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회원가입 아이디/비밀번호찾기
로그인 상태 유지
 
 
 
 ※ 불건전한 언어(비방, 속어 등) 사용시 별도공간으로 임의 이동됩니다.
 
작성일 : 14-03-03 16:22
<기황후>유감…원나라, 고려의 허언을 인내하다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696  
 
이제 궁궐을 짓고 있으니 육지로 나갑니다

1249년 11월 최이(崔怡 : 최우)가 죽고 아들인 최항(崔沆)이 정권을 계승했다. 원나라 조정은 고려에 국왕 친조를 요청했으며, 60명의 사신단을 고려에 보내(1250년 6월) 국왕이 육지를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고려 조정은 이들을 강화도의 수창궁(壽昌宮)에서 크게 환대하여 무마시키는 한편, 48명의 사신단을 보내어 원나라를 무마하였다.(원[元]이라는 국호는 쿠빌라이칸 때부터 사용되었지만 이후 서술상의 편의를 위해 몽골 제국 = 원나라로 사용하기로 한다)

▲무신정권 계보도 자료. (금성 역사부도 재구성) ⓒ김운회
▲무신정권 계보도 자료. (금성 역사부도 재구성) ⓒ김운회

당시 최 씨 무신정권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도 없이 사신들을 계속 보내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원나라를 무마시키기에만 주력하였고, 이 과정에서 계속 원나라와의 약속을 어김으로써 지속해서 몽골의 침공들을 초래하였다.

이것은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왕정복고를 제대로 해서 원나라에 대응하였으면 전국이 초토화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당시의 실권자가 군사정권의 우두머리였고, 무조건적인 항몽(抗蒙)만이 자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초래한 재앙이었다.

1251년 6월 즉위한 멍케칸(헌종 : 1209~1259)은 국내를 안정시킨 후 1253년 여름 예구(也古 : Yegü)를 사령관, 아모칸(阿母侃)과 홍복원(洪福源)을 부장으로 하면서(주1), 고려 국왕이 친조를 거부하고 출륙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하여 고려 토벌을 명령했다.<제5차 몽골 침공>

이 시기를 전후하여 최항은 각종 첩자(諜者)들을 동원하여 원나라의 의도를 파악하는 한편, 사신들을 보내 무마하고 원나라의 사신들을 위해 큰 향연을 베풀기도 하였다(1251년 10월 24일) 최항은 이현(李峴)과 이지장(李之藏)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면서 거짓으로 왕이 출륙을 할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승천부(昇天府)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궁궐을 신축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라는 등의 허언(거짓말)으로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식언(食言)에 질린 원나라는 이들을 억류시킨 뒤 아투(阿土) 등이 이끄는 37명의 사신단을 고려로 파견하였다. 이전에 최 씨 무신정권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는 홍복원(洪福源)은 “고려가 중성(重城)을 쌓고 있으며 육지로 나가려는 뜻은 조금도 없다.”라고 하면서 군사를 동원해 고려를 쳐야 한다고 요청하였지만, 원나라는 이에 대해 일단은 침묵하였다.

수달 사냥하는 몽골군이 무서워서 못 나갑니다

최항이 원나라 사신들을 환대하여 무마하는 데 주력하면서도 원나라 황제의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주지 않자, 1253년 7월 원나라는 군사적 압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 다시 침공하였다.

1253년 8월 최항이 다시 사신을 보내 철군을 애걸하자, 사령관 예구는 고려왕의 친조를 요구하면서 고려왕이 정말로 아파서 친조를 못하는지를 확인하려 한다고 하였지만, 최항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9월에 최항은 다시 대장군(大將軍) 고열(高悅)을 예구에게 파견하여 “고려왕은 황제의 성지(聖旨)를 어김없이 받들고 있습니다. 고려왕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 백마산성(白馬山城) 아래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지었습니다만, 왕이 백마산성 아래의 새 궁궐로 옮기지 못한 것은 왕이 근처에서 수달을 사냥하는 몽골 병사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상식 이하의 허언으로 무마하려하자(주2), 원나라는 고려가 황제의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 각지로 진격하여 고려군을 격파하기 시작하였다.

