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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3-12 15:58
노사 기정진선생
 글쓴이 : 기인서
조회 : 3,492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8921&leafI… [984]

한국사를 비롯한 동양사에서 근대는 희망의 시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과 본격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들의 압도적인 무력과 기술력에 속절없이 무너진 혼란과 격동의 시간이었다. 유례없는 대규모의 침략 앞에서 동양 각국의 지식인과 민중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대응책을 모색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조선)’나 ‘중체서용(中體西用. 중국)’,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처럼 공통된 의미의 표어에는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고민이 압축되어 있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조선을 대표하는 마지막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81세의 긴 생애 동안 거의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해 조선 유학의 중요한 주제인 주리론(主理論)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이념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해 근대의 격동에 대응한 주요한 흐름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을 태동시켰다. 그는 이념과 현실 모두에서 큰 발자취를 남긴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된다.

명민한 어린 시절

기정진은 본관이 경기도 행주(幸州)로 자는 대중(大中 또는 大仲), 호는 노사(蘆沙)ㆍ오산노인(鰲山老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기재우(奇在祐, 1769~1815),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처사(處士, 벼슬하지 않은 선비) 권덕언(權德彦)의 딸이다.

그의 가문은 기호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인 행주 기씨였지만, 그의 직계는 그리 현달하지 못했다. 기정진의 10대조는 기묘명현 기준(奇遵)의 둘째 형 기원(奇遠)이고, 8대조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은 중종 때의 유명한 학자로 문묘에 종사된 김인후(金麟厚)에게 배웠으며, 5대조 기정익(奇挺翼, 1627~1690)은 송시열에게 수학했다. 증조 기종상(奇宗相)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조부 기태량(奇泰良)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아버지 기재우는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런 조상들은 관직의 높이나 학문적 명성은 일반적 기준에 비추어 출중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기정진은 정조 22년(1798) 6월 3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조동(槽洞)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금빛 얼굴을 가진 큰 사람이 남자아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꾼 뒤 12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기정진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지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네 살 때(1802, 순조 2) [효경(孝經)]과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을 읽었고, 이때부터 5~6년 동안 [소학]ㆍ[대학연의(大學衍義)]를 비롯한 경서와 [강목]ㆍ[춘추] 등의 역사서를 두루 공부했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고 한다. 판단력과 행실도 올발라 네 살 때는 이웃집 과일이 자기 집 마당에 떨어지자 모두 주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왼쪽 시력을 잃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그의 명민함은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12세 때(1810, 순조 10) 백암사(白巖寺)에서 독서했는데, 그의 이름을 듣고 각지에서 배우려고 몰려왔다. 그는 “조용히 독서하려는 계획이 틀어졌다”면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인 진사 김의휴(金宜休. 본관 울산)의 딸과 혼인했다. 앞서 본 조상의 학맥이 작용한 결과였다.

17세(1815, 순조 15) 때는 부모님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는 슬픔을 겪었다. 5월 15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틀 만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는 같은 해(1769년)에 태어났다가 46년 만에 거의 같은 시점에 별세했다. 양친을 여읜 뒤 기정진은 선대의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삼년상을 치렀다(1817, 순조 17 탈상). 그 2년 뒤에는 아들 기만연(奇晩衍)이 태어났다(1819. 21세).

본격적인 학문 연마

외형적으로 기정진의 삶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소과를 장원으로 통과했지만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평생을 공부하고 글을 썼다. 그의 학문은 성리학이 중심이었지만, 국가의 위기가 심화된 노년에는 현실적 문제에 관련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글들은 ‘위정척사’ 운동의 주요한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기정진은 20대 중반부터 5~6년 동안 영취산(靈鷲山) 문수사(文殊寺)ㆍ관불암(觀佛庵) 등에서 독서하고 두류산(頭流山) 등을 유람했다. 그러다가 33세(1831, 순조 31) 봄 사마시(司馬試. 문과 소과)에 응시해 장원을 차지했다. 그 뒤 좌의정까지 역임한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는 그 시험을 관장하면서 “이 사람의 글은 성리학에서 나왔는데, 중간의 몇 구절은 이전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인재를 뽑았으니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말했다.

기정진은 이듬해 강릉참봉(康陵參奉. 종9품)에 제수되었지만 이조에서 자신의 조상 이름을 잘못 기재하자 벼슬을 버리고 그대로 귀향했다. 그 뒤에도 현릉(顯陵)참봉(1835, 헌종 1)ㆍ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 종6품. 1837)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관직 생활을 아주 짧아서 45세(1842, 헌종 8) 때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 정ㆍ종6품)에 임명되어 엿새 동안 근무한 것이 전부였다. 그 뒤에도 기정진은 사헌부 장령(1861)ㆍ집의(1864)ㆍ사헌부 집의ㆍ동부승지ㆍ호조참의(1866)ㆍ호조참판(1876)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오로지 학문에 매진했다.

주요 저작의 산출

기정진의 주요 저작은 4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출되어 노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기정진의 학문은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일원론(理一元論) 관점의 주리론이라고 요약된다. 그는 특정한 사승(師承) 관계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중국 송대의 학문을 직접 연구해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40대 중반에 저술한 <납량사의(納凉私議)>(1843, 헌종 9. 46세. 1874년 수정. 77세)를 비롯해 50대 중반에 지은 <이통설(理通說)>(1853, 철종 4. 55세)과 81세의 노령에 발표한 <외필(猥筆)>(고종 15년, 1878) 등이 꼽힌다.

