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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14 13:12
행주기씨의 시작에 대한 정리 2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3,058  
기호철;
한효중에 의해 위조되었다는 부분은 대단히 민감한 내용입니다. 또한 월사 이정구의 비문과의 상이성과 연대의 착오 또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먼저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월사 이정구가 비문에서 말한 것은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비문에는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라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은 대학자 이정구가 쓴 것이니 믿을 만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정구가 비문을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로 평안도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계속 상소한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왕조실록에서도 이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평안도 유생 정건(鄭虔)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개는 기자(箕子)의 후예를 습봉(襲封)하도록 청하는 내용이었다.(『광해군일기)43, 3년 7월 3일] ]가 그것입니다. 실록의 정건은 정민의 착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숭인전 비문에 이정구가 인용한 상소가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 가운데 어떤 것인지는 명확치 않습니다만 그들의 상소 내용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조삼성은 윤두수가 기자지(箕子志)와 평양지를 편찬하는데 이미 참여한 경력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조선시대 기자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은 선조대였는데 윤두수의 『기자지(箕子志)』, 이이(李珥)의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의 『기자유제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라고 언급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한씨족보에 인용된 위지의 기록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한효중 역시 언급한바와 같이 족보를 편찬하며 이미 한백겸을 만난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명확히 해둘 것은 최소한 광해군이 즉위하기까지 기자의 후손이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설은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학자 고봉 기대승 선생의 손서는 청주한씨 한이겸입니다. 한이겸의 아버지는 한효중이 언급한 한효순이니 함재 기효증공의 사돈입니다. 이 한효순은 만전공 기자헌과 대립하여 이이첨과 함께 만전공을 축출하는데 중심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럼 경연에서 선조 임금께 기자에 대한 기록의 진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고봉선생의 아드님깨서 청주한씨 혼인을 했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물론 제가 한효중이라고 했던 것은 그 편찬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문의 무술보가 죽림헌 등이 실제로 작업했다고 죽림헌의 족보라고 하지 않고 송암공의 족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흘렀습니다만 숭인전 비문의 기, 한,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은 이정구의 학설이 아니라 이정구가 숭인전 비문을 건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며 그런 상소까지도 있었다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정구는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삼가 사전(祀典)에 대한 일로 아룁니다. 평양(平壤)의 기자사(箕子祠)를 숭인전(崇仁殿)으로 고치고 그의 후손을 세워 제사를 주관하게 하라고 이미 계하하셨습니다. …… 즉위하신 뒤로 덕을 높이고 어진이를 숭상하는 데 관계되는 법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후손을 세우는 한 가지 일은 이제 비로소 명을 내리셨으니, 실로 2백년 동안 있지 않았던 성대한 거조입니다. …… 옛날에는 기자전(箕子殿)에 참봉이 있었는데 이제 전감(殿監)을 두었으니, 참봉은 혁파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선우씨(鮮于氏)를 이미 기자의 후예로 정하였으니,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다른 고을에 있는 사람들을 군적(軍籍)에 편입시키지 말고 사당 아래 모여 살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광해군일기) 52, 4년 4월 27일] ]고 하여 기, 한, 선우 삼성 가운데 선우씨의 기자 후손설만이 받아들여진 당시의 상황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선우식, 선우협 등이 대대로 기자의 후손으로 국가의 은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럼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의 상소에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조삼성은 이미 윤두수의 기자지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었음을 지적한바 있었습니다. 윤두수의 기자지에는 기자 후손이 기한선우 삼성이며 위지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거나 알았다하더라도 애써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상소에서 그 내용이 선우씨의 세계에 의존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종때에는 기자의 세계가 40대였고, 선조 무렵에는 41대로 영조대에는 42대로 변화하며 그 내용도 차츰 달라지고 더욱 정확해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와 윤두수 역시 기자 41대 928년을 공통적으로 논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이것이 주된 학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정확한 당시의 연구에 불과합니다. 기자의 성을 자(子)씨로 고증한 것이 그것입니다. 당시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중국측의 자료와 목간 등을 통해 기자의 성이 희(姬)씨라는 사실이 추후 밝혀졌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확증하기는 어려우나 조삼성은 광해군 7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때 만전정승의 과거 영향력 행사로 부정의 논란이 있었다는 점도 주지해 볼 사실입니다. 또한 양덕록 역시 음직을 얻었던 것도 전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까운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봉 선생의 후손과 만전정승 일가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음은 선후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외적으로 선후 관계는 그렇습니다만 한효중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청주한씨족보는 1605년(을사:선조3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한효순의 초고는 최소한 1615년 이전에 편찬되었습니다. 그것은 한효순이 이때 죽었기 때문입니다. 편찬이 완료된 시점이 1617년이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은 수십년을 두고 여러 사람이 서로 살피며 출판하게 됩니다. 미암 유희춘 역시 그의 서적을 출간하기 위해 고봉선생께도 두 차례, 율곡선생께도 한 차례 이를 보내 교감을 받았던 것이 미암일기에 상세한 것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위조의 진위 여부는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모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적하신 바와같이 그런 기록이 있었고 이것이 취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십년만에 느닷없이 풍성한 기록이 홍수처럼 쏟아졌던 것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기회근
한효중의 조작이라기 보다는 정리라고 해야 옳타고 봅니다.

