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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3-03 16:29
<기황후>, 원 혜종이 '까막눈'이라고?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327  
 
황제가 '까막눈'이라니?

드라마<기황후>에서는 이미 성인이 된 혜종(타환 : 순제)이 '까막눈(일자 무식꾼)'으로 나온다. 그래서 기양의(기황후 : 당시는 기재인)가 "연철(엘테무르)에 대항할 힘을 길러야 한다."고 하면서 혜종에게 글자 하나하나를 가르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에 나온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혜종이 글을 모르는 이유는 연철 승상 때문이라고 한다. 즉 황제가 글을 알면, 총명해져 자기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아예 글을 멀리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이 대목이 이해가 안 갈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정사의 어떤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혜종의 아버지인 명종(明宗 : 쿠살라)이 사망했을 때 혜종은 10세의 어린이였는데, 이때까지 강력한 잠룡(潛龍)인 황자의 아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더구나 혜종은 명종의 장남이기 때문에 별일이 없다면 장차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글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물론 명종은 긴 세월 동안 윈난(雲南) - 알타이 등지에 피신하여 황제에 오를 수 있도록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자식 교육에 각별히 신경을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제왕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왕의 장남이 '까막눈'이라는 작가나 PD의 상상력이 지나치다. 그뿐인가? 기황후가 후궁이 되기도 전에 고려 폐주 왕유의 아이를 갖기도 한다.

드라마 <기황후>는 혜종, 나아가 원나라 황실에 관해 극심히 왜곡된 얘기를 만들어 내보내고 있다. 이것은 사실 원나라 조정을 모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정도의 무식한 오랑캐 국가였다면 세계를 단 1년도 지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 원 혜종의 본모습은 과연 어떨까? 이번 장에서는 혜종에 대해서 알아본다. 다만 혜종에 대하여서는 이미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개략적으로 보면서 문제가 되는 부분들만 중심으로 검토할 것이다.

혜종의 아버지 쿠살라의 비극적 삶

원나라 혜종(惠宗, 1320~1370)을 보통 순제(順帝)라고 하기도 하는데 순제라는 말은 명 태조인 주원장이 혜종을 부른 말이다. 혜종이 원나라 수도를 순순히 물려주고 상도(上都)로 떠났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모욕적인 언사일 수도 있다. 따라서 혜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혜종(순제)의 이름은 토곤테무르[妥懽怗睦爾(타환첩목이)]로 명종(明宗, 1300~1329) 쿠살라(和世刺 : Kushala)의 장남이고, 명종은 무종(武宗) 카이산(海山)의 둘째 아들이다. 무종이 궁중 쿠데타로 즉위(1308)하면서 함께 쿠데타를 성공시킨 동생 인종(仁宗)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종 다음에는 무종(카이산)의 아들들이 황위를 계승할 것을 서로 약속하였다. 즉 애당초 무종 ― 인종 ― 무종 아들 등의 순서로 황위가 계승될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런데 1311년 무종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급사하자 인종이 즉위하였다. 이제 무종의 아들인 쿠살라(명종 : 혜종의 아버지)가 황태자가 되어야 하는데, 무종과 인종의 어머니인 타지(答己)에 의해 인종의 아들 시디발라(碩德八刺, 영종)가 황태자가 되었다. 당시 타지는 황제보다 권력이 강대했다고도 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쿠살라(명종)는 주왕(周王)으로 봉해져 머나먼 윈난(雲南)으로 보내지는데, 윈난으로 가는 도중에 암살 위험이 있어 알타이 지방(몽골 북서부)으로 피신하여 힘을 키웠다.

1320년, 황제에 오른 지 10년도 못되어 인종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영종(英宗, 1303~1323)이 계승했지만, 재위(1320~1323) 3년 만에 암살되고 말았다. 1323년 예순테무르[也孫鐵木兒 : 태정제 또는 진종(眞宗)]가 반란군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고 5년간 원나라를 다스렸다.

1328년 진종(眞宗 예순테무르)이 사망하자, 킵차크 한국의 사령관인 엘테무르(燕鐵木兒)에 의해 대도(大都, 베이징)에서 문종(文宗 : 명종의 이복 동생) 즉 톡테무르(圖帖睦爾)가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런데 문종의 이복형인 쿠살라(명종 : 혜종의 아버지)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카라코룸(喀喇和林)에 입성하자 문종은 황제 위를 쿠살라(명종)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황태자가 되었다.(1329) 그러나 쿠살라(명종)는 문종을 만나고 난 후 대도로 가는 길에 엘테무르에게 독살 당하고 말았다. 이때 명종(혜종의 아버지)의 나이는 불과 30세에 불과했고 재위 기간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1329년 2월 27일∼1329년 8월 30일).