▲ 강화도와 승천부 백마산 자료(교학사 역사부도 재구성) ⓒ김운회
▲ 강화도와 승천부 백마산 자료(교학사 역사부도 재구성) ⓒ김운회

그러나 뜻밖에도 사령관 예구는 음모 사건에 휩쓸려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예구가 귀환하게 될 즈음, 고려 조정이 예구에게 전군이 철수할 것을 애원하자, 예구는 국왕의 출륙을 요구하면서 멍꾸다(蒙古大) 등 10인의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였다.

멍꾸다는 고종에게 “대군이 들어와 하루에도 사망자가 수없이 발생하는데 왕께서는 어찌 자기 한 몸만 아끼며, 만민의 생명은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왕께서 (하루라도) 빨리 출영하셨으면, 어찌 저 무고한 백성들이 참살되었겠습니까? 예구 대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씀이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곧 예구대왕의 말과 같사옵니다. 오늘이라도 왕께서 출영하여 몽골과 영원히 평화롭게 잘 지내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했다(1253).(주3)

최항은 이들에게 엄청난 환대를 베풀어 흠뻑 취하게 만들고, 고려왕이 강화도로 돌아오자, 고려가 애걸하고 강조했던 화약(和約)과는 달리 고려병들은 각지의 몽골병들을 습격하였다. <고려사>에서는 “교동별초가 평주성외에 복병하였다가 밤에 오랑캐의 군영(몽골군 진영)에 들어가 격살함이 심히 많았으며 교위 장자방은 짧은 칼을 가지고 손수 둔장(주둔지역 지구장교) 20여 명을 살해하였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일단 몽골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항상 그래 왔듯이 친몽파들이나 몽골에 투항했던 관리들을 주살(誅殺)하고 귀양을 보냈다.(주4)

고려 조정의 이 같은 알 수 없고 치기(稚氣) 어린 행태들이 계속 원나라에 보고되었다. 이것은 최항이 오직 자기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어떤 외교적인 레짐(regime)이나 관례(convention)도 무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바로 이 행태가 전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것이다. 오히려 원나라의 대처가 허술하고 관대해 보인다. 최항 정권 당시에는 무신정권에 대한 혐오 분위기와 정상적인 왕정의 복고는 물론, 친몽골적인 분위기가 크게 싹트고 있었다.

1254년 1월 원나라 조정에서는 고려의 태자로 정치적 인질로 온 왕준(王綧)이 진짜 태자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 이른바 친자논쟁(親子論爭)이 있었지만, 멍케칸은 고려가 행한 속임수를 문제 삼지 않았다. 왕준은 몽골 종실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며, 몽골 황실은 그가 ‘사실상 한 가족’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

1254년 3월 최항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분노한 원나라는 이들을 모두 감금하였고, 6월에 최항은 다시 친몽파 사신들을 보내 무마하려하였다. 같은 해 7월 원나라가 두커(多可) 등 사신 50명을 보내자 최항은 고려 고종을 내보내어 환대하지만, 두커(多可)는 “왕은 비록 육지로 나오셨지만 (실권자인) 최항(崔沆)과 상서(尙書) 이응렬(李應烈) 등이 나오지 않아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힐책한 뒤 몽골에 항복한 관리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문제를 제기했다.(주5) 그러자 최항은 이전에 몽골에 항복했던 조방언(趙邦彦) 등을 역마로 빨리 올라오게 하여 왕으로 하여금 “보세요, 우리가 모두 주살하지 않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주6)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 멍케칸(원 헌종 원 세조의 아버지: 1209~1259). 원대 그림
▲ 멍케칸(원 헌종 원 세조의 아버지: 1209~1259). 원대 그림
이렇게 두커 등을 무마한 뒤에 최항은 이 사신단을 통해 멍케칸에게 편지를 보내 몽골군의 철군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1254년 7월 고려를 신뢰할 수 없었던 원나라는 자랄타이(車羅大 또는 札剋兒帶)를 정동(征東) 원수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전국을 휩쓸었는데, 이때 고려의 피해가 가장 컸다. <고려사>에서는 포로가 20만8000여명에 달하고 희생자는 부지기수라고 하였다.<제6차 몽골 침공>

