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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03 16:20
<기황후>가 왜곡한 '30년 대몽항쟁'의 진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084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으로 국가 기강이 무너지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며 많은 사람이 죽고 황룡사 9층 탑을 비롯한 각종 문화재들은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다.

드라마 <기황후>의 경우에도 기황후의 어머니는 몽골병의 화살을 맞아 죽었고 아버지는 간교한 원나라 왕자의 술책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사병에 걸린 황제(순제)에게 기양의(기황후)는 "저는 한 번도 당신에게 마음을 연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비단 드라마 <기황후>뿐만이 아니라 원나라 시대를 다루는 한국의 소설이나 드라마의 대부분은 많은 고려인이 죽고 전국이 초토화되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2005년 판 <국사>는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와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가 득세하여 최 씨 정권이 무너지고 전쟁은 끝이 났다. 몽고가 고려와 강화를 맺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한 것은 고려를 직속령(直屬領)으로 완전히 정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였다."라고 서술한다. 한국에서 나온 대부분의 관련 책들은 30여 년의 최 씨 무신 정권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을 자주독립 운동의 상징처럼 묘사하고 있다. 무신정권이 일부 무리한 측면은 있었지만, 큰 범주에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대외투쟁으로 보고 있다.

드라마 <기황후> 21부에서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은 "나는 고려를 믿지 않네, 자그마치 30년간을 우리 원나라에 맞서 싸운 독종이 아닌가? 세상 어느 나라도 고려처럼 우리를 괴롭힌 나라가 없단 말일세." 라고 한다. 정말 이 두 나라는 제대로 전쟁을 한 것일까? 또 이 말은 어느 정도까지 사실일까? 이번에는 2회에 걸쳐 고려의 대몽항쟁에 관한 진실을 파헤쳐 보자.

먼저 몽골군의 침공으로 전국이 초토화되고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부분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해서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제 초기의 고려와 몽골 관계를 연대별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고려의 자주적이고 영웅적인 대몽항쟁의 진실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기황후 논란]
●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 <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몽골대제국과 고려의 만남

몽골족은 12세기경 원래 머물렀던 에르군네 강(河) 유역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오논(Onan) 강 일대까지 진출하였고, 1204년을 기점으로 칭기즈칸은 고도의 집중력과 기동성을 갖춘 기마 병단을 이끌고 주변국 정벌에 나섰다. 칭기즈칸이 서하(西夏)를 정벌하고 1211년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이듬해 요동 지구를 지배하던 금나라의 야율류가(耶律留哥 [야율류거])는 농안(農安)에서 10만의 거란인들과 함께 몽골에 투항하였다.(주1) 원래 요동 지구는 거란 유민들이 많아 금나라는 반란을 미리 예방하기 위하여 각종 통제를 시행하였다.
▲ 몽골 제국의 시기별 확장. (위키피디아 USA 재구성) ⓒ프레시안
▲ 몽골 제국의 시기별 확장. (위키피디아 USA 재구성) ⓒ프레시안

야율류가가 몽골에 항복하자 금나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몽골의 지원을 받은 야율류가는 오히려 호사(胡沙)가 이끄는 금나라의 진압군을 대파하였다.

1214년 금나라는 다시 포선만노(蒲鮮萬奴 [푸샨만누])에게 40만 대군을 주어 야율류가를 공격게 했지만 대패하였고, 포선만노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이미 금나라는 수명이 다했다고 보고) 동경(東京)에서 동진국(東眞國)을 건설하였다. 동진국은 건국 당시에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였고, 수도를 현재의 랴오양[遼陽]에 정하고 이를 동경(東京)이라 하였다(처음에는 동만주의 옌지[延吉(연길)] 지방에서 고려시대의 함경도 지방에 이르는 땅을 지배했다가 후에 몽골에 쫓겨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하면서부터 국호를 동진국이라 했다).

한편, 야율류가는 요동(遼東)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새로운 요나라를 건설하려는 세력들과 충돌하여 몽골로 도피하였다. 야율류가는 몽골의 도움으로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몽골로 일단 피신한 것이다.

1216년 봄 야율류가가 몽골로 피신한 이후, 그의 부장(副將)이었던 야시부(耶厮不)가 "거란인들의 뜻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등주(澄州)에서 대요수국(大遼收國)을 건국하였다. 야시부는 칭기즈칸이 파견한 300명의 다루가치도 모두 죽이는 등 몽골에 대항하다가 집권 70일 만에 피살되고 말았다. 몽골은 거란 반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당시 대요수국의 실권자인 김산(金山)은 금나라와 몽골군에 모두 쫓기면서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였다. 김산은 고려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 고려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했지만 고려는 침묵했고, 김산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비교적 허약한 고려로 들어가 유격전(산악전)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 칭기즈칸 등장기의 대외 주변 정세. 교육부 검정 역사부도(신유, 2001) 재구성. ⓒ김운회
▲ 칭기즈칸 등장기의 대외 주변 정세. 교육부 검정 역사부도(신유, 2001) 재구성. ⓒ김운회
두 분 형님 장군 사이에 제가 끼어 앉아도 되겠습니까?

