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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3-15 01:04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신문논평
 글쓴이 : 기회근
조회 : 1,853  
경향신문 : "강 위의 이별은 꿈결처럼 아득했습니다. 선생님이 길 떠나는 모습을 들으니, 슬프고 그리운 마음 갑절이나 더 했습니다. 가까이 모시지 못하게 되었음을 생각할 적마다 마음이 절로 슬퍼집니다"(고봉)

"동호(東湖)의 배 위에서 나누었던 정이 꿈결 속에 되살아나니 봉은사까지 따라와 나누었던 하룻밤의 뜻이 더욱 깊게 느껴집니다. 서로 취해 말없이 바라보며 천리의 이별을 다 이루었습니다"(퇴계)

어떤가. 마치 불같은 사랑을 나눈 연인들의 이별장면 같지 않은가. 하지만 그리 생각한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일 터. 1569년 3월4일 벼슬에서 물러난 퇴계가 낙향하는 길에 동호의 몽뢰정에서 묵은 뒤 다음날 한강을 건넜다. 위의 대화는 당시 퇴계를 배웅했던 고봉과 떠나간 퇴계가, 이별의 순간을 반추하며 주고 받았던 편지이다. 69세의 퇴계와 43살의 고봉이 나눈,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

1558년(명종 13년) 32살이던 고봉(기대승)은 과거길에 '감히' 성균관 대사성이던 퇴계를 찾아간다. 요즘으로 치면 고등고시 합격생이 국립대 총장을 무턱대고 찾아간 셈이니 그 얼마나 만용에 가까운 객기인가. 그런데 퇴계는 이 새파란 젊은이가 제기한 철학적인 논쟁에 기꺼이 마음의 문을 열고는 첫번째 편지를 쓴다.

"선비들 사이에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대의 논박을 듣고나서 (제가 전에 말했던 것이) 더더욱 잘못됐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쳐봤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러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1559년 1월5일 퇴계의 편지)

인간미 넘치는 대화와 사단칠정 등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담긴 두 대학자의 편지는 무려 13년동안 100편으로 이어졌다. 세대간의 장벽과 영·호남(퇴계는 안동, 고봉은 광주)의 지역적인 한계, 직위와 경륜의 장애를 뛰어넘는 애정이 듬뿍 담긴 대화. 한국지성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이라는 평가는 전적으로 옳다. '제대로 된 논쟁과 지적인 우정을 모르는' 오늘날의 지성인들이여 한번 두 분의 편지를 읽어보라.

"요즘, 사람들이 그대가 세상을 업신여기고 다른 이들을 낮추어 보며 말을 삼가는데 모자라고 몸을 단속하는데 소홀하다고 말합니다. 힘써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듣건대 다시 술을 굳게 다스리지 못해 큰 병이 나겠다고 하니 무슨 까닭으로 이런 평판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제가 사람을 잘못 천거했다고 다투어 말합니다"(퇴계가 자신이 천거한 고봉을 꾸짖는 편지)

"선생님께서 고친 도설(圖說)에서는 오른쪽과 왼쪽을 바꾸었고 나와 남을 구분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멋대로 상상하는 폐단을 키우니 도리어 의리를 더 흐리게 하고 후배학자들에게 허물만 될까 두렵습니다"(퇴계가 고친 '심통성정도'를 비판한 고봉의 편지)

두 분은 서로에 대해 이처럼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얼마나 칼날같은 비판인지 읽는 이마저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 하지만 고봉이 "인사고과에서 '하고(下考·인사고과에서 낮은 성적)'를 받아 손가락질 받는다"고 하자 "하늘이 그대를 더욱더 완전하게 하려고 시련을 준 것"이라고 위로한 퇴계와 "벼슬을 그만두고 싶다"고 토로하는 퇴계에게 "요즘같은 때에 진실로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된다"고 충고하는 고봉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된 우정의 얼굴을 엿볼 수 있다.