1255년 1월 최항은 평장사(平章事) 최린(崔璘)을 원나라로 보내 몽골군을 철수시켜달라고 눈물로 호소하였는데 이것이 멍케칸을 움직였고 다시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1255년 3월) 그러나 최항 정권에 대해 믿을 수가 없었던 원나라는 4월에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즈음 원나라는 30여 년간을 철군과 침공을 반복적으로 하다가는 고려내의 친몽파의 씨[種]가 마를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의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주연(酒宴)에 원나라 사신단이 계속 놀아나고 몽골군이 들어오면 눈물로 황제에게 호소하는 등 사태의 진전이 도무지 없자 보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원나라는 최항 정권을 토벌하고 왕정을 복고하여 정상적인 형제지국의 맹약으로 선회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1255년 2월 고려가 고종의 입조와 출륙을 하겠다고 맹세하자, 자랄타이(차라대)는 일단 압록강 쪽으로 군대를 물리면서 관망하였는데 또 고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자랄타이는 6개월 뒤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1년 2개월 이상 고려를 유린하였다.<제7차 몽골 침공>
1255년 이후 원나라는 본격적으로 고려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몽골군의 주둔지가 지역적으로는 압록강에서부터 익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여, 그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던 고려에 대한 정책이 일대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자랄타이의 주력군이 담양에 주둔하기도 하고 해양(海陽 : 광주)을 거쳐 나주를 제압하고 목포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홍복원의 몽골부대는 해양에 주둔하였고 아산 앞바다에서도 몽골군이 횡행하였다. 그리고 이전에는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전라도 지역과 도서(島嶼) 지역까지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주7)

이에 최항은 다시 6월에 시어사(侍御史) 김수강(金守剛) 등을 보내 1219년 이래 처음으로 방물(方物)을 바치기도 했지만 몽골군의 군사작전을 중지시키지는 못했다.
▲ 최 씨 무신 정권과 몽골군 침공. ⓒ김운회
▲ 최 씨 무신 정권과 몽골군 침공. ⓒ김운회

몽골군의 침공이 다시 시작되자 백성들도 항전 의사가 없었고 오히려 최항 정권의 무모한 대응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되었다. 이로써 고려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고려 태자로 사칭하여 몽골에 인질로 가 있었던 영녕공 왕준(王綧)이 본격적으로 몽골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왕준은 고려 왕자의 신분으로써 고려 백성들에게 다가가 항복을 호소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 파장은 상당하였다.(주8)

황제는 또 한 번 속아주고

1256년 3월 최항은 다시 원나라의 자랄타이(車羅大 또는 札剋兒帶)에게 사신을 보내어 무마하려 했지만 자랄타이(차라대)는 국왕이 나와 사신을 맞고 태자(太子)가 친히 입조(入朝)한기를 요구하였고 “만약 고려측이 화친하려고 한다면 왜 우리나라 군사를 몰래 습격해 많이 죽이느냐? 이미 죽은 자는 할 수 없지만 사로잡은 몽골군은 모두 돌려보내라.”고 크게 노하였다.