기호철
출처를 제대로 밝혔다면 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위지라고 한 것은 그것을 믿도록 호도하기 위한 것이므로 조작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미처 기입하지 못하였지만 조작의 증거는 더 있습니다. 이는 선조께도 누가 되므로 여기서는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기회근
글의 뜻은 기자헌과 한효중 혹은 한효순이 정치적으로 정적관계지만 합심하여 시조를 조작했다는 것이군요. 기자헌이 조삼성을 사주하는 것을 본 것처럼..

기호철
기자의 후손에 대한 설은 이미 있었습니다만 신빙성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없는 기록인 위지 등을 통해 사실처럼 호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는 이야기 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름 아닌 군역의 문제입니다. 이를 논하다 보면 집안의 숨겨진 것을 모두 밝혀야 하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역은 양반이면 당연히 부담하지 않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면 족보에 숨겨진 것까지 밝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전정승께서는 김시양에게 가계 기록의 문제점을 스스로 고백한 일이 있었고 이는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회근;
해서문중에 대하여는 족보와 다음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崇仁殿碑銘
古 4657-28 편자미상, 18세기 이후. 1책(17장), 필사본, 36 x 23.5 cm. 淸州 韓氏 집안에서 자신들의 系譜에 타인이 끼어든 것을 증빙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 崇仁殿은 箕子의 位牌를 모신 전각으로서 고려 때인 1325년(충숙왕 12)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平壤에 있다. 崇仁殿碑는 1613년(광해군 5)에 세운 것으로서 비문은 李廷龜(1564-1635)가 撰하였다. 그러나 정작 비가 세워진 것은 24년 뒤인 1637년(인조 15)의 일이다. 본서는 서두에 崇仁殿碑를 전재하고, 이어서 2 건의 문서를 수록하였다. 하나는 萬曆 45년(1617:광해군 9)에 평안도 지역의 청주 한씨들이 자신들 역시 기자의 후예이므로 鮮于氏의 예에 의거하여 軍役을 면하여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康熙 3년(1664:현종 5)에 幸州 奇氏들이 역시 기자의 후예임을 내세워 군역의 면제를 청하여 허락 받은 것이다. 이어서 수록된 淸州韓氏前代事蹟은 韓德龍이 찬한 것으로서 청주 한씨를 기자의 계보와 연결시킨 것이다. 먼저 중국의 黃帝에서 殷王 成湯을 거쳐 朝鮮, 馬韓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여기서 馬韓의 元王의 아들인 友諒이 新羅로 망명하였고 脫解王이 그를 淸州에 分封하여 이로부터 청주 한씨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현재 자신의 집안까지 이어져 왔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한덕룡이 쓴 서문을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은 족보를 간행할 때 友三.仲三이라는 자가 6대조인 璡의 아래에 자기들의 祖父를 삽입하였으므로 이를 수소문하였으나 찾지 못하였고, 이에 지난 辛巳年(연기미상)에 法에 陳告하여 營題(감사의 확인서)를 받아 두었으며, 이번에 碑銘을 重修할 때 前冊에 의거하여 踏印해 둠으로써 다음번 族譜를 重修할 때 증빙으로 삼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어서 청주 한씨의 시조인 韓蘭으로부터 이어지는 계보를 정리하였다. 서문을 제외한 내용은 원래 受敎하여 全義에 거주하는 韓德一집안에 있던 것을 傳書해 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계보의 말미에는 牧使의 확인내용이 적혀 있다. 결국 이 책은 한덕룡이 家系에 混入이 생긴 것을 계기로 자신의 계보를 증빙받기 위하여 작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문을 작성하여 목사의 확인을 받은 것은 癸未年으로 되어 있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족보의 混入이 崇禎 再甲申年(1704:숙종 30)의 族譜 重刊 후 다시 중간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므로 18세기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한편 현재 규장각에는 崇仁殿碑의 탁본이 2종 있다. 숭인전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崇仁殿碑銘≫<奎 10284> 및 ≪崇仁殿碑≫<奎 12605>의 해제 참조〔≪奎章閣韓國本圖書解題≫ 史部 4 pp.573∼574〕. (윤경진)

기호철;
이 해제만이 아니라 청주한씨족보 해제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 소개한 비문은 여러 곳에 게재된 비문 가운데 청주 한씨들이 그들의 목적을 위해 등사한 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달라질 것이 없고 그들의 목적을 위해 추가로 다른 것들을 실은 것입니다. 기자실기가 이이의 기자실기, 윤두수의 기자지를 게재하고 자신들이 목적하는 다른 기록을 넣어 광해군 초에 평안도에서 간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기자실기는 기한선우 삼성 기자 후손설을 게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번안한 것이지요.

