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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03 16:18
<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907  
 
드라마 <기황후> 17부에서 20부까지는 주로 왕유(고려 폐주)가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권신인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을 공격하는 부분으로 원 순제(혜종 : 후에 기황후의 남편)의 황권을 되찾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왕유는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을 제거하기 위해 괴문서를 작성하여 붙이기도 하고, 황태후와 공모(共謀)하여 잔존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시청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그 이전에 왕유가 당했던 대우나 서러움과 고통 등을 본 시청자들은 이 고려 폐주(왕유)가 원나라의 현실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순제 당시에 고려왕이 돌궐을 무찌른 적도 없고 고려왕이 이에 대해 공을 세운 적도 없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엘테무르(연철)는 "백성들은 원래 어리석기 때문에 공포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면서, 왕유를 직접 불러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그의 충고를 듣는다. 그리고 난 후 엘테무르는 "보이지 않은 적을 간과했고, 적에게 강공을 가급적 하지 않아야겠다."면서 "나는 왕유가 필요하다"는 말한다. 엘테무르는 유난히 왕유의 말을 신뢰하고 자기 아들(탕기시)이 왕유가 '음모를 꾸미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의 죄를 추적하려하자 오히려 그의 뺨을 때리면서 "왜 왕유를 시기하느냐?"라고 다그친다. 그는 왕유의 말을 아들보다 더 신뢰한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드라마에서의 이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뒤죽박죽이 된 상태이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고려 폐주는 충혜왕(충숙왕의 큰아들, 공민왕의 친형)인데 충혜왕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이자 악행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특히 섹스 스캔들로 악명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2012년 SBS 드라마 <신의(神醫)>에서, 충혜왕이 '기쁨조'들과 어울려 놀면서 술에 취해 칼을 배들고 충신들을 아무렇게나 살해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 드라마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엘-테무르는 고려 충혜왕이 1328년 세자의 신분으로 대도(大都 : 베이징)에 머물 때 그를 친자식처럼 총애했다고 한다.(주1) 그러니까 드라마 <기황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엘테무르가 충혜왕으로 보이는 고려 폐주(왕유)를 매우 총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충혜왕은 실제로 원나라의 현실 정치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기황후 논란]
●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 <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민초들의 대왕, 충선왕

원나라의 현실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려왕이 분명히 있었다. 그는 바로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이다. 따라서 드라마의 왕유는 충혜왕과 충선왕을 합성해서 대충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충선왕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자

충선왕[왕장(王璋) 원래 이름은 왕원(王謜)]은 충렬왕(忠烈王, 1236~1308)과 원 세조 쿠빌라이(khubilai khan)의 따님인 쿠툴룩켈리쉬(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선왕의 몽골명은 이지리부카(益知禮普花)로 세 살의 나이에 세자로 봉해졌다(1277). 이지리부카란 '어린 황소'라는 뜻으로 충선왕의 출생으로 고려와 원나라는 명실공히 일가(一家)가 되었다. 원세조(쿠빌라이 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딸의 아들인 충선왕(외손자)을 매우 총애하였다고 한다. <익제난고(益齋亂藁)>에 따르면, 원나라를 방문했던 어린 이지리부카(충선왕)를 친히 편전에서 불러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느냐?"라고 묻기도 하였다.

<고려사>에도 충렬왕 18년(1292년) "10월에 황제가 왕을 침전(寢殿)에 불러들여 '(요즘) 무슨 글을 읽고 있느냐?"라고 물으니 왕(충선왕)이 대답하기를 통감(通鑒)을 읽었다고 말씀드리니 황제가 다시 말하기를 '그래 역대 제왕들 중에는 누가 가장 현명하더냐?'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대답하기를 한 고조(유방)와 당 태종(이세민)이라 하니 황제가 또 묻기를 '한고조와 당태종은 나(원세조)와는 어떠한고?'하였다. 이에 왕은 '제가 아직은 어리니 어찌 이를 제대로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라고 나와 있다.(주2)

아버지인 충렬왕이 주로 사냥이나 하러 다니고, 애첩인 무비(無比)와 즐겨 놀았기 때문에 어린 충선왕은 주로 어머니와 함께 있었고 의지하였는데 1297년 5월 그의 어머니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했다. 충렬왕은 왕비(원세조 따님)가 죽은 관계로 원나라 6대 성종(테무르)에게 표를 올려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할 뜻을 밝혀 1298년 1월, 세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충선왕이 되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서도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학식도 풍부했다고 한다.(주3) 특히 민초(民草 : 가난한 백성)들의 삶과 관련하여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의 실각을 가져오기도 했다.

