1」)] 충혜왕도 "大德末我祖太尉王佐仁宗皇帝平定內亂行至央骨迎立武宗皇帝爲定策一等功臣."(<高麗史>36卷 「世家36-忠惠王」)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13)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 (민속원 , 2008)> 22쪽. 이와 관련된 기록은 [癸酉世祖皇帝崩王與公主以羊十馬一祭于殯殿其文曰: "鰈墟莫遠佇瞻蓂陛以來賓龍馭忽回曷極鼎湖之哀慕夢也覺也顚之倒之聊修菲薄之儀冀垂歆容之賜." 將使贊成事鄭可臣讀之諸大臣止之曰: "豈宜用諸侯之禮祭天子乎?" 遂不讀王奠薦之禮哀慕之誠皆致其極 元朝喪制非國人不敢近唯高麗得與焉故王之從臣雖輿臺之賤出入無禁.(<高麗史> 31卷「世家31-忠烈王4」)]

(주14) 박원길(2008) 22쪽.

(주15) 이상면 「한국-몽골 국가연합 가능성 분석」『한몽국가연합의 의의 세미나』 ; <신동아> 2007. 6월호.
(주16) "其國禁, … 騎而相向者,其左而過,則謂之相順,食人以肉而接以左手,則謂之相逆 "(<黑韃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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