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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2-11 04:55
행주와 기씨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392  
2004년 5월에 다음카페에 올린 글을 다시 옮겨옵니다.

고양시의 홈피에 가보면 우리의 행주기씨유허비를 소개하는 글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행주 기씨 비호(행주기씨유허비)
행주산성 북쪽 중턱에 위치해 있는 이 비는 행주 기씨의 행적과 업적을 담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을 보면 고려말 행주 기씨 집안에서 공녀로 뽑혀간 사람 중에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의 감찰기관을 폐지하고 원나라의 힘을 제거한 후에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유허비에 기황후 이야기는 나오지만 (원나라 황후가 되자 기씨는 그 세력을 믿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는 내용도 없지만 (친원파 세력들을 숙청할 때 행주 기씨의 관료 및 일가족이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 후 행주 기씨는 이 곳에서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은 더더욱 없다. 누군가 소설을 쓴 것이다.
지금 행주지역에 대대로 기씨가 살지않는데 기씨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산 것인가 생각해본다.

우리 기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왕건의 후삼국 통일전쟁에 기언奇彦 할아버지가 참여하신 기록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오는데 이것이 역사책에 기록된 가장 오랜 기씨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분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고 출신지나 다른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고려 중기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나 조선초기 고려실록을 요약한 고려사의 기록보다 더 오래된 기씨 기록은 영월흥령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에 나온다. 기호철님의 견해를 옮긴다.

[영월 흥령사 징효대사 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흥령사 옛터인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신라말의 선사 징효대사 절중(澄曉大師 折中:헌덕왕 18, 826~ 효공왕 4, 900)의 비로 보물 6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문인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해서로 썻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겨서 대사가 입적한 44년 후인 944년(고려 혜종 원)에 세웠다. 900년에 입적하여 906년에 시호를 내리고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어 924년에야 비문을 지었으며 다시 비의 건립은 ‘온 나라의 먼지가 멈춘’ 944년에 이루어졌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기에 선사들을 우대하는 비의 건립이 지연되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비문은 전면은 36행에 1행 81자, 음기는 29행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다. 비문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탄생하여 오관산으로 출가한 후 화엄을 배우다 도윤(道允)과 자인(慈忍) 등 선사를 만나 수학하고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수행한 이력과 헌강왕 정강왕 등의 우대를 받고 진성여왕이 국사의 예를 표하였으나 사양한 등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흥령선원을 중사성에 예속시킨다거나 명주 승정을 파견하여 일을 처리하는 등 중요한 사료가 들어 있다.
이 비에는 징효대사의 승속(僧俗) 제자들이 음기(陰記)에 기록되어 있다. 각 사주(寺主)를 필두로 정종(定宗)과 광종(光宗)이 되는 왕자와 고위 관료 수십 인과 명주(溟州) 등 각 연고 지역의 세력가와 확대된 삼강직이 열거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에는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인물도 있지만 여타의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이 가운데 고려초 원윤(元尹)벼슬을 하고 있는 기오(奇悟) 기달(奇達) 두 사람이 나란히 나타나고 있다. 원윤(元尹)은 936년(태조 19)에 제정하였는데 왕건이 태봉(泰封)의 위계(位階)를 본떠서 정한 것으로, 왕건의 직속 부하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왕권에 복속한 친고려적 정치집단인 호족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960년(광종 11)에 제정된 4색공복 규정에 의하면 원윤 이상의 관료, 호족은 자삼(紫衫)으로 정하였으며 976년(경종 1) 시정전시과(始定田柴科)의 실시로 원윤 이상은 18품으로 나뉘어 전시를 지급받았다. 또한 성종 때에는 원윤 이상에게 말을 하사하고, 문무관을 구분하여 정계(正階)를 주었다. 이렇게 볼 때 자삼은 관직을 가진 관료층을 포함하면서 원윤 이상의 관계만을 가진 호족층을 포함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종 때 중국식 문산계(文散階)가 들어와 관계와 같이 사용되다가 995년(성종 14)에 중앙관인의 관계가 전적으로 문산계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향직(鄕職)체제로 존속하였다.
기오(奇悟) 기달(奇達) 양인(兩人)이 제자들을 열거한 음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징효대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지녔던 인물들임에 틀림이 없으며 기오 바로 다음에 기달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자(父子), 형제(兄弟) 혹은 밀접한 친척(親戚)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모두 원윤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형제 혹은 종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진다. 이 비에 나타나는 인물들 가운데 고려사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고려의 건국공신들이며 대부분 명주, 죽주, 청주, 음성 일대의 호족들로 혜종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정종과 광종을 옹립한 세력들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기오 기달 2인은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으며 고려사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하기 어려우나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타나는 장군 기언(奇彦)과 무관하지 않은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기씨의 선대를 유추한다면 신라말 고려초 지방(아무래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의)호족으로 대체로 육두품 세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징효대사와 직간접으로 제자였다는 사실은 최소한 육두품세력 이상이었을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강성한 호족세력은 아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태조는 강력한 호족들은 혼인을 통해 회유했는데 이 대상은 아니었고 또한 비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8품계 가운데 6품에 속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금석문에는 기씨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인물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기씨 족보의 보완이 가능하다. 이러한 금석문을 조선시대 족보를 간행하며 확인하지 못하였던 것이 주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충주유씨이며 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의 아들들 정종과 광종의 세력으로 보나 비가 있는 영월 등으로 보아 처음 기씨는 충북의 중북부에서 강원도의 남부지역의 어딘가의 호족 출신으로 보이지만 언제 행주로 옮겨 관향을 삼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수없다. 고려 무신의 난후에  행주기씨를 고려 최고의 권력 있는 집안으로 끌어올린 기탁성장군에 대한 기록에도 행주사람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도 당연하지만 고려초에서 관향을 정하기 전부터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1450년 편찬된 세종실록의 지리지에서 고양현에 대하여 번거롭지만 고양에 대하여 알 겸 인용해 본다.