기회근
나도 위지라고 해서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위전을 다 찾아도 없더군요. 다른 위지라면 위략밖에는 없는데, 이 어환의 위략에 전하는 내용을 누군가 필사했고 이것이 한효중이 모아서 족보편찬에 참고한 청주한씨들의 가첩에 인용되어 전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호철
그 것 때문에 위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국지가 편찬된 이후 중국과 우리나라를 모두 뒤져 위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송지의 주에 게재된 위략의 기사를 따로 취합해 책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위략집본입니다. 필사본이 전해질 가능성도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삼국지에서 기자의 후손은 절멸하였고 한지의 사람들이 기자의 제사를 모신다는 것이 위략의 기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위략에 동일한 사실을 한쪽에서는 후손이 절멸하였다고 쓰고 다른 부분에는 후손에 기한선우씨가 있다고 기록했을까요?

기회근
準後絶滅을 많은 책들은 준의 후손은 끈어졌다고 하는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저는 준왕의 후왕은 끈어졌다. 즉 후손은 있는데 마한이 온조왕에게 망하면서 준왕의 후손으로는 더 이상 마한 왕이 없다라고 봅니다. 제사를 받든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 조상님들입니다.

기호철
準後絶滅만으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 뒷부분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를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요, 해석하면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猶자를 기재하여 아직 또는 오히려의 뜻으로 후손이 절멸하였다가 옳은 해석임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猶는 한자의 어휘에서 역접어입니다. 즉 반대의 경우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받들지 않아야할 사람이 오히려 지금까지 제사를 지낸다는 뜻입니다. 논어 학이편의 [學如不及 猶恐失之]가 대표적인데 이를 해석하면 학문이란 미침(끝)이 없는 것 같다. (할수록)오히려 이것(공부한 것)을 잃어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입니다.

기회근
그런 뜻이라면 우리조상님이 주체가 아니라 백제왕이 주제하는 제사에 객으로 참석했나 보군요. 결국 위략이라는 책이 나타나야 대조하여 진위를 확인 할 수 있겠습니다.

기호철;
질문하신 내용 가운데 단일본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있었습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성이 있고 그에 따른 본관이 있습니다. 그럼 성은 무엇이고 본관은 무엇인가?
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본관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본관의 형성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본관은 고려시대 호적제도의 잔존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본적이 있습니다. 서울에 살지만 본적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오룡동인 사람도 있고 강원도에 살지만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인 사람도 있습니다. 본적이 주소지인 사람은 대종가 몇 집을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호적제도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 당시에는 본적지와 어떻게든 관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고려시대의 본관(本貫)도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관이란 행정관할 구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고려시대 전기에 호적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호적을 관할한 지방관서를 의미합니다. 행주기씨 혹은 덕양기씨라 함은 고려시대 호적이 만들어질때 행주나 덕양에 우리 조상께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덕양은 행주현의 또다른 별칭입니다. 행주산성안에 있는 정자가 덕양정인 까닭은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고양시는 고봉현과 덕양(즉 행주)현을 조선 태종때 합하며 한 글자씩 딴 이름입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 기씨는 몇 사람 되지 아니한 까닭에 다른 지역에 거주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까닭에 본관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당시 번성한 성은 여러 지역에 거주하다 보니 여러개의 본관이 만들어 졌습니다. 김씨의 경우는 김해, 광산, 안동, 의성 등 200여개 본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역의 토성(土姓), 내성(來姓), 망성(亡姓)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행주현을 예로 들면 토성은 김(金), 기(奇) 은(殷), 전(田), 내성은 이(李), 망성은 최(崔), 강(康) 부(夫), 즉(則), 고(高), 나(那), 차(車)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토성은 고려시대 행주에 호적을 둔 성씨로 세종대에도 살고 있는 집안 입니다. 이 집안은 행주가 본관입니다. 내성인 이씨는 조선 시대에 새로이 호적을 옮겨온 집안을 말합니다. 이 경우 새로이 본관을 칭하는 경우도 있고 기존의 본관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양 이씨나, 행주 이씨, 또는 덕양 이씨가 있다면 바꾼 경우이고 없다면 후손이 절멸했거나 기존의 본관을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망성은 사라진 성씨입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거나 후손이 절멸한 경우입니다. 즉씨나 나씨는 사라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있다면 본관은 내성인 이씨와 유사할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본관은 만들어 졌습니다. 충청도에 사는 김씨 가운데 본관이 전중(田中)인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속된 말로 다나까(田中) 김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시조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투항하여 살았고 성을 김씨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말에 캐나다 출신 미국 선교사 게일 (Gale, James Scarth) [1863~1937.1.31.]은 우리나라에서 기일(奇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귀화했다면 미국 기씨 또는 토론토 기씨가 되었을 것이니 기씨도 본관이 더 늘어 단일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기자의 箕씨와 우리 奇씨는 단일본으로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인데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그리고 오늘날가지 호적법상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단지 전승으로 후손이라는 것은 있을 뿐입니다.