두 분의 편지를 아주 쉬운 말로 풀어낸 옮긴 이의 노고는 가상하다. 다만 간간이 편지글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황을 함께 풀어주는 수고까지 겸했다면 (이 책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의 출간은) 더욱 대중적인 시도가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를 갖고 이 책을 더듬어 가면 두 분이 그토록 사색하고 토론하고 탐구했던, 동아시아 유고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적인 논쟁인 '사단칠정론'을 어렴풋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 그 얼마나 큰 행운인가. 조선조 중기 지식인의 애환이나 그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행운까지 덤으로 잡을 수 있고.... - 이기환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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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먼길에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

1558년 지금의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고봉)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는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옮긴이는 두 사람의 오랜 편지를 모아 현대어로 정성스럽게 풀어놓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 접대하는 일이 자못 괴롭고 번거로운데 병까지 들어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지쳐, 전에 배운 것은 아득하고 새로 배운 것은 거칩니다. 그래서 도학(道學)에 정진하고자 하는 평소의 뜻을 아주 저버리게 될까 매우 두렵고, 옛사람에게 미치기 어려움을 깊이 한탄합니다."(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퇴계)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치밀한 사고력을 가졌던 고봉은 학문과 입신출세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고봉의 강직한 성품과 재능을 알아보았던 퇴계는 그에게 두 길을 함께 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실제로 선조에게 고봉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다.

군왕이 내린 관직을 함부로 사양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사직'하는 일이라면 사실상 퇴계가 '선수'였다. '학문'의 길을 결심한 퇴계 자신은 1549년에 사임장을 올리고 낙향한 뒤, 끊임없이 내려지는 관직에 대해 사망하던 해까지 총 53회의 사직서를 올리며 학문의 길을 지켰다.

"만일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뜻에 문제가 있어 후학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봉)

"저도 사단칠정에 대한 정지운(鄭之雲)의 분별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논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선, 즉 '순선(純善)'이나 '기를 겸한 것(兼氣)' 등의 말로 고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친 것은 서로 도와 가며 밝혀 보려는 의욕에서였지, 결코 그 고친 저의 말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퇴계)

조선시대 지식인사회의 최대 논쟁이 된 사단칠정론은 1559년 30대 초반의 청년학도였던 고봉이 대학자로 존경받던 50대 후반의 퇴계에게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둘 사이에만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 논쟁은 그 후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논쟁을 거쳐 조선 지식인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이는 성리학에서 기본 개념인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심리작용을 논하는 문제였고 이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은 심성론(心性論) 분야에서 중국 성리학을 능가하며 독특한 학풍을 이루게 된다.

"책을 보다가 잘 모르는 것이 있어 별지에 적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 논변에 비할 것은 못되니 답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퇴계)

퇴계는 공부하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26세나 연하인 고봉에게 서슴없이 물었고, 고봉은 또한 열심히 그 문제의 답을 찾았다.

"생각을 다해 자세히 회답할 수 없었으니, 부끄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퇴계)

1570년 11월 퇴계는 고봉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다음달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고봉은 1572년 40대의 젊은 나이에 퇴계의 뒤를 따랐다.

13년의 세월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서, 삶의 무게와 생각의 깊이와 묵은 체취까지 느낄 수 있는 '편지'의 맛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e메일과 문자메시지의 경박단소(輕薄短小)한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진 시대,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됐다. - 김형찬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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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 : "세상 살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의 놀림과 배척을 면치 못하고, 끝내 몸이 위태로워지거나 뜻을 억눌러야 하는 데에 이르게 됨을 볼 수 있습니다. 한탄스럽고 한탄스럽습니다 ."

16세기 중반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른 고봉(高峯) 기대승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퇴계(退溪) 이황에게 편지를 보낸다. 학문과 벼슬, 인생의 가치 등을 놓고 고민하던 젊은 선비의 편지를 받고 퇴계는 답장을 쓴다.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 아무에게도 속지 않을 만큼의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소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에 수록된 내용이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처음 만난 건 1558년 명종 13년 10월이었다. 기대승은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처음으로 이황을 찾아갔고 그해 12월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편지는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동안 계속됐다.

당시 이황의 관직은 성균관 대사성이었다. 지금으로치면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이다.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때였으니 고시를 통과한 연수원생쯤 됐을 것이다. 나이는 이황이 58세, 기대승이 32세로 26살의 차이가 났다. 지역적으로 보면 이황은 경상도 출신이었고, 기대승의 고향은 전라도 광주였다.

기대승은 당대 최고 권위의 학자에게 자신의 철학적 소신을 거침없이 제기했고 이황은 기대승이 보내오는 편지에 성심성의껏 답장을 썼다. 둘의 편지는 때로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 때로는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담겨 있었다. 계층과 나이, 지역을 모두 뛰어넘고 이어진 두 지성인의 학문과 삶에 대한 고민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있게 `그렇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이 책은 편지 한 장 써본 지도 까마득한 우리들에게 `자기반성`이라는 숙제를 남겨준다. - 허연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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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 책을 번역한다는 것은 새로운 해석을 수반하는 새로운 창조 행위다. 때론 새로운 사상을 형성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역한 구마라집이라는 중국 역경사의 천재없이 당·송대 중국 불교가 그렇게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었던가를.