충선왕은 일찍이 유흥과 사냥을 즐기는 아버지 충렬왕에게 울며 말리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9년 2월에 충렬왕이 장차 충청도에 사냥을 가고자 할 때의 일이다. 당시 세자는 겨우 아홉 살인데 훌쩍훌쩍 울고 있어서 유모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어린 세자가 대답하기를 '지금 백성의 살림살이가 어렵고 봄철 농사에 할 일도 많은 시기인데 아버지(충렬왕)께서는 어찌하여 사냥을 가십니까?'라고 하여 이를 충렬왕에게 고하니, 충렬왕이 이르기를 '어린 아이가 희한한 말을 다한다. 사냥할 계획이 이미 정해졌으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라고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가 병을 얻어 충렬왕이 사냥을 가지 못했다"라고 한다.(주4)

<고려사>에는 "어떤 사람이 떨어진 베적삼을 입고 땔나무를 지고 궁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어린) 세자가 사람을 시켜 물으니 그 사내가 대답하기를 '장작서(궁중의 토목 건축을 장리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린) 세자가 '나는 이 같이 옷이 아름다운데 백성들은 저렇게 남루하니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궁에서 일하는 노비가 동네 아이들의 종이 연(鳶)을 빼앗아 와서 (어린) 세자에게 바쳤다. 세자가 묻기를 '너는 이것을 어디서 얻었느냐?'고 물으니, 노비가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러자 세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백성들에게 취하여 나에게 바치다니 무슨 짓이냐?'라고 하면서 돌려보냈다"라고 한다.(주5)

충선왕은 왕권을 대행할 때에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도 했지만, 즉위(1298년 1월)한 후 곧 과감한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시도하였다가 기득권층의 철퇴를 맞았다.

충선왕은 즉위 후 인사 제도부터 시작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였다. 특히 기존의 권문세가나 기득권층들의 반발이 심했는데, 이들은 충선왕과 그 왕비인 부타시리(계국대장공주 : 원세조의 손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면서, 동시에 개혁 정책의 문제점 등을 들어 원나라 조정과 합동으로 공격하였다. 결국 충선왕과 공주는 원나라로 불려 들어갔고 이에 대한 문책으로 충선왕은 불과 7개월 만에 폐위당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1298년 8월 원나라 성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이전에 경(충렬왕)이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기로 청하므로 세자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국사는 그대로 경의 훈도를 듣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제 듣건대 세자가 나라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한 이래로 독단적이고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은 대체로 세자의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적어서 능히 짐이 친히 부탁했던 뜻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에게 이전과 같이 국정을 다스리게 하겠노라"고 하였다.(주6)

시련과 절망은 충선왕을 더욱 단련시키고

이로부터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유일한 적자(嫡子)이지만 아버지가 애첩인 무비(無比)만을 총애하는 등 어머니를 멀리했기 때문에 부자간의 사이가 나빴다.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은 원나라에 머물면서 숙위(宿衛 : 일종의 정치적 볼모)가 되었고 10여 년 간을 보내게 된다. 충선왕은 원나라 조정에서는 어리고 정치경험이 없고 미숙한 정치가로 낙인이 찍혔고, 고려에서는 기득권 세력이나 보수층으로부터 현실을 모르는 지나친 '개혁마니아'로 몰렸으며, 아버지인 충렬왕과도 극심한 불화상태에서 원나라에서 고독한 정치적 볼모로 살아가야 한 것이다. 충선왕으로서는 이 시기가 최악의 시련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충선왕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단련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난 정치에 대한 반성과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던 기간이었고 새로운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하나의 기회가 서서히 태동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이 기간에 원의 종실(宗室)인 카이산(海山, Qaisan : 후에 무종), 아유르바리바드(Ayur-Baribad : 후에 인종) 등과 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다.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은 당시 황제인 성종(成宗 : 테무르)의 조카였고 충선왕이 성종의 처사촌(妻四寸)이므로 가까운 인척 관계였다. <고려사>와 <익제난고(益齋亂藁)>에 "원나라의 무종(카이산)과 인종(아유르바리바드)은 잠룡(潛龍 : 황위에 오르기 전의 상태를 말함) 시절에 충선왕과 더불어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고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이들은 가까운 사이였다.(주7)

