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은 없습니다만 길게 이야기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가 형이고 아우고도 없습니다. 기록마다 모두 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들도 신빙성을 검증하기에는 어렵구요
기자의 후손으로 기한선우 삼성을 전하는 기록은 놀랍게도 거의 없습니다.
기자의 후손에 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중국 진(晋)나라의 진수(陳壽:232~265)가 사찬(私撰)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 보이는 것인데
(朝鮮)侯 準이 僭濫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攻擊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韓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韓王이라 稱하였다. 『魏略』에 일컫기를 ‘準의 아들과 親戚으로서 그대로 나라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그로 인하여 韓氏라는 姓을 詐稱하였다. 準이 海外의 나라에서 王이 되었으나 朝鮮과는 서로 往來하지 않았다.’ 그 뒤 (準의) 후손은 절멸하였으나 지금 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祭祀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朝鮮)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는 것이 그것입니다. 거기에서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어권이라는 사람이 지었던 『위략』이라는 책을 인용하였는데 여기에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기자 후손에 대한 기록은 동서양을 모두 합하여 위략의 이 기사가 유일한 것입니다만 불행하게도 위략은 삼국지가 지어진 이후 전하지 않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책을 간행할 때 번각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활자로 하지 않고 인쇄된 책을 나무에 붙이고 그대로 조각하여 간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삼국지의 번각본에는 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가 魏略曰 其子友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로 잘못되어 있었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소개된 삼국지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자의 후손 기준의 아들은 우친이라는 없던 이름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잘못은 기자를 모시는 숭인전(평양에 있음) 비문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숭인전 비문에 의하면
만력 신해(1611, 광해군 3)년에 본도(平安道)의 사인 조삼성, 양덕록, 정민 등이 서로 잇달아 상소하여 말하기를 “역사에서 일컫기를 기자의 후손으로 41세를 전하여 준에 이르러 위만에게 축출 당하여 마한말 후손 3인이 있었는데 이름하여 친인데 그 후에 한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평인데 기씨가 되었고, 이름하여 량인데 용강 오석산(오늘날 남포직할시 용강군)에 들어갔는데 선우씨의 세계에 전합니다” (崇仁殿碑文 萬曆辛亥 本道士人 曺三省 楊德祿 鄭旻等 相繼抗疏言 史稱箕子之後 傳四十一而至準 爲衛滿所逐 馬韓末 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 以傳鮮于世系)
사실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마저도 조선으로 하였던 조선왕조는 개국초부터 기자와 기자 후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다. 변계량에 의해 기자비문을 쓰게 했다거나 성종조 왕명으로 기자 후손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명종때에 이르러 중국 원나라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서 “선우씨는 털이 많으니 기자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기록을 통해 국가적으로 선우씨에 대해 기자의 후손에 준하는 특혜를 부여하였는데 각종 조용조의 면제와 아울러 선우씨에 대한 특별 채용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선조 연간에는 기자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율곡 이이나 윤두수 등에 의해 기자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연구에서 기자의 후손은 언급되지 아니하였고 선우씨에 대한 기자 후손으로의 국가적 공인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조는 여러 신하들을 인견한 자리에서 기자의 후손이 조선에 있는가를 물었고 이에 윤두수는 선우씨 한씨 기씨가 그 후손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으나 선우씨는 중국에서 기자의 후손이 선우씨라는 전설이 있고 원나라때 시인 선우추가 쓴 시에 그런 내용이 있으나 조선의 선우씨가 그것이라고 확증할 수 없으며 한시는 준왕이 한왕이 되었다는 이유에서 함부러 칭한 것이며 기씨는 箕와 奇가 음이 같기 때문에 나온 주장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조삼성 등의 상소 이후 기자 후손이 조선에 실재하며 그것은 기 한 선우 삼성이라는 주장은 더욱 전파되고 광해군 연간에는 선우씨를 기자의 후손으로 공인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그후 청주한씨는 최초로 만들어진 그들의 족보(석탄(石灘) 한효중(韓孝仲 : 1559명종14-1628인조6에 의해 편찬되었다)에서 다음의 기사를 통해 더욱 공고화하였다.
淸州韓氏의 由來는 後朝鮮인 箕子朝鮮에서 起源한다. 馬韓 元王(필자주:箕準의 7世 箕勳)의 아들 3인이 있어 友平, 友諒, 友誠이니, 나라가 衰하자 우평은 高句麗에 入仕하여 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은 新羅에 입사하여 上黨韓氏 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은 百濟에 입사하여 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箕子의 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여 한씨 족보에서 인용한 위지는 역사서가 아니다. 魏志라면 삼국지의 위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위의 인용대로 한다면 단순히 ‘위나라 기록에 의하면’이라는 막연한 이야기에 불과하여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 연간에 이러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당시 영의정이던 만전 기자헌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자세한 사항들은 추론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후 숙종대에 이르러 기문의 고세계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추론하는데 도움이 된다. 단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자에 대한 기록만 검색해보아도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