기호철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시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러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명종14-1628인조6에 의해 편찬되었다)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하였다.

箕子의 子姓은 其後에 有曰友平이요 曰友諒이요 曰友誠이니 友平은 仍襲鮮于氏하여 歸北原하고 友諒은 襲馬韓하여 仍爲上黨韓氏하고 友誠은 歸平江하여 仍襲德陽奇氏하니라.[魏誌]

箕準의 七世인 元王 箕勳에 至하여 有子三人이 各其姓을 得하니 友誠은 德陽奇氏가되고 友諒은 上黨韓氏가 되고 友平은 北原鮮于氏가 되었었다.[魏誌]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좌의정 한효순(한효순[ 韓孝純 ] )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된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두번째는 당성8학사설이다. 즉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로온 8명의 학자들의 후예라는 설이다.

행주은씨(殷氏)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46대 839~857) 때 곧 당나라 15대 무종(840~846)연대에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악으로써 신라를 교화시킬 수 있는 문학 지사를 신라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결과 은(殷), 홍(洪), 기(奇), 길(吉), 방(房), 위(魏), 목(睦), 봉(奉)씨 등 8학사가 래조하여 오늘날 한국 은씨의 조상이 됬다.

남양홍씨(南陽洪氏)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건너온 홍천하(洪天河)이다. 시조 천하(天河)는 고구려 영류왕(618~642) 때 중국 당나라에서 문화사절인 팔학사의 일원으로 건너와 유학을 가르치는 등 문화 활동을 펴다가 연개소문의 난으로 인하여 신라로 피신하였다.

남원방씨(南原房氏)
당나라의 명상(名相) 방현령(房玄齡)의 후손이라 한다

장흥위씨(長興魏氏)
시조(始祖) 회주군(懷州君)은 대당관서(大唐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이름이 경(鏡)이니 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 7년 무술(戊戌) 서기(西紀) 638년 신라왕(新羅王)의 요청에 의하여 당(唐) 태종(太宗)이 8인의 도예사(道藝士)를 파견(派遣)함으로써 동래(東來)하였다.  방(房), 홍(洪), 목(睦), 기(奇), 은(殷), 길(吉), 봉(奉)씨와 더불어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서신면(西新面) 상안리(尙安里) 고당성(古唐城)·익주(益州)·남양(南陽)에 입국(入國)하니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광복후(光復後) 서기(西紀) 1972년에 팔학사의 입국(入國) 상륙지(上陸地)인 당성(唐城)을 지방문화사적(史蹟) 217호로 지정(指定)됨으로써 팔면시비(八面詩碑)를 세우는 한편 팔학사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제향(祭享)키로 한 바 있다.

사천육씨(泗川陸氏)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서기 927년(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길씨(吉氏)
시조는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8학사(學士)의 한 명인 길당(吉唐)이다. 《해평길씨세보(海平吉氏世譜)》에 의하면, 길당은 고려 문종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참지정당문학(參知政堂文學)에 오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서 해평(海平)으로 관적(貫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화봉씨(江華奉氏)
시조는 미상으로 시조를 상고할 수 없다

위에서 찾아본 당성8학사는 씨족마다 전승이 일관적이지 않지만 당나라에서 고구려 혹은 신라로 문화를 전파하기위해온 8명의 당나라 학사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족보는 9차보 지장록(정편) 1280 페이지에서 1281 페이지에 남양방씨보를 인용하여 각 씨족의 사운(四韻)과 8학사는 고구려의 예악을 가르쳤다(八學士敎高句麗禮樂)라는 글로 8학사설을 언급은 했지만 자세한 설명은 없다. 우리 대종중은 공식적으로 기자후손설을 따르기 때문에 8학사설은 설명없이 무시하면서도 언급은 했다.

우리가 기자나 다른 8학사의 후손이라면 치나에 어떤 기씨가 있나 찾아보았다.