그러던 가운데 1307년 후사가 없었던 원 성종(成宗)이 병사하자 원 황실 내부에서 격렬한 황위 쟁탈전이 발생하였다.(주8) 당시 유력한 후계자는 성종의 사촌 아난다(阿難達, Ananda : 안서왕)와 성종의 조카인 아유르바리바드(후에 인종)가 유력한 후보였는데 이 당시 충렬왕은 원나라 조정의 대세에 따라 아난다를, 충선왕은 당연하게도 늘 함께 지낸 아유르바리바드를 지지했다. 당시 황후인 불루칸(卜魯罕 Buluqan)과 승상 아쿠다이(阿忽台, Aqudai)는 아난다를 옹립하려 하였다.(주9)

▲ 무종과 인종의 모후 타지(答己) 자료. ⓒ중국위키백과
이에 아유르바리바드(후에 인종)와 그의 어머니 타지(答己)(주10)와 충선왕 등은 정치적 쿠데타를 결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1308년 2월 아난다가 원나라 수도인 대도(베이징)에 들어오자 아유르바리바드 일파가 그를 체포했고(주11) 충선왕은 아난다를 옹립하려는 세력들을 직접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이로써 궁중 쿠데타는 성공하고 카이산이 먼저 황위에 올라 7대 무종(武宗)이 되었고(1308), 그다음에 아유르바리바드가 8대 인종(仁宗)으로 즉위했다(1311). <고려사>에서는 "좌승상 아쿠다이 등이 안서왕(安西王) 아난다를 옹립하여 정변(쿠데타)을 도모하거늘 태자가 그것을 알고 하루 먼저 아쿠다이 등을 잡아서 충선왕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잡아 처형하게 하였다. 5월에 회녕왕(懷寧王)이 황제위에 나아가니 이가 무종(武宗)이다"라고 한다.(주12)

▲ 무종과 인종 영정 (원대 그림). ⓒ중국위키백과

세계 권력의 2인자, 충선왕

충선왕은 이 공로로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1308년 5월 무종은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했다. <고려사>에는 원황제 무종(武宗)이 "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좌승상(左丞相) 부마(駙馬) 왕장(王璋 : 충선왕)은 세조(쿠빌라이칸)의 외손자요, 전대부터 귀한 사위(貴壻)로서, 짐이 선조의 사직을 계승하는 위업[纘承]에 처음부터 참여하여 짐을 크게 도와주었도다[參翊贊之功]. 선한 일을 더 높이고 악행을 징벌하는 대의의 큰 정신으로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고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는 큰 모범을 보전하게 할 것이니 가히 개부의동삼사 태자태부(太子太傅) 상주국(上柱國) 부마도위(駙馬都尉)를 특별히 수여하고 심양왕을 진봉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정사에 참의하게 하고 김호부 옥대 칠보대 벽전금대 및 황금 500량 은 5000량을 하사하였으며, 황후나 황태자도 또한 충선왕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하게 하여 각종 보물과 비단 등 갖은 귀한 하사품들은 가히 이루다 헤아리지 못 할 만큼 되었다"고 한다.(주13)

여기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충선왕이 도대체 무슨 지위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충선왕이 심양왕과 고려왕(이즈음 충렬왕이 사거함)이 다시 됨으로써 한반도와 요동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원나라의 각종 국사에 참의하게 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의 실세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충선왕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태자태부(太子太傅)는 황태자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사람으로 충선왕이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무종과 인종이 충선왕과 동고동락하면서 충선왕의 많은 조언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충선왕의 학식과 교양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 제국의 다음 세대의 황제의 스승이 되었다는 것은 충선왕이 어떤 지위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주목할 부분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이다. 개부의동삼사는 황제 다음 가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즉 충선왕이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는 것은 원나라 권력의 제 2인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서 말하는 삼사(三司)는 태위(太尉) ·사도(司徒) · 사공(司空) 등으로 삼공(三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관직은 중국에서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최고의 관직이다. 그러니까 개부의동삼사란 이 삼공에 준하면서 부(府) 즉 관청을 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본의 사카모토요시타네(坂元義種) 교수에 따르면, 송나라를 기준으로 송나라 황제가 이 개부의동삼사를 인정해준 사람은 4명뿐이었다.(주14) 그 만큼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고 영향력이 있는 작호인 셈이다. <삼국사기>「장수왕」51년조(463년)에는 고구려의 장수왕이 송나라 세조로부터 정동대장군고려왕(征東大將軍高麗王)이라는 작호에서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로 격상되었다.