신간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으로 유명한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1527~1572) 사이에 오고간 100여통의 서한을 번역한 것이다. 이 편지가 조선 유학사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인만큼, 이미 충실한 번역서가 많이 나와있다. 관련 저서와 논문까지 합치면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책을 머리에 올리는 이유는 옮긴이가 '번역'을 통해 퇴계와 고봉의 왕복 서한을 완전히 새로운 책으로 재탄생시키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옮긴이 김영두(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씨는 사칠 논쟁에 가려 유학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렵던 이 서한집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교양서로 탈바꿈시켰다. 최근 보기 드문 번역의 성과다.

보자. 한국 지성사에 가장 빼어난 학문 논쟁의 기록인 서한집은, 조선조 선비의 우정이 무릇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영혼의 교류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책은 조선조 선비의, 나이와 세대, 직위와 경륜, 지역의 한계를 모두 뛰어넘은 우정이 어땠는지를 감동스럽게 펼쳐 보인다. 이 과정에서 과거길에 올랐던 애송이 청년이 당대의 석학 퇴계를 찾아가 자신의 철학 소신을 펼친 것도 대단하지만, 놀라운 것은 퇴계의 대응 방식이다.

"황은 머리 숙여 두번 절합니다…. 그대의 편지를 기다린 지 오래…. 이제 천리 먼길에서 사람을 보내 제글에 대한 가르침과 아울러 틀린 곳을 바로잡은 책 한권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에 관한 논변이 넉넉하고 자세하여 길 잃은 이를 이끄는 그대의 염려가 남김없이 베풀어 졌습니다."

이것이 과연 성균관 대사성이던 58세의 석학이 이제 갓 과거에 합격한 32세의 청년에게 보낸 편지인가. 이미 서로의 빛나는 영혼을 감지한 이들에게 나이나 경륜, 직위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벼슬길에 오른 사람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처세의 어려움을 나누고, 학자와 관료의 길을 병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한다.

이 책을 통해 조선조 선비의 철학과 정신 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일상사를 손으로 만지듯 전하는 것은 책의 또 다른 성과다. 고봉은, 처음 벼슬길에 오른이가 치르는 통과의례인 면신례에서 겪은 모욕과, 총명하던 일곱살 짜리 아들을 잃은 아픔을 편지에 쓰며 위로 받았고, 퇴계는 아버지 묘석의 명문을 고봉에게 부탁할 만큼 고봉에게 의지한다.

그렇다고 책이 본래 가치인 사칠 논쟁을 가볍게 다루는 것도 아니다. 논쟁을 벌이면 으레 인식공격이 가해져야 논쟁인줄 아는 요즘의 지식인들은 책을 보며, 진정한 논쟁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무엇이 책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책의 체제다. 옮긴이는 편지를 모두 날짜 순으로 싣되,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학문을 논한 편지'는 제2부에 주제별로 따로 편집했다. 이런 시도는 사소한 것 같지만, 고급 논쟁에 가려 읽기 어렵던 편지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멋진 서한집으로 재탄생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주목할만한 것은 책이, 이제 막 학문의 세계를 본격 항해하기 시작한 30대 중반 젊은 학자의 첫 번역 작품이라는 것이다. 옮긴이 김씨는 한글 세대 특유의 감수성과 탁월한 우리말 구사능력으로, 의고체 문장속에 갇혀 있던 두 선현의 내면과 일상사를 섬세한 현대어로 풀어낸다.

글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한 의역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학문적인 엄밀함은 다소 떨어지나, 책이 교양서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이 책으로 인해, 우리는 잘된 고전 번역 목록에 또 한권의 책을 추가하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작품성 ★★★★★ 대중성★★★★, 만점5개) - 김종락 기자 ( 2003-0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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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 "삼가 여쭙니다. 하루하루 지내심이 어떠하신지요? 우러러 그리는 마음 자못 깊습니다. 저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출근했더니 감기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물러나려 해도 할 수가 없어 부질없이 스스로 슬퍼할 뿐입니다.(중략) 이처럼 오랫동안 찾아 뵙지 못했으니 슬퍼하고 한탄한들 어찌하겠습니까? 후학 대승은 절하며 올립니다."