원 혜종(순제), 파란만장한 삶

명종이 엘테무르에 의해 독살 당하자, 문종이 다시 황제가 되었고, 원나라 조정은 엘테무르에 의해 장악되었다. 엘테무르는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쿠살라(명종)의 아들인 토곤테무르(妥懽怗睦爾 : 혜종)를 우환거리로 보고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를 보냈다. 어린 토곤테무르는 대청도에서 1년 5개월을 보냈는데(1330), 이 시기에 아마도 고려에 대해 많이 접해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드라마 <기황후>에서 처럼 토곤테무르가 어린 기황후를 만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면 정사의 기록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기황후의 경우를 보면, 기황후는 박불화(朴不花)와 황후가 되기 전에 이미 친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원사>에 "박불화(朴不花)는 고려인이고, 또 왕불화(王不花)라고도 한다. 황후 기씨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박불화와 같은 마을에 있으면서 서로 의지하였다."라고 한다.(주1)

 ▲ 순제의 유배지인 대청도의 위치.(백령도 인근) ⓒ김운회
▲ 순제의 유배지인 대청도의 위치.(백령도 인근) ⓒ김운회

토곤테무르는 다시 광서(廣西)의 계림(桂林)에 보내져 유배생활을 했다. 하기와라준페이(萩原淳平)의 연구에 따르면, 토곤테무르가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에서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일반적인 한인(漢人) 어린이에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하여 몽골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가진 제왕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주2) 그래서 혜종에게는 이후에도 우유부단(优柔不断)하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토곤테무르가 황제가 되어서도 글도 모르는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드라마틱(dramatic)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정치의 대가, 원 혜종

어린 시절 토곤테무르는 매우 불우하였으며, 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을 우울증이나 극심한 스트레스(stress)에 시달렸을 것이다. 토곤테무르는 술을 싫어하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점성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他不嗜酒, 善画, 又善观天象). 당시 사람들은 토곤테무르의 성격은 완렬(顽劣)하면서도 혼우(昏愚)하고 우유부단(优柔不断)하다고 했다. 그런데 <경신외사(庚申外史)>는 토곤테무르를 매우 교활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주3) <경신외사>에 따르면, 토곤테무르가 어릴 때, 머리에 항상 이(虮虱)가 생겨서, 노파에게 이를 잡아달라고 하는데 그 노파에게 하는 말이 "이 놈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지만 난 이놈들을 죽이기가 싫어. 이놈들을 종이로 쌀 거야. 그래서 처마 아래에 매달아 얼어 죽게 하는 것이 좋겠어."라고 했다고 한다.(주4)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지만, 토곤테무르가 적극적이지 못하고 과단성은 없으면서도 자기의 목적을 우회적으로 달성해가려는 습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토곤테무르의 성격이 외유내강(外柔內剛)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고통과 번민은 토곤테무르가 후일 정치의 대가(大家)가 되는데 결정적인 기여한 것이다.토곤테무르는 자기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이 있으면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일단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어 승산이 있으면 직접 공격하고 만약 승산이 약하면 다른 세력을 키워 이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현자(賢者)를 재상으로 중용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첨예화된 사회적 이슈들을 해결해 나갔다. 실제로 토곤테무르는 황제(혜종)로 등극하면서 원나라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을 재위(37년)했다. 실제로 원 세조(쿠빌라이) 이후 천수를 제대로 누린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세조와 혜종을 제외하면 다른 황제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4.8년 정도이다.

1332년 원 문종(文宗, 1304~1332)이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이복형인 명종의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을 내려, 명종의 차남으로 당시 6살 아이인 이린지발[懿璘质班 : 녕종(寧宗)]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어린 황제가 43일 만에 죽자, 토곤테무르가 즉위하게 되었다.

▲ 어린 나이에 죽은 원 녕종(寧宗 : 이린지발). 원대 황제 초상화 ⓒ김운회
▲ 어린 나이에 죽은 원 녕종(寧宗 : 이린지발). 원대 황제 초상화 ⓒ김운회
그런데 토곤테무르가 즉위할 즈음 원나라 조정을 전횡하던 엘테무르(燕帖木儿 : 연철)가 갑자기 피를 쏟으며 사망했다(1333). 의문의 죽음이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주5) 1333년 토곤테무르(혜종 = 순제)는 즉위했지만, 당시의 국정은 바얀(伯顔[백안]), 사둔(撒敦 : 엘테무르의 동생) 두 승상이 처리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엘테무르가 죽은 후 그의 동생 사둔(撒敦)은 좌승상으로, 아들 탕기쉬(唐其勢)는 어사대부로, 딸인 타나시리(答纳失里, ?∼1335年)는 황후로 책립되었다.

