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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0-24 09:27
기삼연(奇參衍) 〈백석헌에 차운하다[次栢石軒韻]〉기호철님이 보내주셨습니다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274  

기삼연(奇參衍) 〈백석헌에 차운하다[次栢石軒韻]〉

소생의 늘어뜨린 머리 지금까지 검은데 晩生髫髮只今蒼
여기서 함께 가르침 받던 일 떠오릅니다. 感昔頻同鯉對堂
사랑채 덮은 동백 그늘 더욱 짙푸른데 覆屋栢陰靑勝黛
백석헌 숨결 잃고 서리 맞아 썰렁해라. 戴軒不氣冷侵霜
아끼던 물건과 고향은 길이 변함없건만 敬㘬桑梓長無替
문미에 편액이 걸려서 집엔 빛이 납니다. 扁入門楣奧有章
심사는 세한에도 철저히 바꾸지 않았으니 心事歲寒峭不轉
우리집 걸출한 분을 의지하고 우러릅니다. 依瞻宗黨白眉良

[해설]
호남창의대장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 삼종형(三從兄) 기양연(奇陽衍, 1827~1895)의 백석헌(柏石軒)에 차운한 시이다. 오늘날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하남 마을 행주 기씨(幸州奇氏) 제실(祭室)이 행주기씨 금강공종가로 종손 기양연의 백석헌이 있었다. 지금 제실 추선문(追先門)이 기양연의 사랑채였던 백석헌 터이다. 기양연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낼 때 사랑채 앞 큰 동백나무가 섬돌 위에 뿌리내려 자라므로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지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는 뜻을 드러내어 백석헌이라고 이름 지었다. 기씨 종가는 기효간(奇孝諫, 1530~1593)은 인재(忍齋)라고 했고, 기양연의 고조부 기태온(奇泰溫, 1738~1787)은 막내아우 기태검(奇泰儉, 1757~1795)과 함께 공부하며 이정(二程) 즉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처럼 되기를 기원하며 망정와(望程窩)라고 당호를 붙였으며 그리하여 기씨 종갓집을 이정(二程)이 살았던 하남에 비겨 하남정사(河南精舍)라고 하여 오늘날 마을 이름이 하남이 된 것이다. 기태검의 아들 기재선이 하남정사 100미터 남짓 아래쪽에 집을 짓고 입재(立齋)라고 하였으며 그 손자 기삼연이 이를 성재라고 하였다. 기삼연의 이 시는 기씨 종가에 친필본으로 보관되어 있는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기삼연은 초서를 잘 썼다.
5행의 ‘㘬’은 ‘요(坳)’ 또는 ‘물(物)’과 동자(同字)이며 ‘불(佛)’의 이체자(異體字)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물(物)로 쓰였다.
8행의 백미량(白眉良)은 재능 있는 형제 중에서 가장 걸출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삼국 시대 촉(蜀)나라 마량(馬良)의 다섯 형제가 모두 걸출한 가운데 마량이 그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면모를 보였는데, 그의 눈썹에 흰 털이 있었으므로 백미라고 불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三國志 卷39 蜀書 馬良傳》 기삼연은 삼종형이 종당(宗黨)에서 마량처럼 걸출한 분이라고 한 것이다.

첨부한 사진이 성재의 친필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