이상을 보면 충선왕이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충선왕 스스로도 백관(百官)에 하교(下敎)하는 자리에서 "부마가 되어 삼조(세조ㆍ무종ㆍ성종)를 겪어 모신 것이 어언 19년이 되었다. 더구나 년전에 황제 황태후 황태자를 우러러 의지하여 공을 일으키고 황제 폐하를 옹위하여 그 뜻과 일을 도와 사해를 숙청하였다"고 말하고 있다.(주15) 충혜왕도 "우리 선조인 태위왕(충선왕)께서 인종 황제를 도와 내란을 평정하고 나아가 앙골(지명)에 이르러 무종황제를 영입하매 천자를 세우는 일에 1등 공신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주16)

▲ 충선왕의 가계도 및 통치범위와 유배경로. ⓒ김운회

이상을 보면, 고려왕은 단순히 식민지의 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학문적으로는 심양왕의 실질적인 권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주로 일본 학자)들이 있으나 적어도 충선왕의 경우에는 틀린 견해이다.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은 고려 국왕으로 복위했지만 아버지인 충렬왕의 전철을 그대로 밟기도 했다. 여러 가지 성적인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고 측근 정치에 몰두했으며 아예 고려는 관심이 없기도 했다. 세계를 지배하던 원나라 국정을 주무르던 그에게 고려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충선왕은 세계 제국의 2인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충선왕은 국왕에 오른 뒤에도 원나라로 돌아가 1313년 3월까지 5년간 단 한 차례도 고려에 오지 않았고, 대도에서 전지정치(傳旨政治) 즉 신하들에게 교지(명령)를 내려 국정을 처리하는 정치로 고려를 다스렸다. 충선왕이 고려에 돌아가지 않자 원나라 황제가 직접 나서 귀국을 종용하기도 했고 결국 충숙왕(忠肅王, 1294~1339 : 충선왕의 둘째 아들)에게 양위하기도 했다. 충선왕은 양위 후에도 고려 국정을 간섭하기도 했고 심양왕 지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넘겨주지 않고 조카인 왕고(王暠 : 연안군)에게 물려줌으로써 이후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1320년 인종이 죽고, 영종(시데발라 : 인종의 아들)이 즉위하면서 그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12여 년에 걸친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도 기울게 되었다. 결국 원나라 인종(仁宗: 아유르바리바드)의 후비인 고려인 바얀-코토크(伯顔忽篤, Bayan- Khutug)와 고려 출신 환관 임빠이엔토쿠스(任伯顔禿古思)의 모략으로 인해 티베트로 유배되었고, 1323년 그의 매부(妹夫)인 태정제(이순 테무르)가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2년 후에 서거하였다.(놀랍게도, 바얀 코토크는 충선왕의 의붓딸이다. 다른 장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 원 6대 황제 태정제 (그의 황후인 다마시리-카톤도 고려인이다). ⓒ중국위키백과
그동안 한국의 드라마나 소설들은 당시의 실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드라마 <기황후>는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드라마 <기황후>의 고려 폐주 왕유는 충혜왕과 충선왕을 합성해서 대충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로 엘테무르(연철)의 총애를 받았으면서도 궁중 쿠데타를 통하여 엘테무르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사실들이 뒤죽박죽되어 시청자들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상태가 된 것이다. 전날의 고려왕이라는 자가 총알받이가 되기도 하다가 전공(戰功)을 세우더니 갑자기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이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주중 드라마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상황은 더욱 이해가 안된다.