그런데 사둔이 죽자 혜종은 일찍이 할아버지인 무종을 보좌하여 북방을 정벌하고 자신의 옹립에 공이 큰 바얀(伯顔)을 중서우승상으로 발탁하여 태사에 진왕(秦王)으로 봉함으로써 엘테무르家(가)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바얀의 권력이 엘테무르家를 능가하니 엘테무르의 아들인 탕기쉬와 그의 동생 타라하이(塔剌海)는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바얀을 죽이고 혜종을 폐하려는 역모(逆謀)를 꾀하였다.

1335년 6월 30일 탕기쉬와 타라하이는 결사대를 이끌고 황궁에 난입하였으나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던 바얀은 이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탕기쉬의 동생 타라하이는 황후에게로 도망가 황후의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타나시리가 치마 속으로 그를 숨겼지만 따라온 바얀이 그를 끌어내 주살하였다. 바얀은 "형제가 모반하는데 황후가 모를 리 없다."고 황후를 체포하니 타나시리는 혜종에게 "폐하 살려주소서"라고 애원하였다. 혜종은 "네 형제가 짐을 죽이려하는데 짐이 어찌 구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타나시리 황후를 쫓아내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렇게 하여 무소불위의 엘테무르家는 역사에서 사라져갔다.(주6)

혜종, 원 문화의 전성기

1335년 이후 엘테무르 세력이 제거된 원나라 조정을 다시 바얀(伯顔)이 장악하여 전횡하였다. 바얀의 세력이 너무 비대해지자 이를 크게 우려한 샤라반(沙剌班)과 바얀의 조카인 톡토(脫脫[탈탈])가 바얀을 축출하면서 원나라 조정은 정상화되고 혜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1339).

혜종의 친정에는 명재상 톡토(脫脫)의 역할이 컸다. 톡토가 조정을 이끌면서 원나라 문화의 최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 때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의 정사 편찬을 완성하였다. 톡토가 집정하던 기간 동안에는 여러 가지 혁신정치(革新政治)를 통해, 사회 모순을 완화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를 '지정신정(至正新政)'이라고 한다.

톡토는 남중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1352년 톡토는 서주(徐州)의 홍건적을 진압했고 1354년에는 홍건적 3대 군벌의 하나인 장사성(張士誠)을 고우(高郵)에서 포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톡토는 원나라의 대표적인 간신인 하마(哈麻[합마])의 참언을 받아 탄핵되어 삭탈관직(削職)되었다. 톡토는 처음에 회안(淮安)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대리(大理)로 유배를 갔는데, 1355년 톡토의 복권을 두려워한 하마가 황제의 조서(詔書)을 고쳐 톡토를 독살[鴆殺]하였다.

당시 하마는 어사대에 지시해 갖가지 죄명을 날조하여 톡토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가짜 성지(聖旨)와 독약을 든 사신이 톡토에게 파견되었고 명상 톡토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하마(哈麻)는 톡토의 독살에 기황후 모자를 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즉 혜종에게는 다른 황후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기황후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될 예정이었으나 황태자 책봉식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하마는 기황후에게 "황태자 자리가 진작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거행되지 못하는 것은 톡토 형제의 반대 때문입니다."라고 고하여 기황후는 톡토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기황후와 황태자는 황제에게 톡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게 되고 혜종도 톡토 형제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어 결국 병권을 몰수하였다고 한다.(주7) 하마의 농간이었다고 해도 이 사건이야말로 기황후의 일생에서 가장 큰 오점일 것이다.

▲ 원 혜종(14세기 그림) 동생인 원영종과 많이 닮은 모습이다. ⓒ김운회
▲ 원 혜종(14세기 그림) 동생인 원영종과 많이 닮은 모습이다. ⓒ김운회
이 시기는 특히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많았다. 황하(黃河)가 범람하여 하남(河南), 산동(山東) 등이 황폐화되었고 1351년에는 황하의 개수 공사에 동원된 많은 사람이 봉기하였다. 톡토가 반란군의 토벌 과정에서 경질되고 독살된 것은 원나라 멸망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정치 권태기와 함께 찾아온 방중술

더 큰 문제는 이 시기에 혜종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혜종의 측근 중에 하마(哈麻)라는 자가 있어 혜종을 부추겨 음사(淫奢)와 방중술(房中術)에 빠지게 하여 조정이 더욱 어지워러졌다. <원사(元史)>를 따라 그 과정을 살펴보자.