그 해 9월 최항은 달변가인 김수강(金守剛)을 원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김수강은 멍케칸을 화림성(和林城, 카라코룸)까지 따라가 알현하면서 “짐승을 굴 안에 가두고 화살로 (쏴 죽이듯이) 윽박지르면 짐승도 어찌 밖으로 나오겠습니까? 얼음과 눈이 꽝꽝 얼어붙어 있으면 새싹도 나오기 힘이 듭니다(譬如獵人逐獸入窟穴,持弓矢當其前,因獸何從而出,又如氷雪慘烈,地脉閉塞,)”라고 말하면서 몽골군의 선철수(先撤收)를 요구하자, 멍케칸(헌종)은 그가 하는 말을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이 먼 곳까지 찾아 온)너의 성의가 대단하다. 마땅히 고려와 원나라는 좋은 관계가 되어야지.”라고 답하고, 그 해 늦은 가을 9월에 철군하였다.(주9) 당시 원나라는 남송에 대한 전면공격을 하는 시기였고 겨울을 맞아 일단 전투를 중지시킨 것으로 보인다.

▲ 몽골 제국시대의 카라코룸의 모습. (울란바타르 박물관) ⓒ김운회
▲ 몽골 제국시대의 카라코룸의 모습. (울란바타르 박물관) ⓒ김운회

몽골군이 철수하자 다시 최항은 모든 악속들을 파기하기로 결의하였다. 즉 1257년 정월 고려는 “해마다 우리를 침범하니 바쳐도 소용이 없다”는 구실로 몽골로 보내는 공물을 중단하였다. 그런데 이 해 윤사월에 최항(崔沆)이 죽고 그의 아들인 최의(崔竩)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고려가 다시 약속을 어기자 몽골군은 군사 작전에 돌입하였고 1257년 6월 개경(開京)까지 진입하였다.<제8차 몽골 침공>

다시 최항을 이은 최의(崔竩)는 사신을 보내 철병(撤兵)을 애원하였다. 이 때 원나라는 고려의 선물을 받지도 않았고, 다시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최자(崔滋), 김보정(金寶鼎) 등의 대신들이 태자(太子)를 몽골로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고종은 이를 수락하였다. 이에 다시 몽골군을 9월 7일 철군하였다.

1258년 3월 대사성 류경(柳璥), 김인준(金仁俊 = 別將), 박희실(朴希實) 등이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인 최의(崔竩)를 살해하였고 이로써 이른바 고려의 대몽항쟁은 끝이 난 것이다.(주10)

1258년 12월 고종은 몽골의 모든 조건을 수락하면서 섬에서 나왔고, 백성들도 섬에서 나와 농사에 전념하라고 명한 뒤 태자 왕전(王倎)을 몽골로 출발시켰다(1259년 4월 21일). 사실 조건이라고 해봐야, 주요 내용은 출륙(出陸)과 친조(親朝)였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원나라의 각종 요구들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원 세조(쿠빌라이칸)가 제위에 오른 뒤에도 한 번도 입조하지 않았다. 이에 세조는 강경하게 입조를 요구하였고 1264년 가을 원종은 무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도(베이징)에 들어갔다. 세조는 원종을 맞이하여 두 차례나 연회를 베푸는 등 극진히 환대하였고 원종은 3년 안에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약속하였다. 세조는 고려에 남아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에 고려 왕실은 임연, 김준(김인준) 등의 발호가 있었지만 원나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루게 되어 정상적인 국정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무신정권의 세력들이 삼별초(三別抄)라는 이름으로 진도, 제주도 등과 무인도로 전전하다가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최 씨 무신 정권은 강화도를 요새화하면서 국가의 핵심부대인 삼별초의 전선 투입을 제한적으로 하였고, 주력은 주로 최 씨 개인의 경호에 집중하였다. 이른바 대몽항쟁이라고 하여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농사도 못 짓고 양식도 없어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또 육지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 최 씨 무신정권은 강화도에 화려한 집을 지어놓고 안락한 생활을 했으며 거대한 격구장을 지어 놀이에 열중하였다. 이들에게 근검절약이나 솔선수범이라는 것은 없었고 대몽골 철저 항전이라는 것은 정권 유지와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주11)