치나 기(奇)씨의 연원은
황제헌원씨에서 소호금천씨의 아들중 은이 윤성에 봉하여 윤씨성이 발생되어 그 후손중에 주나라 선왕때 윤길보가 대신으로 있었고 윤길보의 장자 백기에서 자손들이 기성으로 했다.
주나라의 제후국 노나라 노소공 희조(姬稠)의 5번째 아들 이름이 기(奇)라서 기(奇)씨로 하였다.
북위 선비족 중에 기근씨에서 기성으로 개성 하였다. 자손들은 낙양에 많이 살고 있다.

기씨도 3가지라 이중에서 어느 기씨인지는 알길이 없다.


세번째는 호족출신일 가능성이다.

물론 기자의 후손이나 8학사의 후손이 호족세력으로 남아있었를 수도있고 선비족 기근씨의 후손이라면 흉노후손인 신라김씨왕가와 연결된 후예일수도 있다

역사책에 보이는 가장 오래된 기씨(奇氏)기록은 삼국사기 권제50 열전 10 견훤의 멸망에 나오는 기언(奇彦) 기록이다.
[대상(大相) 견권(堅權), 술희(述希), 금산(金山), 장군 용길(龍吉), 기언(奇彦) 등으로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좌익(左翼)으로 진을 치게 하였다.(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고려사절요/1권/태조신성대왕/병신 19년(936)秋九月(가을 9월) : 가을 9월 기록엔 기언(奇言)으로 나온다
지천군(支天軍) 대장군(大將軍) 원윤 능달(元尹能達) 기언(奇言) 한순명(韓順明) 흔악(昕岳)과 정조 영직(正朝英直) 광세(廣世)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左綱)을 삼았다.[支天軍 大將軍 元尹 能達 奇言 韓順明 昕岳 正朝英直 廣世 等 領 步軍一萬 爲左綱)

언(彦)과 언(言)은 소리와 뜻은 같지만 모양은 틀린 글자이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보고 요약한 고려사절요의 글자가 다르지만 대종중은 오래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彦一作言)

기언(奇言)의 직위가 무엇인지는 그앞에 나오는 원윤 능달(元尹能達) 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원윤(元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분의 출신이나 나이 등등 다른 정보는 전혀없다. 그러나 이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금석문이 호철님이 찾아준 영월 흥령사 징효대사 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있다. 다음은 호철님의 글을 인용한다.

이것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헌덕왕 18, 826~ 효공왕 4, 900)의 비로 보물 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썻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어 924년에야 비문을 지었으며 다시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기에 선사들을 우대하는 비의 건립이 지연되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비문은 전면은 36행에 1행 81자, 음기는 29행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탄생하여 오관산으로 출가한 후 화엄을 배우다 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등 선사를 만나 수학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한 이력과 헌강왕 정강왕 등의 우대를 받고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였으나 사양한 등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흥령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킨다거나 명주 승정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사료가 들어 있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 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기호철 글)


그러나 이 기언과 지금 현재 우리 기씨와 어떻게 세계가 연결이 되는지는 알수가 없다.

인종 때에 사신 기순우 할아버지와 기언과의 사이에 역사에 기록된 다른 기씨는 고려사절요/제2권/목종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기유(己酉) 12년(서기 1009년)에 나오는 대의 기정업이다.

왕이 전우(殿宇)와 부고(府庫)가 탄 것을 보고는[王見殿宇府庫煨燼(왕견전우부고외신)] 슬퍼하고 탄식하다가 병환이 나서[悲嘆成疾(비탄성질)] 정사를 보살피지 못하였다.[不聽政(불청정)]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 중과[王國師二僧(왕국사이승)]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太醫奇貞業(태의기정업)]

태복(太卜) 진함조(晉含祚)[太卜晉含祚(태복진함조)]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太史潘希渥(태사반희악)] 재신 이부상서[宰臣吏部尙書(재신리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유진(劉瑨)[參知政事劉瑨(참지정사류진)]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中樞院使) 최항(崔沆)[吏部侍郞(리부시랑) 中樞院使崔沆(중추원사최항)] 급사중 중추원부사(給事中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 등은[給事中(급사중) 中樞院副使蔡忠順等(중추원부사채충순등)] 은대(銀臺 승정원)에서 숙직하다.[直宿銀臺(직숙은대)]

이 기정업도 현재의 우리와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계대를 못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분인 기언을 우리의 직계라고 가정을 하여 세계상의 시조 기순우와의 계대를 유추해 본다. 1세 기순우에 대하여 족보는 인종 때의 사람으로 평장사라고 하였다. 고려 인종은 서기 1123년에서 1146년까지 왕위에 있었다. 기순우 할아버지가 인종 때 사람이라는 것이 이 23년간에 벼슬을 했다는 것인지 태어났다는 것인지 애매한 면이 있다. 그런데 셋째손자  필선의 부인 진원군부인 오씨 할머니가 경남 고성군 옥천사(玉泉寺)에 소장된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의 제작비용을 시주했는데 그 시주기록이 남아있다.