처음에 하마는 일찍이 서천(西天)의 중[僧]을 비밀리에 혜종에게 천거했는데(1353년 : 지정 13년) 그가 운기술(運氣術)로 혜종을 미혹하게 하여 황제가 이를 배우고 따라 하게 되었다. 이 운기술을 얀셰르파(演揲兒法)라고 했는데, 얀세르(演揲兒)란 중국어로는 대희락(大喜樂)이라는 뜻이다.(주8) 이것은 '성적(性的) 교합(交合)을 통해서 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티베트의 밀교(密敎)이다.
하마의 매부로 집현학사인 투루테무르(禿魯帖木兒)는 혜종의 총애를 받았는데 라오디사(老的沙), 빠랑(八郞), 다라마지더(答剌馬吉的), 보디와르마(波迪哇兒禡) 등의 10인과 더불어 모두 이나[의납(倚納)]라고 하였다. 투루테무르는 성품이 간교(姦狡)하였지만 혜종은 그를 사랑했고 그를 너무 믿어 그가 하자는 대로 했다. 하마와 같이 투루테무르도 역시 서번(西蕃)의 중[僧]인 가린천(伽璘真)을 혜종에게 천거하였다. 이 승려가 비밀법(祕密法)에 능하여 혜종에게 아뢰되, "폐하께서는 모름지기 귀하신 천자로 사해(四海)가 부(富)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보고 유지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인생이 과연 무엇입니까? 마땅히 제가 알려드리는 비밀 대희락선정(秘密大喜樂禪定) 또는 다수법(多修法)을 받아들이시면, 그 쾌락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혜종는 이를 배우고 익혔다. 그 법을 쌍수법(雙修法), 또는 얀세르(演揲兒) 또는 비밀(祕密)이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다 방중술(房中術)이다. 혜종은 하마가 추천한 서천승을 사도(司徒)로 삼고 투루테무르가 추천한 가린천(伽璘真)을 대원국사(大元國師)로 삼았다.(주9)

이들 가린천과 서천의 승려의 무리들은 모두 양가 부녀들을 4명 또는 3명을 하사받았는데 이를 '공양(供養)'이라 불렀다[이것을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나타난 이신보시(以身布施)라든가 이신공양(以身供養) 등이 성행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때 혜종은 이 일에 매달려 널리 부녀자들을 취하고 오직 음희(淫戲 : 변태적 성행위)를 낙으로 삼았다. 또 채녀(采女)들을 16 천마무(天魔舞)라고 하였다. 그래서 혜종의 동생들과 빠랑(八郎),이른바 이나(倚納) 등과 더불어 황제의 앞에서 서로 예절도 없고 허물도 없이 지내며 급기야 남녀 간에는 알몸으로 지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곳을 일러 '지에질까이(皆即兀該)'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는 일마다 꺼리낌이 없다(事事無礙)'라는 뜻이다. 군신이 공공연하게 음란한 행위를 하였고, 이에 많은 승려들이 구중궁궐(禁中)을 제집 드나들 듯 하여 멈추는 일이 없었다. 온갖 괴성(醜聲)과 변태스러운 음행(穢行)들이 세상 밖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시정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를 듣고 흉스럽게 여겼다.(주10)

<경신외사(庚申外史)>의 기록도 대동소이하다.(주11) 다만 얀세르파가 몸의 기(氣)를 크게 하기도 하고 작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약과 같은 것으로 마음이 들뜨게 하기도 하였다는 설명이 있고, "혜종은 하마에게 명하여 서천의 승려를 사도(司徒)에 봉하고 네 명의 여인으로 하여 공양(?)하도록 하고 서번의 승려를 대원국사(大元國師)로 삼으며 세 사람의 여인들로 하여금 공양하게 하였다. 이들은 궁중에서 황제의 앞에서도 남녀가 나체(裸體)로 생활했으며 군신(君臣) 간의 분별도 없었고 또한 방에서는 서로 상대를 양보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일러 '지에질까이(皆即兀該)'라고 한다."라고 하여 좀 더 구체적일 뿐이다.