"절하며 답합니다.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병을 무릅쓰고 입직하고 있다니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고친 시구는 뜻이 깊고 가락도 맞습니다. 옛말에 시는 고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황."

연하장, 청첩장처럼 인사치레나 연인에게 쑥쓰러운 감정을 낭만적으로 전하는 유효한 수단으로나 쓰일 뿐인 편지가 이전에는 반가운 사람과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단지 일상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학문적 논쟁의 터전이었고 자기 성숙의 매개체'였다. 편지를 통해 옛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었으며 상대방의 내밀한 의견을 접수해 자신과의 합일점을 찾아나갔다. 그래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에는 유난히 편지들이 많다. 또 그러한 편지들은 오늘날 그 시대의 생활뿐 아니라 사상의 전개, 가치관, 정치적 지향 등을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유효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황(1501∼1570)의 '퇴계집'과 기대승(1527∼1572)의 '고봉집'에 실려 있는 편지 내용을 발췌-번역 정리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두 성리학 거두의 학문적 깊이와 고민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하지만 더욱 이 책이 와닿는 것은 편지라는 형식에 담긴 두 사람의 인간적 교분과 살가운 대화다. 조선 성리학의 완성자라는 박제화된 모습으로 남아있는 두 사람을 이 책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의 표현에 인색하지 않았던 정겨운 친구의 모습으로 복원한다.

26살의 차이가 났던 두 사람은 서로를 알게 된 해인 명종 13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난 선조 3년까지 13년 동안 10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32살의 나이로 과거에 갓 합격한 패기와 열정을 갖춘 젊은 학자인 고봉과 58살의 대학자로 지금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되는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가, 나이와 직위, 경륜, 지역을 초월하여 성리학의 주요 문제와 개인적 안부로 1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편지 왕래를 계속한 것이다. 자신이 가진 철학적 소신을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하는 기대승의 파격적 모습도 놀랍지만, 그러한 청년에게 마음을 열어 진정으로 논쟁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자신의 학문적 주장을 굽힐 줄도 알았던 퇴계의 모습 또한 의연하다.

이 책은 두 사람의 인간적이고 대학자다운 풍모뿐 아니라 편지를 통해 조선시대 지성사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것에도 큰 의미가 있다. 몇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서서히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사림의 긴장된 분위기와 성리학적 질서를 일상에 체화한 선비들의 생활관습,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단칠정론'이라는 주체적인 성리학을 완성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다. 매끄러운 번역과 깔끔하게 정리된 구성에 담긴 세대간, 사제간, 학자간의 열린 대화는 오늘날 새삼 고매한 인품과 단아한 지성에 대해 돌이켜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된다. - 송민섭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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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이 책에는 원문이 없다. 그게 없으면 좀 불안하다. 이웃 교수의 방에 있는 고봉집을 찾았으나, 문이 잠겨 있어 포기했다. 책을 읽어내려가다가, 어느 순간, 내가 원문을 찾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드문 경험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익숙한 것부터 손이 가는 법이라, 2부 ‘학문을 논한 편지들’부터 읽었다. 이른바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유명한 철학적 논쟁이 담긴 부분이다. 논의는 인간의 심리적 정서적 의지적 표출의 구조와 가치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퇴계는 종교적이고, 고봉은 미학적이다. 노인 퇴계는 보통의 인간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산다는 비관 위에 서 있고, 젊은 고봉은 삶에서 생기는 갈등과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는 낙관 위에 서 있다. 그래서 퇴계는 칠정 너머에서 사단을 그리워하고, 고봉은 칠정 속에서 사단을 찾아내려 한다.

퇴계는 탁한 정치판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면을 볼 대로 본 사람이었고, 고봉은 이제 갓 출사한 신진 기예였던 것도 그런 차이를 낳았을 것이다. 이 논쟁은 주지하다시피 그 이후 율곡과 우계와의 논쟁으로 이어졌고, 조선 유학사의 일대 공안이 되었다. 이 고민은 지금도 유효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책에는 고봉이 다른 학자들, 가령 항재 이항과 하서 김인후와 나눈 철학적 논쟁도 실려 있다. 고봉은 항재에게 그런 소리는 남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힐난했고, 항재는 고봉이 고집이 너무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맞받았다. 퇴계는 항재의 공부가 편협하다면서도 고봉 또한 익지 않은 주장을 자의적으로 늘어놓는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다시, 사단칠정에 대한 둘의 생각은 서로 다르다. 고봉은 퇴계가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퇴계는 고봉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퇴계는 더 이상의 논쟁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놀란 고봉이 고집을 접음으로써 논쟁은 끝났다. 둘의 우정은 바로 그 지점, 논쟁을 포기한 곳에서 출발한다. 둘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지만, 조선 유학을 위해서는 슬픈 일이기도 하다.

