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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14 13:04
행주기씨의 시작에 대한 정리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492  

우리 행주기씨의 뿌리는 어떻게 될까? 모두들 궁금한 일이다.
명확한 것은 아직 모르지만 지금까지 나온 몇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대종중의 공식입장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으로 다음날의 후손이 참고하여 명확히 하길 바라며 정리한다.
우리 행주기씨의 뿌리는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첫 번째는 기자의 후손설
두 번째가 당에서 왔다는 설
세 번째가 토착성씨일 가능성
등이 있다.
이를 하나씩 정리하여 본다.


첫째는 기자의 후손설 이다.

먼저 대종중의 공식적인 입장인 기자후손설을 살펴보자.
2003년에 대종중홈페이지를 만들면서 내가 정리한 기자조선과 기씨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120년경 은(殷)나라의 종친(宗親)인 자서여(子胥餘)는 기국(箕國)의 자작(子爵)으로 있으면서 기자(箕子)라 불리었으며 미자(微子), 비간(比干)과 함께 은나라 말기(末期)의 세명의 어진 사람이었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방탕한 생활로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 기자(箕子)는 간곡히 말렸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고 기자는 머리를 풀고 미친척하고 돌아다니다 주왕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었다.
새로 일어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패권(覇權)을 잡은 후에 감옥에 있는 기자를 풀어주자 기자는 은나라의 종친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적군에게 구원된 것이 부끄러워 따르는 무리 오천여명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이때 따라온 사람들은 100가지 기술을 가진 기술자와 학자들이었다. 처음 조선에 들어와 길쌈, 누에치기 등의 문명과 학문을 가르쳤고 8조의 금법(禁法)을 시행하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간 사실을 전해들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에 봉(封)하였고 봉함을 받은 기자는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기 위하여 조관(朝觀)을 왔고 이때 무왕에게 홍범(鴻範)을 설명하였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나라의 옛 궁궐터를 지나며 잡초만 무성한 것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지어 불렀다.
또 다른 기록으로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홍범을 설명하고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고도 한다
세월이 흘러 주나라가 쇠퇴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여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燕)나라 제후(諸候)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이웃에 있는 기자조선을 침략하려하자 조선후(朝鮮候)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일컬으고 연나라를 마주 공격하여 주나라를 도우려 하였으나 대부(大夫) 예(禮)가 간곡히 만류하므로 예(禮)를 연나라에 보내 협상하여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다.
차츰 기자조선왕이 중화 나라에 맞설만큼 당당하고 강성하여 졌다, 연나라가 가장 전성기인 기원전 311년에서 279년 사이의 소왕(昭王) 때에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서쪽 변두리의 땅 2천여리를 빼앗기고는 마침내 약화되었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서기전 214년에는 기자의 40세손 기부왕(箕否王) 시대로 강성한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복속(服屬)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조회(朝會)하지 않았다.
기부왕(箕否王)이 죽고 41세손 기준왕(箕準王)이 즉위하여 20여년이 흘러 진나라가 망하고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후국 연(燕), 제(齊), 조(趙)나라의 많은 주민들이 기자조선으로 넘어와 망명하였다.
유방의 한(漢)나라가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가 된 후에 한나라의 노관(盧綰)이 제후국 연나라의 왕으로 있다가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하여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러한 혼란기인 서기전 195년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호복(胡服)을 입고 조선의 패수를 건너와 기준왕(箕準王)에게 투항하고 살 곳을 요청했다. 기준왕은 박사(博士) 벼슬과 제사의식 때 쓰는 규(圭)를 하사하였고 서쪽 땅 일백리(一百里)를 주어 서쪽 국경을 지키며 살도록 하였다.
위만은 기존에 피난 와서 살고있는 연, 제, 조나라 출신의 주민과 한나라에서 계속 망명해오는 주민을 꾀어서 세력을 키운 후, 서기전 194년경에 기준왕에게 한(漢)나라 군사들이 열갈래로 나누어 침략해오니 도성(都城)에 들어가 왕을 보호하겠다 거짓보고하고 군사를 몰아 기준왕을 공격하였다.
기습으로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은 좌우의 궁인(宮人)들과 바다로 피신하여 마한(馬韓) 땅에 도착하여 마한을 공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기준왕(箕準王)을 무강왕(武康王)이라 한다.
위지(魏志)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무강왕, 기준(箕準)의 8세손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에 이르러 세 아들이 있으니 우평(友平)은 용강(龍岡)으로 돌아가서 북원(北原) 선우(鮮于)씨가 되었고 우량(友諒)은 마한(馬韓)의 옛 제도에 따라 상당(上黨 ; 청주) 한(韓)씨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돌아가서 덕양(德陽 ; 행주) 기(奇)씨가 되었다. 기자로부터는 49세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기록에는 우리 기(奇)씨의 선조인 마한의 유민(遺民)이 온조왕에 의하여 한산(漢山 ; 서울)의 북(北), 즉 행주(幸州)로 옮겨진 기록이 있다. 인용하면 온조왕 26년, AD 8년, 겨울 10월, (온조)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겉으로는 사냥한다 핑계 대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二十六年冬十月王出師陽言田獵潛襲馬韓遂幷其國邑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 AD 9년, 여름 4월, 원산, 금현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北)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二十七年夏四月二城降移其民於漢山之北馬韓遂滅)
여기에서 한산의 북은 당연히 우리 기씨의 본관 행주이다. 그러나 행주(幸州)로 옮겨진 후 백제시대부터 고려 초까지의 기(奇)씨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않다. 다만, 경기도(京畿道) 고양시(高陽市) 덕양구(德陽區) 행주동(幸州洞)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안에는 우리 기씨의 조상들이 태어났다는 전설(傳說)이 깃든 기가(奇哥)바위, 사시면서 달게 맛있게 드셨다는 기감천(奇甘泉)이 있어 기록을 대신한다.