1218년 9월 김산의 군대는 고려의 강동성(江東城 : 현재 평양시 강동군)을 점령한 후 장기전에 대비하였고, 고려의 수도 개경이 압박을 받았고, 고려 북부는 전화(戰禍)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칭기즈칸은 일단 남만주 요동 지역에서는 실질적으로 위협이 될만한 세력이 없다고 판단, 중앙아시아와 이란 등의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칭기즈칸은 일단 만주와 요동 지역을 안정화하려 한 것인데, 바로 이 시기에 몽골과 고려 두 나라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즉 강동성에 장기농성을 획책하는 거란반군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고려와의 협공이 필요했던 것이다.

1218년 칭기즈칸은 카치운[哈眞(Khachi'un;哈只吉)]과 찰자[札刺(jula?)]가 이끄는 1만 명의 몽골군과 함께 2만의 동진국(東眞國) 군사를 파견하였으며 "고려를 대신하여 거란반군을 소탕하겠다."는 명분으로 동진국 정벌을 위해 고려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카치운이 고려에 보낸 문서에는 칭기즈칸의 "적을 격파한 후에는 형제의 맹약을 맺자(破賊之後約爲兄弟)"는 뜻을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몽골군의 남하에 대해 고려 조정은 매우 당황하여 그 대책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당시 서북을 지키던 조충(趙沖)과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몽골측에 가담하자고 주장하여 몽골과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주2)

1219년 1월 14일 강동성(江東城)이 함락되어 거란 반군이 소탕되었고, 몽골원수 카치운(哈眞)은 조충과 김취려와 형제맹약을 맺으면서 이 날을 잊지말자(兩國永爲兄弟,萬世子孫無念今日)고 약속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고려사>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김취려는 키도 크고 수염도 길었는데 카치운은 그 우람한 모습과 말씨를 보고 나이를 묻고 난뒤 김취려가 "예순에 가깝소."라 하자 카치운은 "제가 아직 쉰이 못 된데다가 우리가 이제 한 집안이 되었으니, 그대는 바로 형이고 저는 동생이요."라고 하며 김취려에게 동쪽을 향해 앉게 하였다. 다음날 다시 김취려가 그의 군영으로 갔더니 카치운이, "제가 일찌기 여섯 나라를 정벌하여 귀인들을 많이 보았지만, 형님의 용모를 보니 어쩌면 그리도 기이하오? 내가 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휘하의 군사들도 한 집안처럼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고, 김취려가 군영을 떠날 때는 손을 잡고 문까지 나와 부축해 말에 태워주었다.

며칠 뒤에 조충과 김취려가 이 다시 오자 카치운이 "원수(元帥)와 형님(김취려) 중 누가 더 나이가 많은 거요?"하고 물었다. 김취려가 "원수께서 나보다 나이가 많지."라고 하니 카치운은 조충을 모셔다 상좌에 앉힌 후, "제가 한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혹시 예의에 맞지 않은 듯 하여 걱정입니다. 그러나 친한 사이에 제가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 말씀드리는데, 제가 두 분 형님의 사이에 앉으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김취려가, "그건 우리들도 바라던 바이지만 아직까지 감히 원수에게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뿐이네."라고 맞장구를 치고는 앉아서 술판을 벌이고 풍악을 즐기며 흥겹게 보냈다.

고려의 외교적 오판

형제의 맹약을 한 후 몽골군이 고려에서 철수하자, 고려의 무신 정권은 몽골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진지를 구축하는 등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러던 가운데 1219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가 보고하기를 "몽고가 동진국과 함께 군사를 보내어 진명(덕원) 성외에 내둔하고 공물을 바치라고 독촉합니다."라고 하였다.(주3)

한 달 후에 몽골 사신 11인과 동진국의 9인이 왔고 최충헌이 죽고 아들인 최이(崔怡=최우)가 권력을 승계하였다. 몽골을 북방 오랑캐 정도로 취급하던 최 씨 무신정권은 이들 사신에게 조잡한 옷감 등을 대충 수거하여 적당히 돌려보냈다. 그런데 이것은 고려의 큰 잘못이자 외교적으로 중대한 실책이었다(이 같은 일은 조선의 인조 때에도 되풀이되어 참담한 파국을 맞았다).