1부 ‘일상의 편지들’은 그렇게 끈끈하고 간절한 둘의 관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일상의 기거와 벼슬살이의 어려움, 학문의 수련, 경전에 대한 의문, 현실 정치의 비판 등에 대해 그들은 각자의 생각과 우려를 토로하고 서로 위로한다.

독자들은 이 편지들을 통해 조선의 선비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졌으며, 무슨 문제를 고민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접근했는지,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어떤 곤경을 만났는지를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그동안 퇴계와 고봉에 관해 쓴 논문들은 많이 있다. 소문이 무성하면 실상을 가리듯, 논문이 많아지면 주제를 도리어 가리기도 한다. 직접 대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동안 적절한 안내를 해주지 못했는데, 이번 책은 그 아쉬움을 일거에 털어주었다. ‘쉽고 아름답게’라는 번역자의 기염 덕에, 우리는 원문에 조회하지 않고도, 허리를 펴고, 조선의 대표적 문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한형조(정신문화연구원 교수)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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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서양 학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앙숙 관계에 있는 두 학자가 사적으로는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학술에 대해 그토록 반론을 펼쳐온 상대 학자를 자신이 학과장으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추천해 자기 학과로 초빙한 예도 있다.

이런 일은 조선조의 선비 세계에서도 흔히 있었던 일이다. 이번에 출간된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조선조 선비 문화의 아름다운 진면목을 보여준다.

16세기에 활동한 퇴계 이황(1501~70)과 고봉 기대승(1527~72)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제를 놓고 8년간 논쟁을 벌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의 학계나 공직 사회에서 본다면 이 두 학자 간의 관계는 표면상 쉬 이해가 안 가는 면이 많다. 스물여섯살이나 나이 차가 나는데다, 당시 퇴계는 중앙 학계 대학자였던 반면 고봉은 막 고시에 합격한 새내기였다.

그 두 선비가 논쟁을 벌인 것이나, 13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조선조 선비문화의 성숙한 문화 코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의 대본이 된 원문은 민족문화추진회 등에서 '국역 고봉집'등으로 이미 국역된 바 있다.

하지만 그 국역본들을 지금 시중에서 구하기는 어렵고, 설사 구한다 해도 읽어내기에 적잖이 버거운 형편에서 두 선비의 편지를 새롭게 정리해낸 작업은 평가할만한 대목이다.

본디 번역은 20~30년 간격을 두고 '그 시대의 언어'로 재번역돼야 하는 법이 아니던가. 이번 책은 두 대학자가 13년간 주고받은 1백14통의 편지를 주로 날짜 순으로 재정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또 본격적인 학술적 논쟁은 책 뒤편에 따로 빼서 정리하는 입체적 방식을 통해 무엇보다 편안하게 읽히는 가독성(可讀性)을 염두에 뒀다.

따라서 사단칠정 논쟁 자체에 대한 정교한 인식은 이 책을 읽어내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말하는 사단(四端)과 희로애락애오욕(七情)가 과연 이(理)가 나타나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기(氣)의 작용에 따른 것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중 퇴계가 새까만 후학인 고봉의 날카로운 견해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어느 선에서 절충.정리가 됐다는 점도 결정적인 것이 아닐지 모른다.

다만 두 사람의 논쟁이 훗날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의 사상적 대립으로 번져 조선조 최대의 거대 논쟁으로 발전했고, 그것은 흔한 몰이해대로 공리공담이 아니라 조선조 선비문화의 꽃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둘 일이다.

과연 퇴계와 고봉의 편지는 정중한 일상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양보없는 학문의 멍석이기도 했고, 그것은 요즘 인터넷 시대 혀 짧은 언어로 주고받는 e-메일과는 상당 부분 달랐다는 점도 음미해볼 일이다.

또 하나 독자가 미리 알아둘 참조 사항의 하나로 퇴계와 고봉이 사제 간은 아니었음을 말해두고 싶다.

전통의 학계에서 사제 관계는 쌍방의 합의에 의한 일종의 계약 관계여서 한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제 관계는 성립되지 못한다.