강경구씨의 시조설

다음 글은 의사 강경구님이 잡지 의학동인(醫學同人) 1988년 1월호에 실은 글을 다른 호에 실은 글들과 함께 모아서 1991년 [한국성씨의 뿌리를 찾아서]란 이름으로 펴낸 책에서 우리 기씨와 관련된 내용을 뽑은 것이다.
내용이 좀 어렵고 족보에 나오는 우리의 공식 입장과도 다른 것이 있고 나와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해설을 첨부하여 글을 올립니다. 의견이 다른 것이나 질문이 있으면 같이 의논해서 우리의 공식 입장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첫번째 문제는 기자조선의 수도의 문제이다,
우리 1982년판 족보 원편 16쪽에는 사기 및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기자…도읍을 왕검성 평양에 정하고 …> 라고 하여 수도가 평양에 있었고 따라서 준왕이 위만에 밀려난 곳이 평양이고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착한 곳도 또한 사기와 기자실기를 인용하여 <..금마군 지금의 익산군에 피거…>라고 하여 전북 익산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강경구님은 오히려 출발한 평양이 도착지로 나오니 처음 읽는 사람은 헷갈리게 된다. 나는 강경구님설을 따른다, 이것은 강경구님이 처음 주장한 것이 아니고 원래 기자조선(고조선)의 수도가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않은 문제이다, 이것은 크게 세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주지역에 있었다는 설과 둘째로 만주지역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설,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평양에 있었다는 설이다. 우리 족보와 다수설은 세번째 설을 따른다, 강경구씨와 나는 첫번째 설을 따른 것이라 혼란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래된 대부분의 역사책들은 고려시대에 지은 책들이다, 고려시대 국경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다, 그 당시의 세계관으로 고조선의 수도는 당연히 한반도 내에서만 존재하여야 한다, 지금 이북에서 평양만이 고조선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처럼 그래야 고조선을 이은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 후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하여 한반도 내로 조선의 역사를 축소 하려는 의도와 맞아 떨어져 아직 까지도 다수설은 평양만을 고조선의 수도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조선시대 지나의 고대 책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한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 바다의 북쪽, 큰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동해의 안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말하기를 조선이라 한다]
 이 우수광스런 보물찾기 같은 설명을 강경구씨의 설명을 따라 풀어보면, 열양은 열수 지역에 있는 지명이며 열수는 지금 난하의 지류이다, 따라서 조선은 열양의 동쪽, 즉 열수의 동쪽에 있다. 다음으로 바다의 북쪽에 있는데 그것도 바다의 동쪽과 북쪽 모서리에 있다고 했다, 지나사람들이 말하는 동쪽 바다는 우리의 서해로 황해를 말한다. 북쪽 바다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이은 안쪽, 즉 발해만을 말한다. 조선은 그 당시 발해만의 북쪽 모퉁이에 있다는 것이 된다. 이곳은 요하강 하구주변이 된다. 그러면 큰산의 남쪽을 찾자면 발해만의 북쪽 해안에서 유명한 큰산은 의무려산이다. 정리하면 조선은 발해만의 북동모퉁이, 발해만의 북쪽해안, 의무려산의 남쪽이라면 지금의 요서 북진지방으로 요하와 난하사이 근처이다. 그러니까 처음 기(箕)자 명문이 나오는 고죽국 지역의 기국(기자조선)에서 시작된 기자조선이 연나라 진개에게 서방의 2천여리(그 당시의 척도로)를 빼앗기고 요하근처로 옮긴 기자조선이 이때 다시 준왕이 위만에게 밀려 난하나 요하하구 또는 요동반도 어디에선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남포근처에 상륙하여 평양에 들어간 것으로 된다. 우리의 공식 입장(족보상으로는)은 그러나 평양에서 밀려 익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있다.
 강경구씨는 서기전 108년 위만조선이 한무제에게 망하자 그 유민이 평양으로 밀려왔다가 평양마한이 다시 망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다시 옮긴 것으로 설명 하고있다. 마한이 위만조선의 유민인 진한세력에 밀린 것은 사실로 본다, 그러나 강화도로 옮겼다는 것은 의문이다. 후한서에는 준후절멸(準後絶滅) 마한자립위진왕(馬韓自立爲辰王)이라고 해서 준의 후손이 끈어진 후에 마한이 스스로 진왕을 세웠다고 했는데 이 것은 위만조선의 유민들인 변한인들에게 평양마한이 망하여 평양지방에 준왕의 왕가는 남으로 내려가고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평양마한지역에 왕이 되지 못했다고 본다, 대신 그 지역에 남은 주민들이 스스로 준왕 후예가 아닌 사람으로 왕을 삼았다는 뜻으로 본다. 강경구씨는 이를 낙랑세력으로 보았다. 남쪽으로 옮겨 내려간 준왕의 후예는 다시 준왕 처럼 배를 타고 서해안 강화도로 내려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상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평양에서 남으로 내려올 때는 곽창권님이 [한국고대사의 구성] 책에서 지적한대로 황해도에 있는 자비령 고개만 넘으면 거의 평지를 바다보다 더 쉽게 내려올 수 있는데 바이킹같은 해양족도 아닌 고대인들이 많은 무리를 지어 배를 타고 내려온다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듯이 그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나 유물이 없다, 그러므로 육로로 이동하면서 강화도를 거쳐가면서 강경구씨 설명대로 단군과 연관된 전설은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온조왕에게 멸망할 때 마한의 위치는 강화도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의 기록에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수도를 옮긴 것을 보고하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니 북으로는 패하(浿河), 남으로는 웅천(熊川), 서로는 대해(大海), 동으로는 주양(走壤)을 한계로 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온조왕시대에 백제는 하남 위례성으로 지금의 서울 풍납토성 근처다. 이곳에서 강화도나 김포는 서쪽 혹은 서북쪽이지 남쪽이 아니다, 삼국사기에 남쪽 경계라는 웅천을 김포로 가정하여 이곳에 책(울타리)을 세운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를 새로 만드는 것이다, 최후까지 저항한 원산성과 금현성을 강화도 안의 어느곳으로 지적까지하고 있다. 백제의 북과 남 그리고 동쪽 경계는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지만 서쪽은 확실하다, 대해라고 되어 있으니까, 바다이다, 바다. 그렇다면 강화도도 이미 백제 땅인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지나치다. 한순근님은 웅천을 지금의 안성천으로 금현성을 금산 지역으로 설명하고 있고 당시의 마한 수도를 천안으로 가정하고 있다. 곽창권님은 천안 옆에 있는 직산이나 익산설을 소개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서울에서 강화가 더 오지인가 아니면 행주가 더 오지인가? 내가 만약 최후까지 저항한, 믿기 어려운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격리한다면 같은 조건일 때 행주산성부근 보다는 강화도가 반란을 일으켜도 섬이라 고립시켜 진압하기 쉽다고 본다, 그런데 강화에서 행주로 옮긴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조선시대에 영창대군이 유배되었다가 죽은 곳도 강화도고 광해군도 처음에 강화도에 유배되었었다. 정확한 위치는 더 연구가 필요 하겠지만 단언컨데 강화도는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강경구님은 마한이 망한 장소를 강화도로 보면서 유민을 행주지방으로 옮긴 때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지만 사실 그가 소개한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온조왕 27년 여름 4월 기록에 <원산 금현의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백성을 한산의 이북으로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라고 해서 온조왕 27년 서기로 9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한이 완전히 망한해를 삼국사기는 서기 9년으로 앞 기록에서 확실히 하고 있는데 어찌된 것인지 서기 10년으로 특별한 설명없이 고집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가끔 착각한 듯하다.
 한씨의 경우에 강경구님은 평양마한이 망한 이후에 평양에 남아 고구려의 신하가 된 것으로 설명했지만 한씨의 족보에는 백제에 마한이 망한 이후에 신라에 귀의하여 신라에서 벼슬하고 살아온 것으로 나온다. 한씨들이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선우씨는 자료가 부족하여 설명이 곤란하다. 그러나 숭인전비와 위지의 기록엔 선우, 한, 기씨가 한형제로 나오고 각 성씨가 그를 따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같은 기자의 후손이기는 해도 중간 중간 각성으로 분화된 것으로 나오니 이것도 문제이다. 인천이씨는 경원이씨나 인주이씨라고도 하느데 이씨의 홈피에 가보면 허기나 이허겸등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이 나오기는 해도 기가와의 연관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있다. 이씨들은 기가와의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않는데 우리만 그들을 동족으로 여길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단지 시조부터 중시조사이의 900여년 사이에 기가의 씨족분화를 가정할 수 있는데 흥미가 있을 뿐이다. 참고용으로 읽기 바랍니다. 이씨가 기가와 허씨 사이에서 마치 박쥐 같은 씨족으로 묘사된 것을 알면 기분이 나쁠텐데 이를 받아들이려는지는 모르겠다.
 그 밖에 기준왕의 후손이라 자칭하는 성씨로 서씨가 있는데 이 성씨는 동서남북 시대에 상관없이 건수만 있으면 시조와 연결하려 한다. 고려할 필요도 없다.
 