<고려사>에는 “고종 16년(1229), 최이(최우)가 이웃집 100여 채를 강제로 빼앗아 격구장(擊毬場)을 만들었는데, 동서의 길이가 몇백 보나 되었으며, 바둑판처럼 평탄하였다. 격구를 할 때마다 반드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물을 뿌리게 하여 먼지가 나지 않게 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가옥을 헐어 격구장을 확장하니, 강탈한 집이 모두 수백 채에 이르렀다. 날마다 도방(都房)과 마별초(馬別抄)를 모아 격구를 시켰으며 때로는 창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하며 말을 타고 활을 쏘게 하였다.”고 하였다.(주12)

이것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무신 정권의 30년 대몽항쟁의 전말이었다. 이상의 약사(略史)로 본다면, 고려의 대몽항쟁은 국민적 자주 독립 투쟁이 아니라 최 씨 무신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 씨 무신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전국이 병란(兵亂)에 휩쓸려 들어간 것이다. 애당초 원나라는 고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형제의 맹약을 이루어 세계 경영에 고려가 참가하기를 바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세계를 지배한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인내심이 의아할 지경이다.

세계를 제패한 원나라의 군대가 왜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코앞의 나라인 약체 고려를 확실하게 군사적인 정벌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지는 분명히 알려진 바는 없다. 칭기즈칸, 멍케칸, 쿠빌라이칸(원세조) 등의 원나라 지도부가 몽골과 고려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대해서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나라는 끝도 없이 고려의 식언(食言)과 허언(虛言)을 인내하면서 긴 세월을 기다렸다. 때로는 강경책으로 때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대처한 것이다.

▲ 원 황제들의 초상(원대 그림)
▲ 원 황제들의 초상(원대 그림)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무한 인내심의 발휘는 중요한 역사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다만 앞에서 해설했던 카치운(哈眞) 장군의 말이나 행동, 원 세조(쿠빌라이칸)의 고려에 대한 예찬(禮讚)이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설명은 원나라가 중국과 세계의 경영이 더욱 절실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해서 그만큼 철저히 정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을 보면, 그것은 분명 틀린 설명이다(쿠빌라이칸의 군대는 그 먼 베트남의 열대 밀림까지도 멈추지 않고 진공해 들어갔다. 베트남은 몽골 기병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여러 분석들을 토대로 보면, 몽골인들은 고려인들을 단순히 외국인(外國人)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몽골과 고려의 역사적 미스터리(mystery)는 한국인과 몽골인과의 관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다(다음 장에서 상세히 설명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려의 30여 년 대몽항쟁은 조작된 신화(myth)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 씨 무신정권은 30여 년을 식언(食言), 허언(虛言),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일관하였다. 몽골군이 침공하면 왕과 태자를 동원하여 항복을 맹서하여 무마하고, 사신단에게 잔치를 벌여 입을 막았으며, 그것도 안 되면 친몽파 사신들을 보내 울며 호소하고 그러고 난 뒤에는 다시 입을 닦고 친몽파들을 대거 숙청하거나 몽골과 화의(和議)를 주장하던 관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해버렸다. 이로 인하여 다시 몽골의 침공을 받았다. 이런 일을 30여 년을 반복하였다.
구국 투쟁의 상징으로 알려진 삼별초(三別抄)도 이상하다. 필자가 중학교 시절(1970년대 초반)만 해도 삼별초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도 않았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삼별초는 구국 항쟁과 자주독립의 기수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삼별초는 사실상 197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신화(神話)에 불과하다. 한국에서는 몽골의 침입으로 전국토가 피폐화되었다는 사실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사>, <고려사>를 면밀히 보면, 몽골은 고려에 대해서 형제의 맹약을 철저히 지킨 반면에 고려의 실권자인 최 씨 군사정권은 철저히 이를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권력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악행과 배신을 저지르고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본대로 어떤 때는 현지민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골이 설치한 다루가치들을 몰살시키기도 하고(고종 19년 : 1232년 7월), 원나라 사신 멍꾸다(蒙古大)와 고종(高宗)이 만나 화약(和約)을 맺고 평화 분위기가 무르익는데도 고려병들은 각지의 몽골병들을 습격하여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고종 40년 : 1253년 11월). 이처럼 원나라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놀리고 피점령 지역에 파견된 다루가치가 동시에 대량으로 살해당하는 등 원나라 역사상 있기 어려운 사태가 고려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원나라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인내심을 가지고 대응하였다. 예컨대 같은 경우를 저질렀던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왕 야시부(耶厮不)는 70일 만에 제거되고 나라도 사라졌다.
최 씨 무신정권의 이같이 상식을 벗어나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극단적인 조치들은 역으로 이후 친몽파(親蒙派)들이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256년경(고종 43년)에 이르면, 최 씨 군사정권에 대한 고려 백성들의 불만과 분노는 곳곳에서 몽골군을 환영하는 사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몽골 사신(멍꾸다)이 실권도 없는 왕(고종)에게 “대군이 들어와 하루에도 사망자가 수없이 발생하는데 왕께서는 어찌 자기 한 몸만 아끼며 만민의 생명은 돌보지 않는 것입니까? 왕께서 (하루라도) 빨리 출영하셨으면, 어찌 저 무고한 백성들이 참살되었겠습니까?(1253년)”라고 한탄하고 있다. 설령 왕이 실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원나라가 지원할 터이니 왕이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다면 결단을 내려서 전쟁을 중지시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 이름도 찬란한 ‘고려의 대몽항쟁 30년사’를 한몽관계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왕유(고려 폐주)가 척결되어야 할 세력으로 지목한 부원배(附元輩 : 몽골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세력 또는 몽골에 빌붙어 부를 축적하거나 득세하는 세력)를 일제 강점기 친일세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사고다. 필자도 고교 시절에 친몽(親蒙) 세력은 민족 배신자들이라고 배웠다. 물론 일부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라를 황폐화시킨 주범은 실은 최 씨 무신정권이었다. 최 씨 무신 정권은 사라지면서도 그 잔존 하수인들이 10여 년을 고려를 괴롭혔다.