위태로운 궁중의 기쁨조, 망국으로 가는 길

<원사>나 <경신외사>의 기록으로 보면, 혜종은 티베트 계통의 밀교(密敎)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라마교의 한 분파로 남녀의 성적 교합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는 식인데 궁중에서 황제와 그의 측근들이 이 일에 빠져 있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다만 <원사> 혜종기(惠宗紀)에서는 "이해(1353년) 6월부터 8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산 아래에다 청령전(淸寧殿)을 짓고 모든 전각에는 월궁(月宮)을 조성하였다. … 하마(哈麻)와 투루테무르(禿魯帖木兒等) 등이 서천의 승려를 황제에게 은밀하게 소개하여 방중운기지술(房中運氣之術)을 행하였는데 이것을 얀세르파(演揲兒法)이라고 했고, 또 비밀법(秘密法)에 능통한 서번(西番)의 승려를 소개하여 황제는 함께 이를 열심히 배웠다."라고 하여 한 번 거론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주12) 이 행위가 비를 내리게 할 목적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원나라 때 크게 유행한 라마교가 세속화되면서 <원사>나 <경신외사>의 기록처럼 다른 곳도 아니고 궁중에서 이신보시(以身布施)가 성행하였다는 것은 망국적 상황일 수가 있다. 원나라 때 성행한 환희불소조(歡喜佛塑造 : 성적 유희에 탐닉하는 불상 조각)는 지금도 네팔이나 티베트의 사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주13) 따라서 궁중에서 그것도 국가적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혜종이 밀교에 탐닉했다는 것은 원나라가 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망국으로 가는 길

혜종의 시대는 원나라가 전성기를 지나서 황혼기에 접어드는 시기인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1328년 발생한 양도내전(兩都內戰)이다. 양도내전(兩都內戰)은 카이산파의 엘테무르(燕鐵木兒 : 연철 대승상)와 이순테무르파[태정제(泰定帝)파]인 톡타(요왕) 사이에서 발생한 일종의 황위 계승전쟁이다. 이 전쟁은 칭기즈칸의 황금씨족(종실)의 내분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혜종이 서서히 친정하려는 시기인 1342년 이후에는 특이하게도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많았다. 황하가 대범람하여 하남, 산동을 비롯하여 화북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후일 명나라의 건국 세력인 백련교도(주원장)의 반란이 창궐하여 이미 남중국을 장악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1360년에는 아르카이 테무르(오고타이의 후손)가 반란을 일으켜 많은 몽골의 제후들이 호응하여 원나라 조정을 어지럽혔다. 이런 와중에 강남을 장악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1368)하였고, 주원장은 즉위와 동시에 군대를 몰아 대규모의 북벌(北伐)을 단행하였다. 1368년 7월 원나라의 혜종은 대응도 하지 못하고 대도(大都 : 베이징)를 떠나 상도(上都)로 피신하였고, 다시는 대도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로써 원나라는 멸망한 것이다.(주14)

원나라는 세조(쿠빌라이칸) 이후 황위계승전이 치열하여 천수(天壽)를 누린 황제가 없었다. 세조 이후의 황제들 대부분은 요절(夭折)하거나 의문사(疑問死) 또는 암살(暗殺), 독살(毒殺)로 생을 마감하였다. 황제에 있었던 기간이 평균 5년이 못 된다. 혜종만이 가장 오래 황위를 지켰기 때문에 혜종이 온 힘을 다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면, 혜종의 시기는 원나라가 중흥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였을 수도 있다. 놀라운 일이지만, 황제가 되기 전에는 누구보다 불우하고 위태로웠던 혜종의 권력은 황제가 된 후에 매우 안정되어있었다. 그런데 혜종은 이 천행(天幸)의 시기에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배들과 음희(淫戱)에 탐닉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원나라 황제들의 재위기간. ⓒ김운회
▲ 원나라 황제들의 재위기간. ⓒ김운회
따라서 원 혜종은 망국(亡國)의 군주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비록 혜종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생을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렸을 수는 있을지라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치에 대해 권태와 환멸을 느껴 '운기술(運氣術)'에 빠진다는 것은 군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함이 분명하다. 꿀처럼 달콤함에 탐닉하도록 유인하는 하마나 투루테무르와 같은 간신배를 측근에 둔 것은 군주로서 최대의 실책이다. 군주의 책무는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원나라 말기에 보다 절제된 운신과 행보를 보인 혜종의 아내인 기황후(奇皇后)의 행적이 오히려 돋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기황후는 원나라의 종묘사직을 지켜 자기 아들에게 강력한 세계 제국을 물려주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기 때문이다(기황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본다).