1221년 8월,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등이 수십 명의 사신단을 이끌고 와서 왕이 황제의 조서를 대관전에서 맞이하였는데 고려 측에서 외교상 의례를 문제 삼아서 다투기도 하였다. 저고여는 몽골 칭기즈칸의 막냇동생인 테무게옷치긴(鐵木哥斡赤斤)의 균지(鈞旨)를 전하고 수달피 1만령, 세주 3000필, 세모 2000필, 면화 1만근 등의 공물을 요구한 후 단을 내려오면서 고종에게 봇따리를 집어던지는데, 이전에 보냈던 추주포 등으로 조잡하기 짝이 없는 선물들이 담긴 것이었다. 사신단은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고 돌아 가버렸다.(주4)

당시 칭기즈칸의 군대는 중앙아시아·서아시아의 원정(1219~1225)에 나섰고 북만주와 한반도 북부 등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인 옷치긴(Otchigin : 斡赤斤)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최충헌이 몽골에 대해 단지 오랑캐쯤으로 취급하여 소홀히 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분노한 옷치긴이 고려에 요구한 조공의 물량은 고려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규모(수달피 1만령, 세주 3000필, 세모 2000필, 면화 1만근 등)였다. 분노한 몽골이 요구한 것은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는 수탈이었고 이에 대해 고려의 집정자인 최이(최우)는 몽골에 대해 강경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물론 옷치긴의 공물 요구는 지나쳤지만, 그 일차적인 책임은 몽골의 요구를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한 최이의 정책에 있었다.(옷치긴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상세히 해설함)
▲ 몽골 경기병(輕騎兵)의 모습(명대 그림) 자료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김운회
▲ 몽골 경기병(輕騎兵)의 모습(명대 그림) 자료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김운회
1222년 무렵, 칭기즈칸의 서정(西征)이 4년 이상 장기화되자, 동진국의 포선만노(蒲鮮萬奴)는 고려에 접근하여 고려와 동진이 서로 화합하여 몽골에 대항하자는 연합을 제의하였지만, 고려는 침묵하면서 상황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안해진 동진국은 몽골과 고려를 이간(離間)하는 것이 활로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만 고려에 파견되었던 몽골 황제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피살사건(1225년 5월)이 일어난 것이다. 이에 몽골 제국은 즉각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동진국의 방해로 고려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1227년 칭기즈칸은 서하(西夏)를 정벌하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
▲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의 정복지 자료. 교육부 검정 역사부도(천재교육, 2001) 재구성. ⓒ김운회
▲ 칭기즈칸과 그 후계자들의 정복지 자료. 교육부 검정 역사부도(천재교육, 2001) 재구성. ⓒ김운회
1227년 오고타이가 코릴타에서 몽골 제국의 2대 칸으로 선출되었고, 1230년 7월부터 본격적인 금나라와 동진국에 대한 공격에 나서 1234년 1월 金나라를 멸망시켰다. 이어 오고타이칸(원 태종 : 窩鏶台 1185~1241)으로 부터 고려와 동진(東眞)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살리타(撒禮塔 : Salita) 원수는 저고여 피살에 대한 고려 측의 해명을 요구하고 고려를 경유하여 동진국(東眞國)을 정벌하기 위해 일단 고려로 진공했다. 이 과정에서 함신진(咸新鎭 : 현재의 의주)의 수장(守將) 조숙창(趙叔昌), 인주(麟州) 진장(鎭將) 홍복원(洪福源) 등을 포함한 많은 군민(軍民)이 몽골군에 투항하였다. 또 몽골군의 진격로에 있던 인근의 많은 군민도 몽골 측에 투항했다. 당시 살리타는 "우리는 단지 고려의 항복만을 받기를 원한다. 고려가 항복한다면 우리는 동진국(東眞國)을 정벌하러 떠날 것이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고려의 항복을 권유했다.(주5)

최이, 거짓 항복한 후 다루가치를 조직적으로 살해

살리타의 제의에 대해 최이(崔怡)는 아무런 응답을 보내지 않았다. 살리타는 재차 항복을 권유하고 자신들의 주된 공격 목표가 고려가 아니라 동진국임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살리타의 사신 아투(阿土)를 구금하기도 하면서 지연 정책으로 일관하자 몽골군은 본보기로 평주성(平州城) 일대의 주민과 가축을 모두 도살하고 그해 12월에 개경(開京)을 포위하였다.<제1차 몽골 침공(1231)>

이에 실권자인 최이(최우)는 다시 몽골에 항복하였다. 이에 살리타는 3명의 사신을 추가로 파견하였고 고려 고종은 사신을 위해 친히 큰 연회(宴會)를 열면서 몽골군 지휘부에 대해 많은 뇌물을 공여하는 등 몽골 장군들의 환심을 사려고 전력을 다했다. 몽골의 신임을 받고 있는 조숙창(趙叔昌)을 사신으로서 오고타이칸에게 파견하여, 거란의 토벌에 감사하고 저고여(著古與)의 피살은 고려와 무관한 일이며 사신 아투(阿土)를 구금한 것은 동진국 사람으로 오인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아투가 몽골어를 사용하는 것을 파악하자 이내 석방했다는 사실과 고려의 몽골에 대한 항복은 이미 카치운(哈眞) 때 이루어진 것(형제지맹)이라고 문서로 해명하였다.