훗날 퇴계를 하늘처럼 떠받들던 일부 후학들에 의해 퇴계와 고봉이 사제 관계인 것처럼 억지를 쓴 적이 있으나 퇴계와 고봉은 도를 같이 하는 차원높은 '도우(道友)의 관계'일 것이다. - 김기현<유교사상연구소 책임연구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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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 처음 만나 편지를 섞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 차는 스물여섯. 퇴계는 일가를 이룬 쉰여덟 살의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두 살의 신출내기 선비였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조선 중기를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이다. 기왕에 나와 있는 국역본이 국한문 어투인 데 반해, 이 책은 한글 세대들이 술술 읽을 수 있게 꼼꼼히 정갈한 우리말로 옮겨졌다. 편지 왕래는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이 상경해서 퇴계를 처음 만나던 해인 명종 13년(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난 선조 3년(1570년)까지 16세기 후반 13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책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넘나들었던 조선의 두 지성의 교유의 기록이자 “바야흐로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깊은 곳까지 내면화되어가는 조선 중기 사람들”의 내면 풍경과 그들의 풍속,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다. 이들의 편지는 관직에 있을 때는 서울에서 오갔지만, 주로 이황은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기대승은 전남 광주에서 절박한 심정과 논변들을 인편으로 부친 편지들을 통해서 토해냈다. 오늘날의 ‘정서’를 과거로 소급시키는 우를 범하면서 말한다면 이 책은 영호남 지식인(정치가)의 ‘정치적 연대’의 기록이라고도 할 만하다.

편지 왕래 13년 가운데 첫 8년 동안 벌어진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1175년 주희(주자)와 육상산의 역사적 논쟁조차도 여기에는 거의 비교될 수 없을 것”(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소장 뚜웨이밍 교수)이라고도 평가된다.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로 있는 옮긴이 김영두씨는 “한국 유학이 단순히 주자학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단계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우리는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참신한 지적 충격’ 속에서 만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조선의 ‘두 지성’ 간에 벌어졌던 사단칠정 논쟁의 전말을 세세히 접한 바 없는 일반 독자라면, 이들의 편지가 패기방장한 청년 성리학도가 일가를 이룬 스승에게 물음을 구하고 답을 받는 방식이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편지 교류를 시작한 퇴계의 두번째 편지를 들여다보자. “그대의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인 까닭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기대승의 답신은 이렇다.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 이들은 본래 구분이 있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서 나눌 수 없습니다.…모름지기 이는 기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스스로 발현된 것이 이의 본래 모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행간에는 후학으로서 예가 극진하지만, 기대승은 자기 입장을 굳건히 세우고 논변을 이어간다. 반면 이황은 논리적으로 후학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여준다.

성리학에서는 만물(사물)을 ‘이’와 ‘기’로 설명하는데 이는 세상의 원리이고 기는 그 이치가 구현되는 물질적 실체라고 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론은 이와 기를 통해 인간의 마음(심성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설이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대승은 이기이원론에 반대했다. 그는 인간 감정을 연원에 따라 갈라놓기보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퇴계가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고 나누어 도식화시켰다면, 고봉은 사물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통일적으로 바라본 셈이다.

그렇지만 기대승의 관직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신진 사류의 주동자(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파직당하는가 하면 조광조 등 ‘사화’로 희생된 사림의 복권을 역설하는 등 그의 “기개는 너무나 강경하고 주장은 예리했”다. 이황은 이를 염려해 “세상을 일구는 데 너무 용감하지 않을 것”을 타이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기대승은 퇴계가 타계한 지 이태 만에 마흔여섯의 이른 나이에 객사했다.

이 책에서 “삼가 절하고 적습니다”(기대승)라든가 “황이 머리 숙입니다”(이황) 따위의 당시 편지글의 예의를 접하는 것도 흥미롭다. 편지의 내용도 ‘둘째 아이가 죽었음을 알립니다’(고봉)처럼 각기 자신의 일신상의 괴로움 토로에서부터, 사화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당시 분위기 속에서 목숨을 운위할 만큼 정치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의견 교환, 왕실의 의례 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이황은 기대승이 조정에서 이황의 중용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리 두 사람 사이는 뻔질나게 오가며 서로를 좇는 것이 이미 별나게 여겨지고 있는데, 누가 그대의 말을 공정하다고 믿겠습니까” 하고 질책한다.