본문 주석

(주1) "朴不花,高麗人,亦曰王不花.皇后奇氏微時,與不花同鄕里,相爲依倚" <元史> 卷204, 列傳 91, 宦者 朴不花 列傳.
(주2) 萩原淳平 <明代蒙古史硏究> (東朋社, 1980) 7∼8쪽.
(주3) <경신외사>는 권형(權衡)이 편찬한 원 책으로 순제(順帝) 즉위년(1333)부터 상도(上都)로 쫓겨 갈 때(1367)까지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순제가 경신년(庚申年)에 태어나 경신제(庚申帝)로도 불렸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주4) 원문은 다음과 같다. "他并非如此,而是一个阴毒的人,幼年头发常生虮虱,使民妪捕之,告妪曰是虽血食于我,我不忍杀之,不如以纸裹之,悬于屋檐下,冷杀可也."<庚申外史> 卷上.
(주5) <元史>에 따르면, "至顺 4年(1333年)5月 연철목아(燕帖木儿 : 엘테무르)가 병사(病死)했고 至順 4年 农历 6月初(1333年 7月19日)토곤테무르가 등극했다."고 되어있다.
(주6) 청우 (김춘택譯) <중국을 말한다 12> (신원문화사, 2008) 236∼237쪽
(주7) 징즈웬, 황징린 <간신론(辨奸臣論) 인간의 부조리를 묻다 인간 성찰의 5천 년 간신 고증> (김영수譯) (왕의서재,2011) 248쪽
(주8)"初,哈麻嘗陰進西天僧以運氣術媚帝,帝習為之,號演揲兒法.演揲兒,華言大喜樂也."<元史> 列傳‧姦臣‧哈麻.
(주9) "哈麻之妹婿集賢學士禿魯帖木兒,故有寵於帝,與老的沙,八郎, 答剌馬吉的,波迪哇兒禡等十人,俱號倚納.禿魯帖木兒性姦狡,帝愛之,言聽計從,亦薦西蕃僧伽璘真於帝.其僧善祕密法,謂帝曰陛下雖尊居萬乘,富有四海,不過保有見世而已.人生能幾何,當受此祕密大喜樂禪定.帝又習之,其法亦名雙修法.曰演揲兒,曰祕密,皆房中術也.帝乃詔以西天僧為司徒,西蕃僧為大元國師." <元史> 列傳‧姦臣‧哈麻.
(주10) "其徒皆取良家女,或四人,或三人奉之,謂之供養.於是帝日從事於其法,廣取女婦,惟淫戲是樂.又選采女為十六天魔舞.八郎者,帝諸弟,與其所謂倚納者,皆在帝前,相與褻狎,甚至男女裸處,號所處室曰皆即兀該,華言事事無礙也.君臣宣淫, 而群僧出入禁中, 無所禁止, 醜聲穢行, 著聞于外, 雖市井之人, 亦惡聞之." <元史> 列傳‧姦臣‧哈麻.
(주11) "至正十三年. 脫脫奏用哈麻為宣政院使. 哈麻既得幸于上,陰薦西天僧行運氣之術者,號演揲兒法能使人身之氣,或消或脹,或伸或縮,以蠱惑上心.哈麻自是日親近左右,號倚納.是時,資政院使隴卜亦進西番僧善此術者,號秘密佛法,謂上曰陛下雖貴為天子,富有四海,亦不過保有見世而已,人生能幾何當受我秘密大喜樂禪定,又名多修法,其樂無窮.上喜,命哈麻傳旨,封為司徒,以四女為供養. 西番僧為大元國師,以三女為供養. … 在帝前男女裸居,或君臣共被,且為約相讓以室,名曰些郎兀該,華言事事無礙." <庚申外史> 卷上.
(주12) "是歲, 自六月不雨至於八月. 造淸寧殿前山子、月宮諸殿宇, … 哈麻及禿魯帖木兒等陰進西天僧於帝, 行房中運氣之術, 號演揲兒法, 又進西番僧善袐密法, 帝皆習之." <元史> 43卷 本紀 第43 順帝6.
(주13) 한정섭외 <몽골제국과 한몽관계사>(불교정신문화원, 2005) 110쪽 참고.
(주14) 상도(上都)는 이전의 카이펑(開平)으로 현재 내몽골 중부의 시린궈러멍(錫林郭勒盟) 인근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