몽골군은 이를 형제지맹(兄弟之盟)의 준수로 간주하여 고려로 진군한 병력을 철수시키고 살리타는 72명의 다루가치를 배치한 뒤 철수하였다(1232년 1월 11일)

그러나 그해 7월 다루가치의 존재에 대해 큰 부담을 느낀 최이(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최이가 천도 후에 한 첫 번째 일은 다루가치를 무장해제하는 것이었다. 이후 서경 등지에서 다루가치들이 현지의 고려관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루가치의 조직적인 학살이 벌어지자, 몽골은 크게 실망하고 이를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고려 정벌이 시작된 것이다.(주6) 몽골 황제에 의해 파견된 다루가치 전체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은 다른 나라의 경우 거의 발견되지 않는 중대 사태이다. 칭기즈칸의 군대가 파견한 다루가치의 살해는 그 지역민에 대한 대량 학살과 초토화(焦土化)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32년 8월, 황제의 명으로 살리타가 대대적으로 침공하자 강화도의 최이는 즉각 당시의 사태가 양국 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항변하면서 몽골병이 철수할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살리타는 국왕 또는 최이(최우)가 다시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사령관인 살리타가 처인성(處仁城)에서 김윤후(金允候)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살리타의 죽음으로 몽골군이 고려에서 철수하였다. <제2차 몽골 침공(1232)>

몽골군이 철군하자 고려는 전승의 분위기에 젖었고 최이(최우)는 다시 친몽골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최이는 몽골군이 침입하면 친몽골파들 이용하여 위기를 돌파하는 작전을 자주 구사하였다. 이 전술은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몽골 조정에 큰 반감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내분이 심하게 일어났다. 1233년 5월, 무신 정권에 대항하여, 경주와 영천의 농민군이 봉기하여 관군과의 전투를 벌여 서로 죽인 시체가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경(西京)의 낭장 홍복원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3000여 명의 토벌군이 서경을 유린하여 폐허로 만들었다.(주7)

오고타이칸은 고려의 친몽골파의 숙청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고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의 다섯 가지 죄상을 열거하였다(1233년 4월). 그 해 동진국을 멸망(1233년 9월)시키고 다음 해 금나라를 멸망시켰다(1234년 1월).

왕족을 태자로 둔갑시키고 변명에 또 변명

1235년 오고타이칸은 고려(高麗) 정벌을 명령하였다.(제3차 몽골 침공) 이에 고려는 거국적인 대몽항쟁에 들어가면서 4년여를 끌었고 멸망의 위기에 놓인 고려 조정은 1238년 12월 겨울 김보정(金寶鼎)과 어사(御使) 송언기(宋彦琦)를 몽골 측에 보내어 항복하기로 하였고, "국왕이 직접 황제를 알현한다[친조(親朝)]"는 조건 하에 몽골군은 곧 철수하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다시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대해 몽골은 여러 차례 친조(親朝)를 요구했지만 고려 조정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친조가 어렵다고 몽골을 설득하였다.
▲ 몽골 침공 경로(1차∼3차)와 피해 상황 자료. 김용만·김준수(2004, 144)에서 재구성. ⓒ김운회
▲ 몽골 침공 경로(1차∼3차)와 피해 상황 자료. 김용만·김준수(2004, 144)에서 재구성. ⓒ김운회
▲ 몽골 침공 경로(1차∼3차)와 피해 상황 자료. 김용만·김준수(2004, 144)에서 재구성. ⓒ김운회
▲ 몽골 침공 경로(1차∼3차)와 피해 상황 자료. 김용만·김준수(2004, 144)에서 재구성. ⓒ김운회
이에 다시 몽골은 침공하기 시작하였다(1240년). 그러자 최이는 다시 왕족인 왕준(王綧)을 태자(太子)로 둔갑시켜 10여 명의 귀족들의 자제와 함께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1241).(주8) 다시 양국은 잠시 강화(講和) 상태에 있게 되었다.

1246년 오고타이칸의 큰아들인 구유크(貴由 : 재위 1246∼1248)가 칸위에 오르면서 고려가 공물을 바치지 않고 있는 것과 고려왕이 육지로 나온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고려 정벌을 다시 명령하였다.<제4차 몽골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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