기호철님이 찾아준 글을 인용한다.

옥천사임자명반자(玉泉寺壬子銘飯子)
고려 23대왕(고려 고종)의 환갑(環甲)이 되는 해인 임자년(고종 39, 1252) 4월 12일 개경[京師]에 있는 공인(工人)의 집에서 지리산(智異山) 안양사(安養社)의 반자(飯子)를 주조하여 만드니, 무게가 60여 근이었다. 함께 발원한 시주(施主)는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 손정렬(孫挺烈), 상서(尙書) 황보기(皇甫琦), 검교상서(檢校尙書) 유승석(兪承錫), 화엄종(華嚴宗) 삼중대사(三重大師) 승수(勝壽), 대선(大選) 경흥(景興), 지식(知識), 정지(正之), 돌아가신 상장군(上將軍) 기필선(奇弼宣)의 처인 진원군부인(珍原郡夫人) 오씨(吳氏), 낭장(郎將) 김백용(金伯龍)의 처인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최씨(崔氏),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 정상(鄭常)의 처인 해양군군(海陽郡君) 김씨(金氏), 학록(學錄) 주선의 처인 김씨, 비구니(比丘尼) 청혜(淸惠) 등입니다. 이들 근간(根幹) 외에 약간 시주한 사람도 매우 많기 때문에 모두 기록하지 않습니다.
공인(工人)은 별장동정(別將同正) 한중서(韓仲叙)이며, 동량(棟樑)은 도인(道人) 종일(宗一)이고, 책임자[負擔人]는 상좌(上座) 보심(普心)이니, 오래도록 사용하십시오.
高麗二十三王環甲之年壬子四月十二日在於京師工人家中鑄成智異山安養社之飯子入重六十餘斤 同願施主者樞密院右副承宣孫挺烈尙書皇甫琦檢校尙書兪承錫華嚴業三重勝壽大選景興知識正之故上將軍奇弼宣之嘉偶珍原郡夫人吳氏」郞將金伯龍之嘉偶樂浪郡夫人崔氏同丈院錄事鄭常之嘉偶海陽郡君金氏學錄朱䙋之嘉偶金氏比丘尼淸惠等此根幹外錙銖之單甚多故不具錄工人別將同正韓仲叙棟梁道人宗一負擔人上座普心使用長存」〔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下(1984)〕

고종 39년 서기로 1252년에 제작된 이 철북의 제작시기에 기필선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진원군부인 오씨 할머니가 시주를 했는데 할머니 나이를 70세 정도로 본다면 필선할아버지도 대략 1190년경에 태어났다고 가정을 할수가 있다. 그러면 아버지 수전 할아버지는 셋째 필선 할아버지를 대략 35세에 낳았다고 하더라도 1155년 정도에 태어나셔야 한다. 그러면 수전할아버지의 아버지 순우할아버지는 대략 1130년경 태어나시었다고 보아서 고려 인종 때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물론 추정이고 2세 수전할아버지가 윤위 윤숙 필선 필준 으로 4형제를 두었지만 앞의 두형제와 뒤의 두형제 돌림자가 다르다. 이는 어쩌면 어머니가 달라서 그런것 아닌가 추측도 해본다. 그래도 태어난 년도의 추정은 비슷하다.

기언이 후백제 통일전쟁에 참여한 년도가 서기로 936년이고 나이를 대략 30대 중반으로 본다면 900년경에 태어나신 것이 된다. 순우할아버지와는 대략 230년의 시간차이가 나고 한세대를 30년으로 치면 7-8세대의 차이가 난다.  그 중간의 6-7분의 선대 할아버지 기록을 찾는다면 고려 중기에 시작되는 족보의 기록을 앞당길수 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능성은 조상들의 지석을 찾는 것인데 유력한 인물은 기탁성이다.  기탁성(奇卓誠)은 의종을 호위하는 장교로 있다가 정중부의 구테타에 가담하여 세력가가 되고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하여 벼슬이 판병부사(判兵部事)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이때 최충헌을 조위총의 반란을 진압 할 때 발탁하였다. 20여년후 최충헌집권 후에는 그 보답으로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 수태사 문하시중(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에 추증되고 탁상에 초상화를 그린 액자를 놓고 제사를 지냈다.