이들의 편지에는 상례, 제례에 관한 의견교환도 다수 들어 있다. 퇴계와 고봉은 당시 맏며느리(남편을 잃은)가 제사를 주재하는 일반의 세태에 반대하는가 하면 조상 제사를 자손에게 전해 이을 때 부계(父系)로만 해야 된다는 확고한 주장을 서로 확인하고 가다듬는다.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 들어 ‘남존여비’사상이 심화한 것은, 일반의 세태와 풍속마저도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 했던 이들 남성 성리학자들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음이다. - 허미경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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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 이제 막 고시에 합격한 32세의 신출내기 젊은 관료가 조직의 수장인 장관을 향해 "최근 정책현안에 대한 장관의 생각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제 생각으론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라는 요지로 직격탄을 날린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관은 젊은이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당황하거나 불쾌해 하기는 커녕 친절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정견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편지로 화답한다. 지금으로부터 4백50여년전 조선시대 명종13년(1558년)때 실제 이같은 일이 있었다.

논쟁의 주인공은 당대 지성계의 거목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었다. <퇴계와 고봉,편지를 쓰다>는 두 사람사이의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소위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으로 알려진 당시 지성계를 뒤흔든 대논쟁에서부터 서로에 대한 안부,일상생활에서 느낀 점등을 두루 담은 책이다.

토론 당시 퇴계는 오늘날의 국립대학 총장에 해당되는 성균관 대사성으로 나이는 58세였다. 반면 고봉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처지로 32세에 불과했다. 고봉의 논쟁제기로 촉발된 두 사람의 편지내왕은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13년간에 걸쳐 지속됐다.

서로의 빛나는 정신을 감지한 두사람에게 나이나 직위등 세속적인 통념은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평생을 학생이라 자부하던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자기완성"이라는 숙제는 대학자나 청년학자 모두에게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봉은 퇴계의 학문적 권위에 눌리지 않고 예리하게 자신의 논지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대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잃지 않았다. 때로 자신의 신상문제를 숨김없이 토로하며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고봉의 나이 44세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경상도 안동에 살았던 퇴계와 전라도 광주에 살았던 고봉의 아름다운 관계는 오늘날 영.호남 지식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김재창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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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지난주 소개한 신간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김영두 옮김, 소나무 발행)가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다. 10일 나온 1쇄 3,500부가 책방에 깔린 지 사흘만에 거의 다 팔려 18일 2쇄 5,000부를 찍은 데 이어 곧 3쇄에 들어가 늦어도 28일까지 5,000부가 더 나올 예정이다.

국내 최대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는 18, 19일 이틀간 품절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 책은 인터넷서점 예스24와 알라딘의 인문 분야 베스트셀러 1위, 오프라인 교보문고에서 3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문 고전 번역물이 20여일 만에 3쇄를 찍고 베스트셀러 꼭대기에 오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책을 낸 출판사도 깜짝 놀라고 있다.

이 책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 황과 26세 아래인 고봉 기대승이 13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옮긴 것으로, 나이와 직위를 떠나 진실한 벗으로 사귀었던 아름다운 우정의 기록이다. 두 사람은 편지로 안부를 묻고 '사단칠정론'을 비롯한 학문적 논쟁을 벌였다.

결코 대중적이지 않을 것 같은 이 책이 독자를 사로잡은 것은 400여년 전 한문 편지를 아름답고 쉬운 우리말로 풀어낸 번역의 공이 크다. 딱딱하고 고루한 기존 번역과 달리 이 책은 한글 세대의 감수성이 빛나는 반듯하고 기품 있는 문장을 선보이고 있다.

2년 동안 꼼꼼한 손길로 책을 만든 편집자의 정성도 지나칠 수 없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일상의 편지와 학문을 논한 다소 어려운 편지를 1부와 2부로 따로 묶은 것이며, 각 편지의 끝에 붉은 인장을 새겨 보낸 이를 표시하고 각주 번호를 본문 활자와 다른 색깔로 표시한 데서 독자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느껴진다.

인쇄 용지도 특별하다. 보통 모조지보다 얇고 가벼우면서도 인쇄가 선명하고 종이 색이 부드러운 ?아이프라임? 지를 써서 600쪽이 넘는 책이 350쪽 정도 밖에 안 돼 보인다. 책이 너무 두꺼우면 거부감을 갖지 않을까 고심한 끝에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책도 독자가 외면하면 무슨 소용이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잘 쓰고 잘 만든 책과 그것의 진가를 알아본 독자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는 보기이다. 책값이 2만5,000원으로 비싼 편인데도 말이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제대로 번역된 고전에 그만큼 목말랐다는 뜻도 되겠다. 이를 계기로 제 2, 제 3의 ?퇴계와 고봉…?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 오미환 기자 ( 2003-0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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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 조선 명종 때인 1558년 10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와 있던 퇴계 이황(1501~1570)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고봉 기대승(1527~1572)이었다. 이 첫 만남에서 고봉은 퇴계의 학설을 비롯해 성리학의 요체에 대해 거침없이 질문하면서 논쟁을 제기했다.