당시 최 씨 무신정권의 병폐들은 <고려사>에 낱낱이 기록되어있고 인터넷 상에서도 많이 나와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최충헌(崔忠獻)이 움직이면 무장한 위병(衛兵)이 반경 10리를 가득 채웠고, 거란군이 침략했을 때도 관군(官軍)보다 최충헌의 사병(私兵)의 군사력이 더 강했을 정도였다. 이런 식이니 국난 극복이 제대로 될 리도 없다. 1226년 최이(崔怡)의 발에 부스럼이 생기자 모든 관리들이 최이의 부스럼이 낫게 해달라고 소지를 태워대는 바람에 개경의 종이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다고 한다(마치 북한 김일성 가계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최이(崔怡)가 죽자 최항(崔沆)은 이틀만 상복(喪服)을 입고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아버지의 첩들을 간음(姦淫)하기 시작했다. 최항이 죽자 최의(崔宜)는 그의 어머니의 가계가 기생(妓生) 집안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죽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문서나 책 속에 창기(娼妓), 천비(賤婢) 등의 말이 나오면 읽지 않거나 지워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고려 왕실을 확실히 지켜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나라였다. 과거의 정치가 역사요, 현대의 역사가 정치라는 점과 과거의 역사는 현재와 미래와 쉼 없이 대화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늘날 북한 정권의 행태가 최 씨 무신 정권과 너무 흡사하여 안타깝다.