[고양현(高陽縣)은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에는,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때에 정한 것이다.]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조선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 부원현 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 계사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교하(交河)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15리이다.
호수가 6백 79호, 인구가 1천3백14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輻軍)이 65명, 선군(船君)이 20명이다.
고봉현의 토성(土姓)이 하나이니, 고(高)씨요, 망성(亡姓)이 4이니, 진(秦)·강(康)·송(宋)·전(田)씨이다.

행주의 토성이 4이니, 김(金)·기(奇)·은(殷)·전(田)씨이요,

망성(亡姓)이 7이니, 최(崔)·강(康)·부(夫)·즉(則)·고(高)·나(那)·차(車)씨이며, 내성(來姓)이 1이니, 이(李)씨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이며, 간전(墾田)이 6천3백26결(結)이다. [논이 좀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唐黍]·메밀·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살남초(殺男草)이다.
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성산(城山)[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劒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蜂峴)이 있다.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母岳)에 응한다.] 대자사(大慈寺) [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 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50결을 주었다.] 압도(鴨島) [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밭[草場]이다.]]

여기에서 토성은 대대로 살아온 성씨를 말하고 망성은 옛날에는 살았지만 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더 이상 살지않는 성씨를 말하고 내성은 옛날에는 살지않았는데 지리지 편찬 당시에 이주하여 살고있는 성씨이다. 행주에서 지리지 편찬 당시인 세종시대에 기씨는 토성(土姓)으로 나온다. 그때까지도 일부는 행주에서 대대로 살아오신 분들이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시대의 기록을 보면

