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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3-04-03 01:05
"편지로 나누는 유학자들의 우정"
 글쓴이 : 기영호
조회 : 1,278  
대체로 편지는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쓰게 된다. 연인 혹은 친구에게 말로 직접하기 힘든 얘기를 글로 적어 보내기도 하고, 또는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그것을 받는 사람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편지에 전하고 싶은 말을 적으면서, 읽을 사람의 반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편지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다보니, 밤새 고민하며 편지지를 채우던 까마득한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아마도 자그마한 오해 때문에 멀어진 친구와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하여, 당시에는 주로 편지를 이용했던 것 같다.


말이란 일단 입에서 나오게 되면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한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함부로 말을 했던 경험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주 절친하던 친구 사이에도 감정적 대립을 겪으면, 한동안 소원해 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차분히 나의 생각을 글로 적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옹졸했던 내 자신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 또한 편지를 받은 친구 역시 금새 다시 예전의 친밀한 관계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글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수단으로, 편지 대신에 휴대폰이나 전자메일이 보편화되었다. 우리나라가 인터넷 환경이나 휴대전화 보급률은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른다고 하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생활의 필수 품목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이제 편지는 의례적인 소식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역할은 휴대전화나 전자메일이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간혹 상대방이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받게되면 대단히 반갑게 느껴진다. 편지를 직접 쓴다는 것은 그것을 받을 상대방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도 최근에 의례적인 서신 외에, 직접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부쳐본 기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지금은 휴대전화나 전자메일을 더 애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체국조차도 없었던 옛날에는 어떻게 편지를 전했을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옛사람들의 편지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주고받은 방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책은 당대의 대학자이기도 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를 번역하여 엮은 것이다. 각각 영남과 호남에 기반을 두고 생활했던 이황과 기대승은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13년 동안이나 서신(書信)을 교환하였다.


이들은 이 기간동안 간혹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도 했지만, 1558년(명종 13년)부터 이황이 죽은 1570년(선조 3년)까지 편지로 지속적인 교류를 하였다. 기대승이 중앙에서 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서울과 안동을 오가는 인편에 의지했으며, 그가 호남의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다양한 방법을 이용하여 서로의 소식을 전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 탓에 이황은 주로 고향인 경상도 안동에서 은거하고 있었고, 기대승은 여러 차례 삭직(削職)과 복직(復職)을 거듭하였다. 따라서 늘 멀리 떨어져 지냈던 이들이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의 아들이나 문인들이 주로 서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상대가 거처하는 곳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부탁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전달하는 사람의 사정에 의해 편지가 여러 달을 지체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편지를 받게 되기도 한다. 편지의 전달을 인편에 의지하다보니, 이들의 글들에는 편지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걱정하는 내용이 곳곳에 보인다.


상대가 보낸 답장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를 걱정하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기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한다. 매번 상대를 진정으로 아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들의 편지를 읽다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의 감정이 짙게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서로를 존중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서신이면서, 특정 주제를 중심에 두고 의견을 교환하는 학문적 토론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들이 비록 26살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편지를 통해 서로를 존중하며 쌓아간 서로의 돈독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편지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장기간 동안 꾸준히 교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상호간의 신뢰가 깊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후학(後學)인 기대승이 이황을 스승으로 여겼으며, 이황은 기대승을 후배나 제자가 아닌 학문적 관심을 서로 나누는 동학(同學)으로 대하였다.


모두 2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일상을 논한 편지들'(1부)과 '학문을 논한 편지들'(2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의 편지들은 대체로 시간적 순서에 입각해서 배열하였고, 그 가운데 주제가 학문적 관심사로 묶일 수 있는 내용들을 2부에 따로 배치하여 수록했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분류가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논한 편지글 속에서도 학문적 주제들에 대한 만만치 않은 논의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의 유학자(儒學者)들이 학문을 일상과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의 기본 정신은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고, 그것을 통하여 타인을 교화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강조한다. 따라서 생활과 학문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당대의 유학자들에게는 보편적인 면모였을 것이다.


일상적 관심사를 다룬 1부의 서신들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먼저 개인적인 안부와 서로의 건강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기대승이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이황은 매우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권고한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자신이 술을 좋아하는 성품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완곡한 내용으로 답변을 보낸다. 몸이 약해 늘 병을 앓고 있다는 이황의 편지를 받고, 기대승은 주변에서 약을 구해 문안과 함께 보내기도 한다.