 강경구의 한, 기, 선우씨 시조설

 서기 194년 패수를 지키던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공격하였을 때 준왕은 역부족하여 도망치게 되었다. 이 때 준왕은 혼자 도망간 것이 아니라 좌우의 궁인 수천명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당시의 마한은 도읍지를 왕검성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이 고려시대의 서경 즉 지금의 평양이라고 되어 있다. 평양 지방이 마한이라는 것은 최치원이 명확히 언급했는데 평양지방에 있던 마한의 도읍에 있는 마읍산의 명칭을 보거나, 이승휴가 마한 왕검성을 평양이라고 한 것을 보거나 후한서에 준왕이 마한을 공파하였다고 한 정황 증거로 보거나 국내외의 문헌이 일치되어 있다, 국내의 규원사화나 단기고사, 환단고기등의 도가 사서에는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평양지방에 마한 또는 막조선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이사서들의 심빙성에 대해 계속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상황이므로 그 인용은 보류하기로 한다.
 이 평양 마한 지방에 준왕이 도래하여 마한을 공격 파멸시키고 새로운 왕조 즉 한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만한 정도의 국가 건설 작업을 했다면 준왕이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온 무리가 상당히 많았으리라는 것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점을 놓고 본다면 수천명을 거느리고 마한을 공격 격파하고 한왕이라고 자칭하였다고 한 후한서의 기록이 위지의 기록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준왕의 남하는 해로에 의한 것 이었다고 하는데 그 경로는 난하 하구에서 출발하여 요동 반도 끝의 강상 지방을 경유하여 평양 지방으로 진출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 내에 처음으로 기자족의 뿌리가 내려지게 된다. 이 때 평양지방을 정복한 기자족은 위세가 참으로 대단해서 기존의 마한왕조를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왕조가 낙랑국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도 수세기 동안 준왕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기준 왕조는 서기전 194년에 성립되어 위만조선이 한나라에 망하자 그유민들인 진번세력에게 패망하여 남하할 때 까지 100여년 동안 영화를 누렸다. 이 동안에 당시 한을 구성하고 있던 맥족과 하층부의 예족 사이에 상당히 광범위 하게 기자 숭배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평양지방의 기자 숭배 신앙은 그 후로도 천년, 2천년을 두고 우리민족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평양을 도읍으로 한 고구려가 그후에 태양숭배의 일신, 시조숭배의 가한신과 함께 기자신을 숭배하고 그보다 또 수백년이 지난 고려 숙종 때 평양에 기자묘를 세우고 사당을 두어 기자를 숭배하고 더 나아가서 조선왕조에 와서는 문화 개명의 신으로 기자를 조선왕조의 정신적 전통으로 숭배한 것 들은 모두 기자 숭배의 뿌리 깊은 맥락이라고 하 것이다. 이 기자숭배의 전통은 서기전 100년경에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족에 의해 성립되어 전승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기준의 세력이 남하해 버린 뒤에도 반도 북부의 예족들은 기준 내지 기자 신앙을 계속 간직하였다, 그 결과 중국 진수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족열전에 준왕의 기록이 실리게 되었다. 기자와 기준에 대한 기록이 위지 예족전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삼국지 편찬 당시까지도 평양 지방에는 준왕의 씨족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도 이 준왕계 씨족과 기자를 숭배하는 예족 들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널리 번성하여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로는 기자 신앙이 고구려의 주요 지도 계급인 예족의 신앙을 대표하는 국가적인 국신 신앙으로 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잠시 민속 신앙의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나 고구려의 후예를 자칭하고 일어선 고려에 와서는 다시 국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되고 조선에 와서는 더욱 번창하여 마침내는 기자의 후손이라는 선우씨를 택하여 기자릉의 참봉과 사당의 전적을 대대로 맡아 가도록까지 국가에서 배려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서기전 194년 평양의 마한을 공파하고 한을 세운 기준왕조는 그 뒤로 왕검성지방, 즉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기준 집단이 평양지방에 가지고 온 문화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반도 내에서의 본격적인 철기 문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한때 강성함을 자랑하던 기준왕조도 100여년이 지나면서 북쪽에서 물밀듯이 내려오는 새로운 유이민 집단 때문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기전 108년과 107년에 걸쳐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자 이민족의 통치를 피하여 진번 등 위만 조선의 여러 제후국들이 속속 동남 지방인 한반도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기전 84년 마침내 이 기준정권 내에서 정변이 생겼다. 어윤적의 동사연표는 이것을 [왕이 진변의 난리를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평양을 습격한 것은 진변(혹은 진번, 진한)이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정작 진변은 평양에 정착하지 않고 더욱 남하하여 한강을 가로 질러 낙동강 유역에 분포 정착하게 된다. 이 평양 지방에는 잠깐 권력의 진공 상태가 있었는데 그것을 메꾼 것이 바로 진번과 같이 위만 조선에서 내려온 낙랑 세력이 었다고 추측된다. 진변의 침공에 무너진 기준계 왕실의 말로는 처음 요서의 난하 하류에서 망명할 때 해로를 이용하였다는 것은 이미 말하였거니와 평양에서 또다시 망명해 나가는 데에도 해로를 이용하였던 것 같다. 동사연표에는 준왕계가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갔다고 되어 있으나 이 지리산은 지리산(地理山) 또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고유의 원래이름이 두루뫼, 두루모리 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이름의 산이라면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어서 꼭 지리산(智異山)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평양 지방에서 해로로 남하한 준왕계가 다시 정착한 곳은 어디일까? 