[조선 연산 10년(1503) 4월 25일, 의정부 육조에서 광주 고양 등의 고을을 혁파할 것을 청하다. 의정부· 육조· 한성부· 대간· 홍문관을 불러, 광주(廣州)· 고양(高陽) 등 고을을 혁파할 것을 의논하게 하였다.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김감(金勘)· 이계남(李季男)이 먼저 빈청(賓廳)에 나가 의계(議啓)하기를, “두 고을에는 모두 선왕의 능침(陵寢)이 있으니, 혁파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천지간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그 죄가 난신(亂臣)과 다름이 없다. 앞서 어지러운 말하는 무리를 모두 중한 법으로 처벌하였는데도 완악하여 징계할 줄 모르고 서로 잇따라 나온다. 이것은 조정의 재상들이 모두 위를 능멸하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역시 위에 관한 말을 하는데, 지금 정승들의 의논이 이러하니, 내가 마음에 유감으로 생각한다. 전에 배목인(裵目仁)으로 인하여 구례현(求禮縣)을 혁파하였는데, 지금 지언(池彦) 등이 위에 관한 심히 해되는 말을 하였으니, 과연 무엇이 다른가? 이런 무리를 한결같이 극형으로 처벌하고 그 살던 고을을 혁파하면, 뒷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고을은 선왕의 능침이 있지만 어지러운 말을 한 백성이 있음으로 하여 모두 혁파되었다."하여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범하는 자가 드물게 될 것이다. 정승이나 재상들이 어찌 고금 치란(治亂)의 일을 알지 못하여 ‘광주와 고양은 능침이 있는 곳이므로 혁파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인가? 그 의논이 매우 좁고 또 그르다.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자, 유순(洵)이 아뢰기를, “지금 다시 생각하니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하였다.
연산 11년(1504) 7월 1일에는 이궁을 지으려고 주민을 몰아내고 금표를 세워, 들어가는 자는 기시에 처하다. 이로부터 동북으로 광주(廣州)· 양주(楊州)· 포천(抱川)· 영평(永平)에서, 서남으로는 파주(坡州)· 고양(高陽)· 양천(陽川)· 금천(衿川)· 과천(果川)· 통진(通鎭)까지 모조리 내보내고, 내수사(內需司)의 노자(奴子)를 옮겨서 채우고, 네 모퉁이에 금표를 세우고, 함부로 들어가는 자는 기시(棄市)를 하니, 초부(樵夫)· 목동(牧童)의 길이 끊겼다
연산 11년(1504) 7월 22일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는 이틀에 한하여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게 하다. 이제부터 모든 속절(俗節)에는, 금표 안에 무덤이 있는 자에게 이틀에 한하여 제사 지내러 들어 가는 것을 허가하되, 마구 다니지는 못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고양(高陽)· 양주(楊洲)· 파주(坡州)· 광주(廣州)· 영평(永平) 등지의 인가를 철거하고 금표를 세우니, 쑥대밭만 멀리까지 바라보이고, 인가는 볼 수 없었다. 사족(士族)· 서인(庶人)이 비록 무덤에 가서 제사 지내더라도 적의 지경에 몰래 들어가듯이 하여,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

이를 보면 그나마도 연산군이 고양군을 없애고 주민을 모두 내쫒아 사람의 거주와 왕래를 통제하고 궁안의 음식을 만드는 관청인 내수사의 종들로 하여금 내수사에서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식품재료를 경작하게 하는 외에는 사람이 살 수 없게 하고 연산군을 위한 사냥터로 만든 다음에는 모든 주민은 고향 땅을 등져야 했기에 그때나 지금이나 많지 않던 우리 기씨는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제사지내기 위해 이틀동안만 산소를 참배 할 수 있을 정도로 출입이 통제된 것이다.
연산군이 쫒겨나고 중종이 고양을 다시 복구 시켰지만 떠난 기씨는 다시 행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의 다른 기록에서 행주에 기씨는 토성으로 나오지 않는다. 일부의 성씨는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일부는 돌아왔다가 절손 되었는지도 모르다. 1982년판 임술보 범례 21쪽에는 1714년판 갑오보를 인용하여 행주산성아래에 기씨의 전답이 있고 여러 종손이 그 땅에 대하여 임대료를 받아갔다는 기록이 있으니 전답을 경작한 기씨는 없지만 18세기까지는 우리 기씨의 땅은 있었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행주부근에 묘소가 있는 분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조선 세종시대까지 행주산성부근에 살았던 이분들은 기씨의 아주 일부분으로 보인다.