태어난 년도의 기록은 없지만 죽은 년도는 1179년이다. 대락 60세 까지 살았다고 하면 1120년경에 태어난 것이 되어 순우 할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사신분이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에 묘에는 지석을 같이 묻었을 것이다. 고려사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 기록이 없지만 지석에는 대략 증조부까지 기록하기 때문에 아마도 잊어버린 6-7세의 조상과 연결할수있는 단서를 찾을 수있지 않를까 한다. 더불어 혹시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의 이름이 겹치는 기록이 나오는 순우 할아바지와 연결 할수있는 기록이 나온다면 하는 희망을 생각한다. 다른 분으로 2세 수전 할아버이다. 순우할아버지를 대동보는 이곡이 지은 영안왕 기자오의 행장에 근거하여 기록했다. 그러나 이곡의 영안왕 행장에는 수전할아버지가지는 보여도 순우할아버니는 없다. 다른 기록으로 기원의 아들 기완자불화가 기자오를 영안왕에서 경왕으로 추봉하는 칙서와 함께 가져온 구양현이 지은 비문이있는데 여기에 기록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 확인은 못했다. 하여간 수전할아버지의 문하평장사의 관직은 추증이 아니라 실직이기 때문에 지석이 있었을 것이다. 찾는다면 기탁성의 지석과 비교하여 세계를 찾을수있을 것이다.

추측이지만 무신난에 가담한 기탁성과 순우할아버지가 같은 시대에 사셨고 기탁성이 최충헌을 발탁했으며 최충헌과 수전할아버지는 송청의 딸들을 부인으로 맞이한 동서지간이고 최충헌은 윤위 윤숙을 부하로 거느리면서도 기홍수를 중용한 것으로보아 순우할아버지와 기탁성은 가까운 형제 4촌 아니면 6촌 사이처럼 가까운사이이고 기홍수는 기탁성의 동생이나 아들뻘이 되지 않을 까한다.

여기에서 고세계가 있지 않냐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것을 믿었지만 지금은 믿지 않는다. 노사선생이 언급하신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다른 역사책에도 나와야 할텐데 오직 우리 족보에 갑자기 나왔다는 것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백제와 신라 고려를 거쳐 왕들의 집권기간이 1년에서 몇십년까지 차이가 나는데도 그 자세한 집권기간은 무시하고 각시대의 왕들에 맞추어 대략 한명씩 인물을 배당하다보니 순우할아버지 앞으로 65세가 있다. 내가 순우할아버지로 부터 28세이고 최대로 32세까지 손자가 이어진 것에 비하여 1100년과 900년의 비례로 보아 두배의 세수는 믿을수가 없다. 그냥 그런 기록도 있다 무시해도 된다.

 

 

 

2-24-2013

 

기호철

 
승정원일기 영조 19년 8월 9일 (기미) 우리 가문에 대한 조정의 논의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검토와 주석이 필요하고 다 번역하면 30쪽 정도나 될 듯합니다. 잊지 않으려고 여기에 올려둡니다.