당시 퇴계는 58세, 고봉은 32세였다. 그로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두 사람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일상의 사소한 반성부터 당대 지성계를 뒤흔든 ‘사단칠정론’의 철학 논쟁까지를 두루 담은 두 사람의 편지는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논쟁과 우정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젊은 사학자 김영두(36ㆍ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옮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소나무 발행)는 퇴계와 고봉이 주고 받은 편지를 빠짐없이 묶은 서한집이다. 이 책에 주목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퇴계와 고봉의 드높은 정신 세계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그것을 오늘의 우리말로 수려하게 풀어낸 번역의 빼어남 때문이다.

‘번역이 매우 단정하고 아름답다’고 하자 그는 “원문이 워낙 잘 씌어진 글이어서 그렇다”며 물러섰다. “번역하면서 감탄을 많이 했어요. 아,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글 자체가 맛있고, 표현이 아름답고 적절한데다 내용도 아주 논리정연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거기 깃든 그들의 느낌과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만나는 문장은 한문으로 씌어진 옛글을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하는 본보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자전보다 국어사전을 더 많이 찾아가며 단어 하나 하나를 옮겼다”고 했다.

퇴계와 고봉의 서한은 이미 번역돼 있다. 이번 책은 무엇이 다를까. 그는 “원문이 비교적 자유롭게 씌어진 편지글임을 감안해서 되도록 일상의 말투로 자연스럽게 풀었다”고 말했다.

“퇴계나 고봉은 훌륭한 성현이고 학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습니다. 편지로 개인적 하소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지요. 그들의 인간적 냄새를 전하기 위해 ‘힘을 빼고’ 옮겼습니다.”

그는 “번역이 즐거웠다”고 했다. 좋은 글을 만난 자체가 기뻤고, 퇴계와 고봉의 향기에 취했으며, 위대한 풍모에 반했다는 것이다.

“퇴계는 고봉을 만난 몇 달 뒤 편지에서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서 (나의 사단칠정론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썼습니다. 죽기 전 마지막 편지에서도 퇴계는 자신의 학문적 오류를 인정하는 학자적 양심을 보이고 있지요.

일곱 살 둘째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고봉의 편지를 옮길 때는 가슴이 찡했지요.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으며, 학문적 논쟁으로 팽팽히 맞설 때에도 극진한 예를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봉은 퇴계의 이론에 가장 거세게 반발한 사람이었는데도, 퇴계는 공직에서 은퇴할 때 선조 임금에게 쓸 만한 인재로 유일하게 고봉을 천거할 만큼 고봉을 아꼈습니다. 고봉도 퇴계의 죽음에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을 했지요.”

600쪽이 넘는 이 책은 일상의 편지와 사단칠정론을 비롯해 학문을 논한 편지를 분류해 1부와 2부로 따로 묶었다. 일상의 편지에서 두 사람은 자칫하면 사화에 걸려 정치적 위험에 빠지게 되는 처세의 고민을 이해하고, 학자와 관리의 길을 병행하는 어려움에 공감했다.

“재미있는 것은 관직 생활에 대한 고봉의 태도 변화입니다. 고봉은 관직에 처음 나간 30대 초반만 해도 퇴계더러 ‘선생같은 큰 인물이 어려운 시기에 세상에 나와 큰 일을 해야지 왜 물러나려 하느냐’고 말하지만, 40대에 들어서서는 물러나 학문에 힘쓰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말합니다. 말을 너무 함부로 해서 문제가 될 정도로 야심만만하고 강한 사람이었던 고봉도 정치적 처신의 어려움을 실감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퇴계와 고봉의 면모에 감탄하면서도 너무 바르게만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졌다고 했다. 욕망을 긍정하지 않는 엄숙함이 오늘의 눈으로 보면 답답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6년의 나이 차와 지위를 뛰어넘어 진실하게 사귀었던 그들의 초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책은 그 모습을 맛깔진 우리말로 섬세하고 그려내고 있다. - 오미환 기자 ( 2003-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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