아무리 허구(가공의 이야기)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타당성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라마 <기황후>는 드라마로서는 흥미로울지는 몰라도, 역사적 사실이 결여된 드라마는 공허하여 의미 있는 감동과 교훈을 제대로 주기 어렵다. 예컨대 실제로 충선왕의 일대기는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 같은 요소들이 많다. 차라리 충선왕의 일대기를 '사실 그대로' 드라마로 하였으면 무척이나 드라마 같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의 기황후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당시 몽골과 고려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기황후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그려도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던 <장희빈(張禧嬪)> 이상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 주석

(주1) 구체적인 내용은 박원길, <배반의 땅, 서약의 호수> -21세기 한국에 몽골은 무엇인가(민속원, 2008), 31∼36쪽
(주2) 十月帝召王入寢殿問曰: "讀何書?" 奏云: "讀通鑑." 帝曰: "歷代帝王誰爲賢明?" 對曰: "漢之高祖唐之太宗" 帝又問曰: "漢祖唐宗孰與寡人?" 對曰: "臣年少何足以知之." 帝曰: "然問於宰相以來."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주3) 예컨대 <고려사>에는 충렬왕 14년 8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시 청소년이었던 충선왕이 내료(內僚) 원혁(元奕)의 무릎에 기대어 한가롭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원혁(元奕)이 충선왕에게, "임금은 모든 일들을 너무 세세하게 살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함이 지나치시니 사람들을 조금 너그러워지셔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소년 충선왕은 안색을 바꾸면서, "너희 놈들이 나를 어리석고 아둔하게 한 다음 손바닥에 올려놓고 떡 주무르듯 하려느냐?" 라고 꾸짖으니 원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원문은 王年十四嘗踞內僚元奕膝上從容相語奕謂王曰: "人主不宜聰察殿下聰明大過宜小寬容." 王作色曰: "汝輩使我癡暗持弄掌上如軟餅乎?" 奕懼.(<高麗史> 33卷-世家33-忠宣王1)
(주4) 二月忠烈將獵于忠淸道時王年九歲忽泣下乳母請其故*荅曰: "今玆百姓困窮又當東作之時父王何爲遠獵?" 曹義珣以告忠烈曰: "小兒怪哉! 獵期已定不能聽." 未幾公主得疾忠烈不果行. (<高麗史> 33卷-世家33-忠宣王1)
(주5) 又見人衣破布衫. 負柴入于宮門使問之對曰: "將作署其人也." 王曰: "我美衣服而百姓若此於心安乎?" 又有宮奴取里中兒紙鳶以獻問汝安得此以實對. 王曰: "取諸人獻於我何哉?" 卽命還之. <高麗史> 33卷-世家33-忠宣王1
(주6) 癸酉王如孛魯兀館備儀衛遂幸壽寧宮受詔詔曰:"諭前高麗國王王昛曩以卿表請授位于世子謜是用詔謜往嗣王爵國事仍命聽卿訓導今聞蒞政以來頗涉專擅處決失宜衆心疑懼盖以年未及壯少所經練故未能副朕親任之意今遣使詔卿依前統理國政且詔謜入侍闕庭使之明習于事." 孛魯兀之來十日而國人不知有此詔也. <高麗史> 31卷-世家31-忠烈王4-24
(주7) 武宗仁宗龍潛與王同臥同起晝夜不相離 (<益齋亂藁> 卷9上「忠憲世家」)
(주8) 대덕 9년(1305)이 되자, 성종의 건강이 극심히 나빠져 불안을 느낀 성종과 불루간(卜魯罕) 황후는 서둘러 아들 테이슈(德壽)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한달 후인 7월에 테이슈의 장기적인 위협 요소였던 아유르바리바드와 그의 어머니인 타지(答己)를 대도(베이징)에서 회주(懷州 : 지금의 河南省 河內縣)로 보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잠재적인 제위 계승자이므로 대도에서 내보낸 것이다. 10월에 들어 성종이 병환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자 황후 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았던 불루간 황후가 섭정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 황태자 테이슈가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대덕 11년(1307) 정월에 성종(테무르)도 42세로 사망했다. 황태자도 없이 황제가 사망했으니 황위 계승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아난다가 대도로 들어온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307년 2월(신해일) 아유르바리바드는 어머니인 타기와 함께 대도로 돌아왔고 카이산 형제와 가까운 우승상 하라하순(哈剌哈孫)은 모든 관청을 장악하여 아난다의 제위 계승을 저지하고 있었다.