그럼 대부분의 기씨는 어디에서 살았던 것인가?
대부분의 기씨는 개성에서 고위직의 벼슬하며 사신 듯 하다. 족보에는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 이전 분들의 묘소 기록이 거의 없고 오직 하나 기황후의 증조부 기홍영 전하(왕으로 추증 되었으니 공이란 경칭은 격에 맞지 않아 보인다)의 능이 우봉현 남쪽에 있다고만 나온다. 이 우봉은 황해도 금천군지역이다. 옛날에 농촌에서는 묘를 살던 곳에서 10리 이내에 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도회지인 개성부근 살았고 선산은 금천지역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 후에는 기황후의 예를 보면 처음 황후가 되자 황후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는 왕으로 추증하고 어머니 이씨는 삼한국대부인으로 봉하고 어머니의 고향 금마를 위대한 기황후를 낳게한 세상의 이익이 되는 곳이라고 익주로 올려서 오늘날의 익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낳았다. 황후의 고향(정확하게는 아버지의 고향)이 행주였다면 황후의 외가 동내를 이렇게 올려주었으니 행주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할 것인데 행주에 대한 기록들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기황후 때문에 어떤 혜택을 받은 것이 없다. 이는 기황후의 친가 고향은 개성이고 개성은 더 이상 올려줄 필요 없는 고려의 최고 지역인 수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황후의 집안은 이미 오래전에 행주를 떠나 개성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신돈과 함께 신해참화를 당하신 기현(奇顯) 할아버지를 보아도 신돈이 처음 개성에 와서 공민왕을 도울 때 자기 집을 구해나가기 전까지 기현 할아버지 집(기씨의 99%는 모두 이분 후손이니 쉽게 말해서 640년전 우리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것을 보면 기현 할아버지도 행주가 아닌 개성에 정착해서 사신 것을 알 수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아들 5형제 후손은 신해참화 후에 개성부근의 금천군, 재령군, 벽성군, 송화군, 개풍군 지역에 살고 일부는 장단을 지나 임진강 건너 파주군 송촌지역에도 산다. 연천이나 양주 회암사 부근에 기정승댁 묘소가 있다는 족보의 기록도 참고하면 선산의 위치도 알수있다.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났지만 행주가 기현할아버지 고향이라면 손자들은 행주로 돌아와 살아야 할 것인데 행주보다는 익숙한 개성부근에 정착한 것을 보아 기현할아버지 선대의 오래전에 개성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기현 할아버지의 장증손자(長曾孫子) 정무공 청파 할아버지는 조선을 따라 개성에서 서울로 이주하여 만리현 청파에 사셨는데 이 용산구 청파동 숙명여대 부근은 청파 할아버지가 사셨기 때문에 동내이름이 청파동이 된 것이다. 청파 할아버지의 증손자 복제 준할아버지가 기묘사화를 당하시자 참판공과 덕성군 두 분 형님이 장성으로 이주하셔서 오늘날 기씨의 대종을 이루는 장성과 광주문중이 되었다,

이로보면 고양시 홈에 소개된 것처럼 기황후의 가족이 화를 당한 병진참화로 기씨가 모두 행주를 떠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씨는 고려 시대 중기까지는 이미 대부분 고관이 되어 행주를 떠나 개성으로 이주해 사셨고 일부 남은 기씨들도 연산군에 의하여 행주에서 쫒겨나 지금은 행주에 대대로 살고있는 사람이 없다.

기광석 18-02-09 18:49
 
회근일가님의 글을 잘보앗습니다  역사에 깊지 못해 잘알지는 못합니다만은 회근 일가님의 글을 접하고 조금은 이해가 됨니다 우리행주 기씨의 역사를 잘 파해처서 종중원에게 전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해외에서 건강 유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