우선 생각할수 있는 것은 당연히 서해안 어느 곳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로 한강 이남의 지방에는 평양에서 준왕에 쫓겨난 마한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이다, 준왕계가 또 마한을 공파 했으리라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적으로는 억설이 되기 쉽고 그러한 아무런 역사상 문헌상 소전이 없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서기 9년 기준계의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백제의 기반이 되는 한강 유역 근처에 자리잡았다고 보아 크게 틀림이 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점을 고랴하면 기준계의 마한이 남하하여 자리잡은 곳은 지금의 강화도가 거의 틀림이 없다. 강화도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삼랑산성(三郞山城)이 정족산(鼎足山)에 남아 있어 유명한데 이 삼랑산을 풀어 보면 세(三)+돌(郞)+뫼(山) 가 되고 정족산을 풀이하면 솥(鼎)+다리(足)+뫼(山) 가 되어서 삼랑산, 즉 세돌이뫼는 정족산, 즉 솥다리뫼가 되어 결국은 세돌이나 솥다리나 같은 말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세 나 솥은 일종의 접두어이므로 그것을 빼면 돌이뫼 다리뫼 가 되어 동사연표의 두루뫼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동사연표에 나오는 지리산 두류산은 지금의 강화도 정족산이라고 추정하며 이 정족산 옆에 단군이 제사를 드렸다는 마니산참성단(摩尼山塹星壇)이 있는 것도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것도 기준계의 왕실이 강화도에 왔을 때 북방의 정통 왕조인 단국(檀國)의 왕족이라고 즉 단군이라고 자칭하였던 것 같으며 그 결과 이 마니산 참성단이나 정족산 삼랑산성이 단군과 관계 있는 듯이 전해 내려온다고 본다.
 이번에는 정통적으로 기자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우는 한씨 기씨 선우씨를 살펴보자. 우선 한씨는 준왕이 마한을 공격하고 지금의 평양 지방에 도읍하면서 한왕이라고 자칭한데서 비롯한다. 그 후에 기자조선에 남은 그의 자제와 친척들이 한씨라고 자칭하였다고 위략에 기록되었다, 이것은 망명한 준왕 및 그 직계 비속들도 한씨라고 칭하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것이 된다. 한씨 성이 물론 이 준왕 때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천왕이 서기전 9세기경 한씨라고 자칭한 뒤 기자국의 끝 왕인 준왕이 해로로 평양 지방으로 망명한 뒤 한씨의 대종이 평양지방의 한씨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평양의 한씨 마한 세력은 백여년 동안 매우 강성하여 현지의 예족 주민들로부터 고조선 천왕의 칭호인 단군의 신분과 호칭을 증정받기까지 한 것 같다. 다시 말해서 단군으로서 숭배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준왕의 후예들이 강화도에 망명하였을 때 현지의 주민들이 그들을 단군이라고 숭배하여 그들의 족적인 삼랑산성이나 마니산참성단 등이 단군의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다는 사실 등에서 그렇게 추측된다, 좀더 생각하면 고조선의 3대 제후국인 변한 진한 마한의 가간이 모두 단군이라고 자칭한 듯 하다(신채호, 정인보 선생설). 그런데 진변의 침략으로 망명한 것은 한왕 세력의 전부가 아니었다.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강화도의 마한 세력이 크게 떨치지 못하고 서기 9년 신흥의 백제 세력에 멸망당한 것이라든지 평양지방에 그 후로도 계속 한씨의 강성한 방자취가 나타나 있음을 볼 때 그렇게 본다. 평양 지방에서 발견된 낙랑의 유적이나 유물 가운데 한씨의 성을 명기한 것이 많은 것은 한씨가 당시 낙랑의 주요한 집권 세력에 속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씨의 주류 세력이 평양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고 강화도로 망명한 집단은 그다지 대규모의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평양지방의 한씨는 낙랑이 멸망하고 그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된 뒤에도 왕씨와 함께 재지호족으로서 고구려에 종사하였다. 불행하게도 고구려 시대의 한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않는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한씨 세력은 안승을 따라 남하하여 익산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이것이 익산 지방의 토성으로 나타나는 한씨의 기원이다. 대문 실복(大文 悉伏)의 난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 옮겨져 흩어질 때 한씨는 지금의 청주 지방인 서원경에 대대적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결과 익산 한씨는 극히 일부만 익산에 남고 대부분은 청주 지방에 옮겨져서 한씨의 대종을 이루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판명해 두어야 할 것은 한씨, 기씨, 선우씨의 시조라고 전해 오는 우친(友親), 우성(友誠), 우량(友諒), 우평(友平) 등의 이름이다. 이는 이 우(友)자 돌림의 이름들은 위략의 중세 어느 판본에 기자급친(其子及親;그 아들과 친척들)이 기자우친(其子友親)으로 즉 급(及)자가 우(友)자로 잘못 판각(板刻)되어 그 아들 이름이 우친(友親)인 듯이 전해지게 되었고 다른 이름들은 우(友)자 돌림을 넣어 후세에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각 세보마다 시조를 우친이라고도 하고 우량이라고도 하고 우성이라고도 하고 우평이라고도 하여 통일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 한씨의 경우 평양 지방에서 번성하다가 고구려 멸망 후 익산, 청주 등지로 남하한 경우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 기씨의 경우를 살펴보면 좀더 다른 행적을 보게 된다. 기씨는 본관인 행주의 위치로 보나 기준계 마한의 역사적 지리적 행적으로 보나 초기 백제사와 마한의 접촉으로 보나 다름 아닌 강화도 마한의 후예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강화도로 남하한 기준계 마한의 후예가 서기 9년 초기 백제에 병합되는데 이 강화도 마한의 후예가 바로 행주 기씨라는 것이다. 온조왕 즉위 4년 만에 온조왕의 한성 세력은 강화도 마한의 정벌에 착수하여 지금의 김포(金浦)에 웅천책(熊川柵)을 세운다, 그리고 서기 9년 마침내 강화도 정족산의 삼랑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마한의 잔여 세력들은 원산성(圓山城; 豆無達城)과 금현성(錦峴城)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그 다음 해에야 완전히 평정된다. 이 두무달(豆無達)은 강화 하음현(河陰縣; 옛 동음내(冬音奈))에 비정되고 금현(錦峴)은 진강(鎭江)의 대모성(大母城)에 비정되어 둘 다 강화도 내의 지역으로 생각된다. 온조왕은 서기 10년 강화도의 마한을 완전히 평정하고 마한 왕족 즉 기준왕의 후예들을 지금의 행주 지방으로 옮겼다고 생각된다. 행주기씨세보(幸州奇氏世譜)에 기씨가 백제의 온조왕을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고 읽어야 비로소 참된 역사적 사실로서 재평가 받을 수 있게 된다.