또 평안도에서 자신의 저서를 판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황은 그 책의 내용이 아직 부족하다고 여겨, 중국의 사신을 맞으러 가는 기대승에게 그 책을 없애주도록 여러 차례에 걸쳐 부탁하기도 한다. 기대승은 그의 부탁을 유념하고 있다가, 마침내 평안도에 가는 길에 해당 지역에 들러 판각(板刻)을 거두어 불태우고야 만다.


이들은 또한 각자가 관심을 갖는 문제들에 대해서 의문이 나는 것에 대해 묻고, 편지를 받은 상대방은 자신의 식견과 다양한 전적(典籍)을 참고하여 질문에 답해주고 있다. 또한 서로의 의견이 대립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한 예의를 차리면서도, 충분히 반박을 하는 내용도 여러 곳에서 보인다.


서로 대립되는 의견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토론하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여 논증하기도 한다. 아무리 사소한 질문에도 매번 답변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자세에서, 당대의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해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가 있을 것이다.


몇몇 논쟁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반론에 의해서 자신의 오류가 인정되면 곧바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더욱 많은 논거를 통해서 자신의 학설을 조금씩 진전시켜 나가기도 한다. 경전의 한 구절이나 혹은 글자 하나조차도 그 전고(典故)와 의미를 세심하게 살피려는 자세가 곳곳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여러 차례에 걸친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서 어느 순간에라도 자신의 견해가 틀렸다고 인정되면, 곧바로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는 열린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상호 대립하는 주제에 대해서 토론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신중한 성격의 노학자(老學者)인 이황과 도전적이고 패기에 찬 젊은 학자인 기대승의 성격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밖에도 편지에 언급된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각자의 교유 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 대체로 이들은 자신들을 칭할 때 "같이 도(道)를 배우는"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다. 흔히 이들을 당시의 대표적인 도학자(道學者)로 일컫는데, 아마도 이들이 오랜 기간동안 서신을 통해서 교유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도학에 대한 자세와 관심이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서신을 교환했던 시기가 몇 차례에 걸친 사화(士禍)로 인해서 많은 학자들이 참변을 당한 후라, 학문적 관심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에서 이들은 서로에 대해 신뢰를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황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비(碑)에 새길 묘갈명(墓碣銘)을 기대승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것도 서로의 학문에 대한 믿음이 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도학(道學)이란 유학(儒學)에서 중국 송(宋)나라의 주희(朱喜)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性理學) 혹은 주자학(朱子學)을 달리 일컫는 표현이다. 이들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근본 유학정신을 새롭게 밝혀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도학자들은 현실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으며,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이 전제되고 그리하여 인격적으로 닦여진 군자(君子)들에 의해 정치가 시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정치적 입장을 내세울 때 우선적으로 경전에 대한 해석, 특히 주희의 해석에 기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들의 학문적 논쟁의 가장 중요한 기준도 역시 대부분 주희의 학설에 근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2부의 '학문을 논한 편지들'은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들 중에서 해당 주제로 묶일 수 있는 것들을 취해서 따로 엮은 것이다. 모두 5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중에서 이황과 기대승의 논의에서 출발하여 조선 시대 내내 유학자들의 주요 쟁점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한 편지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유학의 주요 개념 중의 하나인 '태극(太極)을 논한 편지들', 의례(儀禮)의 절차를 따진 '상례(喪禮)나 제례(祭禮)의 격식을 논한 편지들'과 '국가나 왕실의 전례(典禮)를 논한 편지들', 그리고 이황의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과 관련해서 주고받은 '묘갈명을 논한 편지들'이다. 이러한 주제들은 모두 유학에서 중요하게 취급하는 개념 혹은 절차에 대한 것들이라, 논의 자체가 대단히 논증적이고 사변적(思辨的)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책에서 분류한 대략적인 체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은 인물 중 이황은 특히 시조(時調)인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작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학문이란 자연과의 화합을 체험하면서 인간의 심성(心性)을 탐구하고 기르는 것이라고 여겼다.


편지의 곳곳에서 왕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고도 거듭하여 출사(出仕)하지 않고 물리치는 내용이 보인다. 불가피한 경우에 잠시 관직에 나아갔다가, 이내 고향인 안동으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는 당시의 혼란했던 정치 상황에서 기인하는 바가 적지 않겠지만, 자연 속에서 도(道)를 기르면서 살고자 했던 그의 기본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면이 더 컸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에 비해 적극적인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경륜을 펴고자 했던 기대승의 태도에서 도(道)를 바라보는 유학자들의 다양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마이 뉴스/김용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