먼저 ‘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사사롭게 의논하다’는 의미의 <납량사의>는 그 제목대로 여름에 피서를 가서 쓴 논문으로, 저자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되는 글이다. 그의 학문은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표현으로 집약되는데, 말 그대로 “이(理)는 하나지만 수많은 형태로 나뉜다”는 뜻이다. 그는 이의 철저한 주재를 확신하면서 “이는 비교할 수 없이 존귀하며(理尊無對) 본체와 쓰임 모두를 구성한다(理體理用)”고 주장했다. 즉 그는 기를 중시하는 주기론과 기의 존재를 일정하게 인정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정하고 이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주리론을 주장한 것이다. <납량사의>는 그런 그의 주리론이 가장 잘 집약된 논문으로 평가되는데,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이 글이 당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라고 격찬했다.

10년 뒤 노년에 접어든 시점에서 집필한 <이통설>에서는 주리론을 좀더 심화시켰다. 거기서도 기정진은 이(理)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전제하면서 인간과 사물의 모든 현상은 아무런 막힘이 없는 이의 오묘한 운동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별세하기 1년 전에 작성한 <외필>은 ‘외람되게 쓴 글’이라는 제목대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온 글이었다.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이(李珥)의 주기론을 비판했다고 지적할 수 있는 내용 때문이었다. 일찍이 이이는 “음양의 운동은 기(氣)의 영향에 따른 것이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했는데, 기정진은 운동하는 것은 기(氣)지만 그렇게 만드는 것은 이(理)라고 규정함으로써 기의 자발성을 부정하고 이의 근본적인 주재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이런 기정진의 학설은 이이와 배치된다는 민감성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다른 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제자 중에서도 그의 핵심적인 저술을 확인한 사람은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글들은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다. 그가 별세한 뒤 <외필>ㆍ<납량사의> 등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최동민(崔東敏)ㆍ권봉희(權鳳熙) 등 영남 노론 계열의 학자들은 그 두 글을 문집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으며, 기정진과 함께 호남 유학을 대표한 학자인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는 <외필변(猥筆辨)>ㆍ<납량사의 기의(記疑)> (이상 1902) 등을 지어 기정진의 이론을 비판했다.

그밖에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정(定)’자에 대한 해설인 <정자설(定字說)>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의한 [우기(偶記)],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답문유편(答問類編)] 등도 주요 저술로 평가된다.

시대적 문제를 고민하다

19세기 중반을 넘어가면서 조선은 점차 근대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식민지로 전락한 결과가 보여주듯이, 그때 조선은 총체적 난국이었다고 말할 만했다. 모든 노력은 거의 무용했다. 서양의 첫 침입인 병인양요(1866, 고종 3)가 일어났을 때 기정진은 68세였다.

그해 7월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현실 문제를 논의한 상소를 올렸다. <병인소(丙寅疏)>라고 불리는 그 상소에서 그는 외세에 대비하는 여섯 조항을 건의했다. ① 미리 조정의 계획을 확정할 것(先定朝算), ② 먼저 외교적 언사를 다듬을 것(先修辭令), ③ 지형을 살필 것(審地形), ④ 군사를 조련할 것(鍊兵), ⑤ 의견을 널리 구할 것(求言), ⑥ 시급히 내부를 정비해 외침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을 것(汲汲內修以爲外攘之本) 등이었다. ‘육조소(六條疏)’라고도 불리는 이 상소의 내용은 당시의 쇄국정책과 상통하는 것으로 그 뒤 전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은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10년 뒤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다(1876, 고종 13). 그 소식을 들은 78세의 기정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붓과 벼루를 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이 도끼를 지고 궐문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방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피할 수 있겠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위정척사 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대표하는 두 거목의 인연은 지속되었다. 이 상소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 간 최익현은 3년 뒤인 고종 16년(1879)에 풀려나자 장성의 담대헌(澹對軒. 지금의 고산〔高山〕서원)으로 기정진을 예방했고, 1901년에는 기정진의 신도비문을 짓기도 했다.

별세와 평가

기정진이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쓴 장성고산서원(長城高山書院). 이 서원은 기정진이 조선 고종 15년(1878)에 ‘담대헌’이라고 이름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924년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으며, 1927년 ‘고산서원’ 이라고 쓴 현판을 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63호로, 전남 장성군 진원면에 위치해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기정진은 최익현이 예방한 그해 12월 29일에 담대헌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2월 전라남도 영광(靈光)의 봉산(鳳山)에 안장되었다. 그뒤 [노사집]이 간행되었고(1883, 고종 20)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1910, 순종 4).

앞서 말했듯이 기정진의 학문과 인격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예조참판을 역임한 김매순(金邁淳, 1776~1840) 등은 그를 본질과 응용이 구비된 인물로 칭송했으며([노사집] <연보>), 구한말의 유명한 유학자인 이건창(李建昌)은 보성에 유배되었을 때 [노사집]을 읽고 “천하에 참다운 학문”이라고 격찬했다(황현, [매천야록]). 기정진은 서경덕(徐敬德)ㆍ이황(李滉)ㆍ이이(李珥)ㆍ임성주(任聖周)ㆍ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기도 했다(현상윤, [조선유학사]). 그의 제자로는 이최선(李最善)ㆍ조성가(趙性家)ㆍ정재규(鄭載圭) 등이 있으며 이항로(李恒老)의 화서(華西)학파, 전우의 간재학파 등과 함께 조선 후기 성리학의 큰 줄기를 형성했다.

그때의 격랑이 밀려오던 19세기 후반에 평생 성리학을 연구하고 위정척사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그의 삶은 지금 보면 답답하거나 고루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시대적 조건과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예컨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안사(安史)의 난으로 대표되는 당말의 혼란기에 명시들을 지었고, 베토벤은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던 격동기에 <영웅 교향곡>을 작곡했다. 모두 현실과는 멀리 유리된 행동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우회적인 접근만이 예술가나 학자가 세상에 개입하는 정직한 방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이의 한계를 인정할 때 그의 장점과 실체를 정확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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