 준왕의 후예가 행주 지방으로 옮겨져 준왕에 대한 제사를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삼국지 위지 한전에 [준왕의 후예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한인(韓人) 중에는 지금도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라고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기씨가 강화도로부터 행주 지방으로 옮겨진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세론적으로 보아 온조왕 때를 벗어날 수 없을 것 이며 그섯도 왕전히 멸망당한 서기 10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서기 10년경 행주지방에 옮겨진 기씨 집단이 그후 2000여년을 같은 지역에서 지내 오면서 언제 기(奇)라는 성씨를 정했는 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백제 시대의 일이 틀림없다.
 그 다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선우씨이다, 선우씨는 1930년 일제하 국세 조사 당시 80% 이상이 평안 남북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선우씨의 경우 다른 성씨와 달리 그들의 본관인 용강(龍岡)지방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 곳에서 성장해 왔다, 다시말해서 선우씨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도 남하하거나 북상하지 않고 본거지에 토착하여 자치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본관인 태원(太原)을 중보문헌비고에서는 충주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으나 이미 천관우 선생의 지적한 바와 같이 충주 지방에는 태원이라는 지명이 없고 태원은 지나의 산서성(山西省)의 지명으로서 기자족(箕子族)의 원주지였던 곳의 지명이다. 임승국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전국 시대 중산국왕(中山國王)의 성씨가 선우(鮮虞)씨로서 기자의 후예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우씨(鮮虞氏)가 선우씨(鮮于氏)임에 틀림없다면 선우씨의 기원을 멀리는 기자에게서 찾게 되거니와 그 사이에 중산국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다고 하겠다. 선우씨의 세보에 준왕의 후예라고 하였으나 이와 같이 중산국의 후예임이 밝혀진 까닭에 증보문헌비고의 성씨조 총목에 기록된 것처럼 기자의 방계(기준의 방계를 잘못 쓴 듯하다) 지파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세보에 선우씨가 용강의 황룡국(黃龍國)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우씨가 고구려 시대 이래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계속 용강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믿을 만한 가승이라고 생각된다. 황룡국은 고구려 초기에 서요하 유역에 인접하고 있던 소국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에 흡수되었고 그 지배층은 고구려의 상층부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 황룡국 세력이 용강 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남하한 이후이다.
 따라서 선우씨 세력은 은나라의 기자국 후예로서 태원 지방에 있던 중산국에 일차 집결하였다가 진한 때에 서요하로 이동하여 황룡국을 건설하였고 고구려의 발흥이후에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상층 지도부를 구성했다고 생각된다.
 인주(인천, 경원) 이씨를 보자.
 인주 이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는 이허겸(李許謙)인데 그 아버지는 준(浚)이었다고 하며 본래의 성은 기(奇)씨 였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허겸의 조상 중에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이 이성(李姓)을 처음 사성(賜姓)받은 시조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보 전승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신리 시대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연달아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왕명으로는 경명왕(景明王) 승영(昇英)을 일명 김박영(金朴英)이라고도 한 것이 눈에 띄며 그 밖에 개인 이름으로는 김양박(金梁博), 김장렴(金張廉) 등이 있다, 따라서 세보에 전하는 허기(許奇)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성 허와 어머니의 성 기를 연달아 붙여서 만든 가공적 인물이 아니가 생각된다, 김해 김씨와 허씨가 갈라지고 허씨에서 인주이씨가 갈라져 나간 뒤로도 아버지성 이와 어머니성 허를 연달아 말해서 시조의 이름이 이허겸인 것에서도 짐작된다, 일단 증보문헌비고에 실려 있는 대로 본성이 기(奇)라는 소전을 더 신뢰한다고 할 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세보에 나오는 허기라는 이름은 가공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가공적인 이름이 그나마 한 가닥 암시해 주는 것이 있다면 조작적인 이름에 기(奇)자를 넣음으로서 인주 이씨의 본성이 기씨이었다는 방증을 남긴 것이라 할 수있다.
 이 인주 이씨의 씨족은 덕양 기씨의 한 지파(支派)였는데 기씨는 다 아는 바와 같이 한씨 선우씨 등과 함께 기자조선의 끝왕인 기준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인주지방에 기성의 분파가 정착한 것은 행주와 인천의 가까운 지리상으로 보아 사리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나 정작 그 시기에 애해서는 단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인주 기씨가 당나라의 황실성인 이씨를 하사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이 씨족이 크게 융성하였다고 생각되며 그러한 족적기반(族的基盤)이 형성되기까지는 몇 세기의 세월이 걸렸으리라는 점, 그리고 삼국시대 말기에 오면 벌써 각 지방에 씨족 분화와 함께 호족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기씨 일파의 인주 정착 분화는 이미 삼국 시대의 일 즉 서기 6~7세기경의 일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이러한 전통 깊은 지방세력과 중앙에서 세력을 잃은 가락 허씨의 결합에서 인주이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며 이 인주 이씨는 시대에 따라 그 조상 설화 중에 허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기씨의 전통을 더 강조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작성했다.
    