본문 주석

(주1)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은 1218년 몽골에 항복한 인주도령(麟州都領) 홍대순(洪大純)의 아들이고 선대부터 인주(麟州 : 평안북도 의주 지역)에 살았다. 1231년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골군이 침공하자 1,5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한 뒤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에 제수되었다. 그후 다시 몽골로부터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되어 1235년·1245년·1253년·1254년· 1258년의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아들은 몽골의 관리인 홍다구(洪茶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2) “소방은 감히 성지를 어기지 않고 이미 승천부 백마산 아래에 성곽을 쌓고 궁실을 영조하였으나 다만 동북계의 수달 잡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영조를 마치고도 육지로 나오지 못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입경하니 나라 사람들이 놀래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잇습니다. 오직 대왕은 긍휼히 여겨 회군하여 주시면 우리 동민으로 하여금 모두 안도케 하면 마땅히 내년에 몸소 신료를 거느리고 출영하여 황제의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사자를 보내어 심찰하면 가히 알 것입니다.” 원문은 戊寅遣大將軍高悅致書也窟大王曰: “小邦不敢違忤聖旨已於昇天府白馬山下築城郭營宮室但東北界捕獺人是懼未得畢構出居今大軍入境國人驚駭罔知所措惟大王矜恤班師俾我東民悉皆按堵則當明年躬率臣僚出迎帝命若其虛實遣一二使价審之可知也.”(<高麗史>24卷-世家24-高宗3-40)
(주3) 辛卯王渡江迎于昇天新闕夜別抄八十人衷甲以從蒙古大謂王曰: “自大軍入境以來一日死亡者幾千萬人王何惜一身不顧萬民之命乎? 王若早出迎安有無辜之民肝腦塗地者乎也窟大王之言卽皇帝之言吾之言卽也窟大王之言也自今以往萬世和好豈不樂哉?” 遂酣飮而去王還江都(<高麗史> 24卷-世家24-高宗3-40)
(주4) 王還江都喬桐別抄伏兵平州城外夜入虜營擊殺甚衆校尉張子邦持短兵手殺屯長二十餘人. (<高麗史> 24卷-世家24-高宗3-40)
(주5) 戊午蒙古使多可等五十人*賫{齎}文牒來諭曰: “國王雖已出陸侍中崔沆尙書李應烈周永珪柳璥等不出是爲眞降耶?”仍責誅降城官吏王徵趙邦彦鄭臣旦乘傳入京見于多可以示不誅. (<高麗史> 24卷-世家24-高宗3-41)
(주6) 戊午蒙古使多可等五十人*賫{齎}文牒來諭曰: “國王雖已出陸侍中崔沆尙書李應烈周永珪柳璥等不出是爲眞降耶?”仍責誅降城官吏王徵趙邦彦鄭臣旦乘傳入京見于多可以示不誅. (<高麗史> 24卷-世家24-高宗3-41)
(주7)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7> 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한길사, 1999) 83∼84쪽.
(주8) 보르지기다이 바타르<팍스몽골리카와 고려>(혜안, 2009) 50쪽 참고. 1241년 고려 고종의 조카인 왕준은 왕자로 가장하여 정치적 인질로 원나라에 갔다. 이 사건은 <원사(元史)>와 <고려사>에 모두 나온다. 고려의 왕족 가운데는 처음으로 원나라의 조정을 경험한 사람이다. 왕준은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다. 왕준에 대한 기록은 <원사(元史)>권166, 열전 53에 실려 있다.
(주9) 「王遣守剛如蒙古,進方物,守剛從帝入和林城,乞罷兵,帝以不出陸爲辭,守剛奏,譬如獵人逐獸入窟穴,持弓矢當其前,因獸何從而出,又如氷雪慘烈,地脉閉塞,草木其能生乎,帝然之曰,汝誠使乎,當結兩國之好,遂遣徐趾,來命罷兵,(<高麗史> 卷102,「金守剛傳」)
(주10) 고려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원나라의 자랄타이는 홍다구(洪茶丘)를 향도로 하여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침공하였다. 30년간의 전쟁으로 진절머리가 난 백성들은 지방관이나 장수를 죽이고 항복하는 사태가 줄을 이었고 방어를 담당해야할 방호별장들도 속속 항복하였다. 몽골군은 강화도 주변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고립시켰다. 1258년 12월에 고려 조정은 몽골의 모든 조건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는 그 동안의 항거는 최 씨 무신정권 때문이었다고 항변하였다. 이이화, 앞의 책 85∼86쪽 참고.
(주11) 이이화, 앞의 책, 86∼87쪽 참고.
(주12) <高麗史> 列傳 崔怡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