(주9) 당시의 권력 지도는 매우 급박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황후인 블루칸(卜魯罕 : 당시에는 이미 정태후나 황태후가 모두 사망하여 블루칸이 가장 서열이 높았다)은 무종(武宗 : 카이산)의 모후(母后)인 타지(答己)를 심하게 견제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이었다.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두 개의 라인이 있었다. 하나는 아쿠타이(좌승상) ― 불루칸(위구르계 : 황후이자 황태후) ― 아난다(안서왕) ― 몽골종실 소수계 ― 이슬람교 ― 충렬왕 등의 라인과 다른 하나는 하라하순(哈剌哈孫 : 우승상) ― 타지(몽골 전통 황후족 : 옹기라트 씨족 출신) ― 카이산과 아유르바리바드(후에 무종과 인종) ― 몽골종실 다수계 ― 불교 ― 충선왕 등의 두 라인으로 양분되고 있었다.
(주10) 타기(答己)는 옹기라트(弘吉剌) 씨족 출신이기 때문에 카이산의 몽골 종실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았다. 옹기라트는 전통적으로 몽골의 황후 가문이다. 예컨대 칭기스칸의 어머니인 호엘룬(몽골어: Өэлүн, ? ~ ?)이나 칭기스칸의 아내인 보르테(孛兒帖, 光獻翼聖皇后)도 옹기라트 출신이었다. 호엘룬은 테무진(鐵木眞 : 칭기스칸의 이름)의 어머니이자 예수게이의 아내이다. 원래 호엘룬은 칠레두의 아내로 칠레두의 아이를 임신하여 친정에 가던 중 보르지긴족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예수게이는 호엘룬을 아내로 삼았고 이 때 태어난 아이가 테무진이다. 당시 몽골 초원이나 유목민들에게 이 같은 약탈혼은 성행했는데 이로 인하여 씨족들 간의 많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호엘룬은 예수게이가 암살된 후 모진 고통과 질시, 때로는 극단적인 가난 속에서 테무진의 형제들을 키웠다. 후일 테무진이 부인 보르테(孛兒帖)를 메르키트 족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을 때, 당시 보르테는 임신 중이었는데, 어머니인 호엘룬은 테무진을 위로하고 보르테를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이 때 태어난 아이가 칭기스칸의 장남으로 알려진 주치(Зүчи, 1181? ~ 1227)였다. 이 때문에 주치는 평생 출생에 대한 의혹에 시달렸다. 이 같은 사연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칭기스칸은 "옹기라트 씨족이 딸을 낳으면 황후로 삼고 아들을 낳으면 공주와 혼인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라시드 앗 딘(김호동 譯註), <부족지>(사계절, 2002) 참고.
(주11) 당시의 황위계승전의 군사적 동향이나 사태의 전말은 <元史>, 券138,「康里脫脫 列傳」에 잘 나와 있다.
(주12) 左丞相阿忽台平章八都馬辛等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太子知其謀先一日執阿忽台等使大王都刺院使別不花及王按誅之. 五月皇姪懷寧王卽皇帝位是謂武宗.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주13) 三十四年五月戊寅元以定策功封瀋陽王制曰:"咨爾推忠揆義恊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世祖外孫先朝貴壻方朕纘承之始寔叅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保孝父忠君之大節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進封瀋陽王."又令入中書省叅議政事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及黃金五百兩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所賜珍寶錦綺未可勝計. (<高麗史>33卷「世家33-忠宣王1」)
(주14) 坂元義種<ゼミナ―ル日本古代史(下)>(光文社 : 1980) 385∼387쪽.
(주15) 辛未王在金文衍家百官會梨峴新宮王下敎曰: "肇自祖王統合三韓臣服述職者尙矣.逮我父王上國顧遇夐異於前獲承釐降厚沐寵光孤亦入侍繼爲駙馬歷衛三朝于今十有九年越於年前仰憑皇帝皇太后皇太子奮庸熙載肅淸四海至於本國奸佞之儔亦皆蕩除內外安寧. (<高麗史> 33卷「世家33-忠宣王1」)
(주16) (大德)末我祖太尉王佐仁宗皇帝平定內亂行至央骨迎立武宗皇帝爲定策一等功臣.(<高麗史>36卷「世家36-忠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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