선우, 한, 기의 뜻

위지등의 여러 기록에 선우씨, 한씨, 기씨는 기자의 적통으로 마한 원왕 기훈에 이르러 아들 셋이 있으니 우평은 선우씨로 북원으로 돌아가고 우량은 한씨로 상당 한씨가 되고 우성은 평강으로 돌아가 덕양 기씨가 되었다 한다. 그러면 선우와 한, 기에는 무슨 뜻이 있어서 원래의 기(箕)에서 다른 세가지의 성으로 분화 된것일까?
먼저 우리 족보 1982년판 원편 15쪽에는 간단하게 성들의 의미를 적고있다, [기자의 자손들은 기자의 후예로 기(箕)이다, 이것은 토성의 뜻을 이은 것이다, 선우(鮮于)씨는 제후국 이름을 따랐고 한(韓)씨는 기자조선에서 남쪽으로 옮긴 이름 마한(馬韓)에서 따왔고 기(奇)씨는 기(箕)와 기(奇)가 서로 가까운 소리라 따왔다] 라고 했다.
한순근님의 홈(myhome.netsgo.com/hsg3104/)에 가보면 마한에 관한 글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수우족의 우두머리를 원래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선우여(單于黎)라고 불렀는 데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수우족의 우두머리를 선우여라 불렀다고 성을 선우(鮮于)씨로,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기자조선왕 기준(箕準)이 한(韓)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왕(韓王)을 칭하였다고 성을 한(韓)씨로, 마한왕의 후손들 중 일부는 지나에서 기(箕) 작위를 받은 기자족이 원래는 수유족의 한무리였다고 성을 기(奇)씨로 칭하였다. 하고는 箕와 奇는 같이 쓰인다] 했다.
이에 조금 덮붙여 설명한다.
첫째, 선우(鮮于)씨를 보자, 중앙일보에서 발행한 [한국성씨의 고향을 찾아서]를 참고하면 태원 선우씨는 기자의 아들 기송이 기자조선의 2대 장혜왕으로 즉위하면서 동생 기중을 우산국(于山國)에 봉하여 조선(朝鮮)에서 선(鮮)과 우산국(于山國)에서 우(于)를 합하여 성씨를 선우(鮮于)씨 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마한 원왕에게 세 아들 형제가 있었는 데 선우량은 용강 오석산으로 들어가 황룡국이란 나라를 세우고 선우씨의 대를 이었고 한명은 청주 한씨, 한명은 행주 기씨가 되었다고 해서 기자의 둘째아들 기중이 우산국왕이 되면서 선우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인지 마한 원왕의 아들 우평이 시조인지 조금 헷갈리지만 아무튼 우산국과 연관을 맺고있다. 그런데 이 우산국은 울릉도의 우산국이 아니라 기(箕)명문의 청동기가 출토되는 백이, 숙제가 나오는 기자조선의 원주지 고죽국지역이다, 이곳에 살던 선비족의 왕이나 추장, 족장을 나타내는 말이 선우이다. 한자로 單은 다른 곳에서는 단으로 읽지만 우(于)와 함께 쓰면 선으로 읽는다. 이 선우(單于)는 다른 한자 뜻은 없고 그냥 선우만을 표현한 음차한 단어이다. 선우(鮮于)씨의 선우도 그냥 선우일뿐 각각의 글자 선과 우의 뜻은 없다 그러니까 鮮于=單于=선우이다, 이것은 우두머리, 추장, 왕이란 뜻이다.
두번째, 한(韓)을 보자.
모두 알다시피 순수한 우리말 한은 크다, 넓다, 높다, 위대하다 등등의 뜻으로 아버지나 어머니와 함께쓰면 한아버자->할아버지, 할머니 가 되어 아버지, 어머니 보다 윗어른을 나타낸다, 한글에서 한도 같은 의미로 이름을 붙인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 이 한이 간이나 칸으로도 소리내어 동북아시아 여러 고아시아족에게는 같은 뜻으로 쓰였다, 몽골의 태조 징기스칸의 이름은 태무진이고 뒤에 붙은 칸과, 태무진의 손자 원나라 세조는 쿠빌라이칸에서 칸도 같은 한이다. 신라에서 내물왕부터 마립간을 왕의 뜻으로 쓰였다, 내물왕은 기록에 내물마립간이라 나온다. 이 마립간은 마립+간이다, 마립은 마리를 한자로 쓴것이다, 마리는 머리이고 머리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간은 한이다, 신라에서 왕권이 강화되기전 아직 지방의 세력이 반독립적으로 있을 때 이러한 지방 소연맹체들의 맹주가 마립간 즉 우두머리 간으로 왕중의 왕이란 뜻이다. 이 간은 왕의 뜻이다, 마한도 같은 뜻이다, 마한(馬韓)에서 마는 말마자이다, 말은 마리이고 마리는 머리이며 머리는 우두머리 이다,한은 한이다,이 우두머리 한은 마한 안에 있었다는 여러 소국의 왕들 중에 가장 우두머리 왕, 왕중왕이라는 의미이다.
한은 왕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기씨를 보자.
정인보는 기(箕)는 [검]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며 [검]은 임금의 뜻이라 했다, 그러니까 이 [검]이란 신라에 왕호로 쓰인 다른말 이사금을 기억 할것이다. 이 [이사금]은 [이삐]이고 즉 [잇금]이다, 이 [잇금]은 임검을 말하는 것이고 [임검]은 [임금]으로 왕이란 뜻이다.곽창권님이 지은 [한국 고대사의 구성] 190쪽에는 김방한이 지은 [남부지방에서]를 인용한 주석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국에서 王을 [임금] 왕으로 풀이하나 [긔자;긔 이아래아] 왕 이라고도 한다, 즉 기자=王의 뜻이며 일본만 해도 그들의 고어에서는 왕을 (吉師[기시];기자)라고 한다}라고 하여 [기]가 왕을 뜻한다고 적고있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箕와 奇가 같은 뜻이고 기자가 왕이니 기(奇)는 왕을 뜻한다.
결론적으로 선우, 한, 기는 모두 왕이란 뜻으로 기자조선이나 한씨조선이나 한혁이니 여러 고대의 기록을 가지고 해석을 달리 하려고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이것은 같은 뜻을 한자를 빌어 적어서 생긴 오해로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의미를 모르는 척 축소하여 뜻 모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시간낭비 하게 하고있다.
우리 세성(선우, 한, 기)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왕손들 이다