 初九日辰時, 上御養正閤, 親政。王世子陪座入侍時, 同副承旨李普昱, 記事官任師夏, 記事官吳彦儒, 吏曹判書鄭羽良, 參判元景夏, 參議任珽, 正郞尹得載·李彝章, 佐郞南泰耆·李永福, 列于東, 右副承旨鄭翬良, 假注書李聖運, 記事官鄭元淳, 兵曹判書徐宗玉, 參判魚有龍, 參議李鼎輔, 參知李命坤, 正郞李燮元, 佐郞韓光肇·趙台祥·趙明鼎, 列于西, 諸臣進伏訖。羽良曰, 今此都政, 各岐仕滿禁府都事·掌隷院·刑曹郞官, 各司久任相避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羽良曰, 守令多窠, 今當差出, 而擬望之人乏少, 未準朔人, 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羽良曰, 邊邑或災邑守令差出之際, 不可不擇差, 而在職中擬望之人乏少。他道未準朔有聲績人, 別擇備擬,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滿浦僉使, 今當差出, 而江邊重鎭, 不可不另擇, 堂下三品中竝擬, 何如? 上曰, 依爲之。宗玉曰, 今番兵批陞六者數多, 訓鍊主簿武兼, 當出二十三窠, 而見窠僅可爲二十, 其外三窠, 則當付司果矣。上曰, 鄕人多年積仕而無勢者, 若付司果, 則誠爲可矜。此則陞付實職, 宣傳官中三人, 司果出六, 宜矣。宗玉曰, 吏批雖出守令窠, 而次次遷轉之際, 將致夜深矣。上曰, 然矣。上曰, 虞人期獵, 猶不可失信, 況親政乎? 頃日大射禮時, 執事官承傳, 今番都政, 盡爲擧行, 可也。羽良曰, 當依下敎擧行矣。羽良曰, 四守令遷動, 固爲重難, 而四品人絶少, 郡守望, 無在職者, 難以備擬矣。上曰, 復職似好耶。羽良曰, 復職則難矣, 不得已以他守令備擬矣。上曰, 今番吏曹郞廳皆可合, 而漸似擇差, 恐有又弊, 不必甚擇好矣。羽良曰, 兩司望中, 自可擬差矣。上曰, 然而亦當稍別於兵曹郞官也。宗玉曰, 然矣。騎郞則可以東可以西者, 皆爲之矣。景夏曰, 騎郞則未通淸者皆爲之, 翰林出身亦爲之, 而吏郞則以有聖敎, 不敢擬望。吏郞今爲兩司通差之窠, 翰林獨未得擬差, 似爲班駁, 今後竝令通擬,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羽良曰, 蔭官參下, 大典以三十朔出六, 而皆計日出六, 自是三百年不刊之法, 而中間有計朔之謬例, 至於禁府都事, 自辛酉年, 又有計朔之規, 躁進之習, 誠可慨然。今後則參下蔭官, 毋論桂坊·禁都。又申計日出六之令, 永爲定式, 何如? 上曰, 依爲之。出擧條羽良曰, 繕工監役, 卽蔭仕出六之捷徑, 近年以來, 橫出之路太闊, 除拜數朔, 或半年圖差別工作, 輒爲陞六, 聞工判申思喆所言, 曾在先朝, 設都監外小小工作, 無得陞六事, 有所定式云。大抵都監則事體重大, 宜許陞六, 而恩典亦不可太濫, 躁進之路, 不可不塞。此後更爲定式, 設都監外, 他餘工作之陞敍出六, 一切勿許, 恐爲得宜, 故敢達。上曰, 所達誠是, 依爲之。都監外設或忘置定規, 而有所下敎, 政院據例達之, 可也。出擧條景夏曰, 臣則以舊制變通爲難矣。羽良曰, 此卽復古, 非變通也。上曰, 郞廳四人, 出草正書, 則似易矣。翬良曰, 然矣。上曰, 承旨書之。傳曰, 十考十上, 五考五上, 純褒抄啓守令·邊將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傳曰, 居官淸潔人之孫, 臨戰效忠人之孫, 錄用之命, 都政例也, 而亦作文具, 另飭兩銓。傳曰, 調用舊功, 而後可勸將來, 軍功調用, 都目每下, 而迄過十年, 人心狃解, 頃者相箚, 可以推知, 爲國效力, 文具調用, 更不檢擬, 人孰爲國樹力? 另飭兩銓。傳曰, 西北人·松都人調用事, 每都目申飭, 而作爲文具, 況親政乎? 另飭兩銓。翬良書畢。上曰, 高麗子孫調用事, 前旣下敎, 而三國子孫, 亦有之耶? 羽良等曰, 三國子孫, 多有之矣。上曰, 朱蒙子孫, 亦有之耶? 宗玉曰, 此則代遠, 未知其必有矣。有龍曰, 應有之, 而似或改姓矣。上曰, 箕子子孫, 改姓爲鮮于與韓哥矣。景夏曰, 韓哥則卽今京中大族, 皆其子孫也。奇哥亦有之, 而此亦兩班也。上曰, 嚴瑀, 頃以金枝玉葉, 謂之來歷不明, 而奇哥若是兩班, 則何不收用耶? 吏參當初除拜時, 有濟牧除授之敎, 而旣知有奇氏後孫, 不爲收用, 吏參推考。抄出擧條景夏曰, 臣爲湖南御史時, 薦奇珽龍, 而銓曹不用, 其後臣待罪銓官, 而其人已故, 不能收用, 心甚惜之矣。上曰, 李彝章, 亦曾經湖南御史, 奇哥之可合錄用者見之乎? 彝章曰, 湖南多奇姓人, 而可合錄用者, 未之見也。且箕子至箕準國絶, 而箕之改姓爲奇者, 臣亦不能的知矣。宗玉曰, 元景夏, 只經吏參, 收用儒生, 非其職也。上曰, 吏參異於兵參, 猶有收用之路矣。上曰, 朱蒙子孫, 果無耶? 卽今朱哥, 是其子孫耶? 羽良曰, 朱蒙子孫, 安知其尙爲朱哥乎? 上, 笑曰, 旣是朱蒙之後, 則寧有非朱哥之理? 景夏曰, 朱蒙之朱, 非姓而卽名百濟始祖溫祚, 卽朱蒙之子也。上, 笑曰, 豈其然乎? 仍命注書, 持入東國歷代摠目。聖運承命持入。上曰, 承旨披閱考達。普昱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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