그러나 위의 설은 기자조선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상황이고 위의 기록에 인용된 위략이라는 책도 지금은 원본을 볼수가 없어서 사실증명이 어렵다.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나온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 문예전고(文藝典故) / 족보(族譜)

○ 우리나라의 족보는 가정(嘉靖) 연간에 문화류씨(文化柳氏)의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되었는데, 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 때문에 뒤에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 《여술보(藜述補)》
○ 새로 간행한 행주기씨(幸州奇氏) 족보는 기자(箕子) 이후의 세대를 41대까지 기록하였다. 대개 주(周) 나라 무왕(武王) 기묘년에 기자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한(漢) 나라 혜제(惠帝) 정미년에 기준(箕準)이 마한(馬韓)이라고 하였으니, 합하여 9백 29년이 된다. 그런데 지금 이 보첩에 기록된 41대는 1천 36년이 되니 의심스러운 것의 첫째이다. 또 41대 중에 《동사(東史)》에는 기부(箕否)ㆍ기준(箕準)이 있는데, 여기에는 기부(箕否)조차 없으니 의심스러운 것의 둘째이다. 또 삼국 시대 중엽 이후에 비로소 시호(諡號)를 내리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기록된 것은 모두 시호인 듯하니 의심스러운 것의 셋째이다. 이것은 반드시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자가 전거(典據)가 확실치 못한 것을 꾸며내어서 세상을 속인 것인데, 간행(刊行)하는 보첩(譜牒)에 기재하였으니 괴이하다. 《기년아람(紀年兒覽)》

기년아람[紀年兒覽]이란책은 이만운(李萬運)이 영조 말년에 편찬한 8권 4책. 필사본을 1777년(정조 1)에 이덕무(李德懋)가 수정, 보완했고, 1778년(정조 2)에 이만운이 다시 손질한 후 서문을 붙여서 완성시켰다. 뒤에 고종이 이 책을 열람한 뒤 “이 책은 어린아이들만 볼 책이 아니다”라고 하여 기년편람 [紀年便覽 ]이라는 서명(書名)을 내렸다.

이 비판은 1774년 3차 갑오보甲午譜 (영조英祖 50)를 비판한 듯 하다


까페에 다음과 같은 토론이 있었다.


기우범 ;
(기자의) 41세손 기준(箕準)이 연인(燕人) 위만(衛滿)의 침입으로 남천(南遷), 전북 금마군(金馬郡, 현 익산군)으로 옮기고, 다시 그의 8세손(마한 원왕) 기훈(箕勳)에 이르러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우성(友誠)은 덕양(德陽 : 행주)기씨, 우량(友諒)은 상당(上黨 : 청주)한씨, 우평(友平)은 북원(北原 : 평양)선우씨의 시조가 됐다.
한씨와 선우씨가 우리와 같은 시조라는 것을 알겠는데 그 형제 중 첫째가 누군가요?

기회근;
누가 큰아들인지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위지의 기록은 魏誌曰 箕子 子姓 其後 有曰 友平 友諒 友成 友平 因 襲 鮮于氏 歸 北原, 友諒 襲 馬韓 仍爲 上黨 韓氏, 友誠 歸 德陽 爲 奇氏, 즉 위지(魏志 : 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北原)에 들어가서 선우씨(鮮于氏)라 칭(稱)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馬韓 舊制)에 따른 상당 한씨(上黨 韓氏)라 칭(稱)하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으로 들어가 덕양 기씨(德陽 奇氏)라 칭(稱)하였다고 전(傳)한다 라고해서 선우,한,기의 순서로 나옵니다. 청주한씨의 홈에 가보아도 그렇게 나오고요. 이것이 형제간의 순서라면 선우씨가 큰형, 한씨가 중간, 기씨가 막네라 할 수 있습니다.

기옥도;
내가 보유한 자료에는 元王有子三人曰長子友平,次子友誠,三子友諒,馬韓滅友平奔高句麗琉璃王朝爲北原鮮于氏,友誠降于百濟溫祚王朝爲德陽奇氏,友諒亡歸新羅上黨韓氏........ 로 되어 있는바 장자는 우평(선우씨), 둘째는 우성(기씨), 셋째는 우량(한씨)가 맞는 것 아닌가요?

기호철;
길게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가 형이고 아우고도 없습니다. 기록마다 모두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도 신빙성을 검증하기에는 어렵구요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습니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 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씨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로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 명종14-1628 인조6에 의해 편찬되었다)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 하였습니다.

箕子의 子姓은 其後에 有曰友平이요 曰友諒이요 曰友誠이니 友平은 仍襲鮮于氏하여 歸北原하고 友諒은 襲馬韓하여 仍爲上黨韓氏하고 友誠은 歸平江하여 仍襲德陽奇氏하니라.(魏誌);
箕準의 七世인 元王 箕勳에 至하여 有子三人이 各其姓을 得하니 友誠은 德陽奇氏가되고 友諒은 上黨韓氏가 되고 友平은 北原鮮于氏가 되었었다.(魏誌);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닙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지영;
이덕일이라는 우리 나라 역사학자가 쓴 책에는 행주 기가, 청주 한가, 선우가가 중국인이 되고 싶어 기자라는 인물을 만들어 냈고, 우리 가문상의 시조도 기자라고 하더군요.
우리 가문의 시조는 행주 기가 우자 성자 되시는 분 아닙니까?
역사학자 조차 저런 얘기를...
또 행주 기가와 기자의 기가와는 무슨 관계인지...
단일본의 확실하고 정확한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 가문이 어떠 어떠한 상황에 부합되기에 단일본이다 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기호철;
질문하신 내용은 가문의 연원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영님게서는 크게 세가지를 물으셨다고 파악합니다.
첫째 우리 기문은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하는데 기자와는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둘째는 기자의 기(箕)씨와 우리 기(奇)씨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자의 후손을 칭하는 기, 한, 선우씨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입니다.

첫째에 족보 체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첩되는 세계는 노사 기정진선생님께서 이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족보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구요.
둘째와 셋째에 대한 대답은 기,한,선우 가운데 누가 형이냐는 질문에 제가 답변한 내용에 있습니다.
노사 기정진 선생께서 득성조부터 65세까지를 고세계로 하고 다시 중시조 기순우 할아버지를 1세로 계보를 정리하신 뜻은 두가지 입니다.
첫째 기자의 후손이라는 설은 전해졌으나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는데 불현듯 고세계가 나타났으나 사실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부분과 믿기 어려운 부분을 구분한 것이 그 까닭이었습니다.
둘째는 고세계도 가문의 전승이므로 이를 후대에 전하여야 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기자의 후손인가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자의 후손을 국가적으로 찾아 왔지만 그러지 못하다 중국 원나라 선우추의 시 구절에 '기자의 후손은 털이 많으니 선우추 그대는 기자의 후손이로다'라는 추상적인 표현을 통해 국가적인 은전을 베풀었고 실제적으로 국가로 부터 공인된 기자의 후손은 선우씨 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한씨, 기씨, 공(孔)씨, 인(印)씨 등이 서로 기자 후손을 자처하였지만 근거는 없는 것이었으나 광해군대에 청주한씨가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석탄 한효중이라는 사람에 의해 기자의 후손은 기 한 선우라는 위지의 기록이 위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자의 후손이라는 전승 자체가 위조된 기록에 의존한다고 해서 모조리 무시할 것은 없습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세계와 중시조 이하의 실제 계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은 이미 노사선생께서 확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사실보다는 기자의 후손이 역사인데 우리나라 역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상식을 벗어난 일입니다. 기자의 후손이라하며 기, 한, 선우씨가 종씨라는 전승이 있으나 상세한 것은 알기 어렵습니다. 상세하고 믿을 수 있는 세계는 고려 인종대 문하평장사를 지내신 기순우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회근:
위조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석탄 한효중이 청주한씨 족보를 최초로 편찬한 것은 1617년입니다. 한효중의 발문을 읽어보면 족보를 편찬하면서 청주한씨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청주한씨 발문을 인용하면
[을사년(1605년)에 내가 성환 독우로 있을때 마침 한백겸이 청주목사로 와서 먼저 시조 태위공의 유기를 찾아 단을 쌓고 비를 세워 후손들의 의모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에 나도 참여하여 조력한바 있었다. 10년후에 다시 내가 청주읍의 성주로 금의환향하게 되어 다시 단을 개수하고 상구를 장만하여 전인이 미처 못한 것을 구비하여 놓았다. 하루는 참봉 한혁과 함께 담화하던 중 "우리 한씨가 대성으로서 세세로 명성을 떨친 것은 태위공의 덕을 쌓은 음덕인데 자손된 우리들이 지금까지 이런 생각조차도 없이 집안의 계통에 어둡고 조상의 근본까지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중에 규율이 없고 가문에 족보가 없는 까닭인지라 오늘날 할 일이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없다, 그런데 제단이나 꾸미고 선조 유업이나 추모하는 정도로 지나고 말 것인가? 여러 종인들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자료를 찾아 모으고 계대의 상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우리가 한 핏줄에서 태어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알도록 하자고 생각합니다. 여러 일가 어른들은 이 일을 같이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 하였더니 한혁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여기에 뜻한 바가 있어 자료를 수집한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같이 손잡고 일할 사람이 없어서 한이었습니다. 이제 성주의 말씀이 이렇게 간곡 하시니 진실로 우리 문중의 큰 행운인지라 막중한 이 일이 우연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기도 또한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하고 즉시 서울에 가서 각 종문을 순방하면서 가첩을 수집하였다. 정승 한효순은 소장하였던 초고를 내주고 또 수록한 참고자료 한권까지도 제공하여 주었으며 나는 또 호서의 일가집 가보를 수집하여서 그 다른점 같은 점을 대조하여 바르고 틀린 점을 여러 차례 수정하였다. 자손들만 기록하고 외손까지 넣지 못한 것은 편찬이 평이하고 보기가 간명하도록 하고자 함이요, 본손만을 중히 여기고 외손을 경시한 것은 아니다. 간명하게 일부를 편찬하여 영구히 전하려고 인쇄하게 되었는데 충청도 종인 중에 가세에 따라 비용을 마련해서 조력한 분이 많았다. 창졸간에 수집한 것이라 필연코 소루하고 미비한 것이 많을 것이다. 후인들이 잘 고증하여 증보하고 삭제하기 바란다. 만력(명나라 신종의 연호)정사(서기1617년 광해군9년)이른 봄, 후손 통훈대부 행 서원현감 한효중 삼가씀]

또한 월사 이정구가 시조의 이름만 틀리고 선우한기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같은 내용의 숭인전 비문을 지은 것은 1613년으로 한효중이 최초의 청주한씨 족보를 편찬하면서 위조했다는 1617년보다 4년이 빠릅니다. 한효중이 족보를 만들기 4년전에 위조한 내용을 이정구에게 주어 비문위조에 공범이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 않됩니다.
결론적으로 한효중은 한씨집안에 전해오는 여러 자료에 있는 이 내용을 정리하여 족보에서 공식화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정구도 시조이름이 다른 것으로 보아 한효중과는 다른 여러 전하는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봅니다.

기호철;
한효중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