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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6-06 20:10
고려사-기철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989  

고려사에 나오는 기철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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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奇轍)1)의 몽고 이름은 바얀부카[伯顔不花]로서 행주(幸州 :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사람이다. 고조부(高祖父) 기윤숙(奇允肅)은 사치스러운 성격에 호협(豪俠)한 일을 좋아하는 자로, 최충헌(崔忠獻)에게 아부하여 갑자기 상장군(上將軍)벼슬을 받고 두 성(省)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일찍이 황의(黃衣)2)차림에 “물렀거라!”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창기집을 드나드니 길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강정(康靖)이었다.
 
그 아비 기자오(奇子敖)는 음서(蔭敍)로 산원(散員)벼슬을 받았고 거듭 승진해 총부산랑(摠部散郞)이 되었으며 선주(宣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 수령으로 나갔다가 63세로 죽었다.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과 혼인해 기식(奇軾)·기철(奇轍)·기원(奇轅)·기주(奇輈)·기윤(奇輪)을 낳았다.
 
기식은 일찍 죽었고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후궁으로 뽑혀 들어가 제2황후로 책봉되어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를 낳았다. 충혜왕 때 황제가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와 태감(太監) 박테무르부카[朴帖木兒不花]를 보내 기자오(奇子敖)에게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을 추증하고 영안왕(榮安王)으로 봉하였으며 장헌(莊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으로 하여금 묘비문(墓碑文)을 짓게 해 내려주기도 하였다. 또 그 처 이씨(李氏)를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으로 책봉하고 그 집 문에 정절(貞節)이라는 정표를 세워주었으며 자주 사신을 보내 옷과 술을 하사하곤 했다. 또 기철을 행성참지정사(行省參知政事)로, 기원을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각각 임명하니 본국에서는 기철에게 정승 벼슬을 주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으로 봉했으며, 기원은 덕양군(德陽君)으로 봉해주었다.
 
기철·기원·기주·기윤은 황후의 권세를 믿고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며 그들과 가까운 일당들도 그 연줄을 타고 교만하게 횡포를 부렸다. 기원이 자기 일가붙이들을 모아놓고 모친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그릇들이 극히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수성찬이라 보는 사람들마다 나라가 생긴 이래로 드문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처 이씨(李氏)도 기씨의 일족으로 왕이 그 집에 갔다가 그 여자를 강간했는데 얼마 후에 전자유가 처를 데리고 숨어버렸다. 기윤이 전마파(田麻頗)와 함께 내료(內僚)의 등촉(燈燭)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구타하자 성이 난 왕이 직접 전마파와 기윤의 집으로 가서 전마파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 왕이 다시 기윤의 집으로 가서 기윤을 데리고 돌아와서는 술자리를 열어 놓고 악소배(惡少輩)를 보내어 기윤의 집에서 전마파를 수색하게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염돈소(廉敦紹)는 기철의 매제로 그의 집 종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위세를 부리면서 일당 대여섯명과 함께 남의 처를 빼앗기로 작당한 후 왕명이라고 속여 강제로 끌어왔다. 사흘 밤이 지난 후 그 사실을 안 남편 집에서 그 종을 고발하자 노한 왕이 순군에 가두고 국문해 자백을 받고는 장형에 처한 다음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기주 역시 횡포를 자행해 온 나라 사람들이 그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해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자 기주가 자신의 죄를 알고 양광도(楊廣道)로 달아났는데, 안렴사(按廉使) 김규(金)가 체포해서 도감(都監)으로 압송해 장형에 처했다. 기철의 족제(族弟) 기삼만(奇三萬)도 권세를 믿고 불법을 자행하며 남의 토지를 빼앗았다. 정치도감에서 장형에 처한 후 순군에 수감했더니 20여 일만에 옥사했다. 그의 처가 행성이문소(行省理問所)3)에 호소하자 행성에서 도감관(都監官) 서호(徐浩) 등을 가두었다. 판도감사(判都監事)인 정승(政丞) 김영돈(金永旽)이 왕에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관(整治官)을 가두셨습니까?” 하고 따지자 왕은, “기삼만이 남의 밭 5결(結)을 빼앗았을 뿐인데 왜 죽이기까지 했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김영돈은, “기삼만이 권세를 믿고 악한 짓을 오랫동안 저질러 왔으니 어찌 밭 5결만 뺏고 말았겠습니까?”라고 항의했다.
 
기삼만의 죽음을 안 원나라에서는 공부낭중(工部郞中) 아루[阿魯]와 형부낭중(刑部郞中) 왕호유(王胡劉) 등을 보내 관련자를 국문했다. 아루 등이 행성에서 서호를 심문하려고 목에 쇠사슬을 묶어 데려오게 하자 기삼만의 동생 기선재(奇善財)가 서호더러, “내 형이 몇 번 네 처와 간통했다고 그 일에 원한을 품고 때려죽인 것이 아니냐?”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에 서호는, “내 처는 사족(士族)의 딸인데 어찌 그런 일을 저질렀겠는가? 비천한 여자라야 그런 더러운 짓을 저지르는 법이다.”라고 응수했다. 기선재의 어미가 천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원나라에서 다시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 서호 등을 장형에 처했다. 왕이 죽자 덕녕공주(德寧公主)4)가 기철(奇轍)과 왕후(王煦)로 하여금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대신 맡도록 분부했다.
 
공민왕(恭愍王)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행성으로 행차하는데 기원(奇轅)이 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하자 왕이 호위 군사를 시켜 앞뒤로 나누어 호위하도록 함으로써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조일신(趙日新)이 기씨 일족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후 사람을 나누어 보내 그들을 죽이니 기원은 피살되고 기철은 달아나 숨어 죽음을 면했다. 그 후 왕은 공주와 함께 자주 이씨의 집을 찾아가 잔치를 열어주었으며 원나라에 다음과 같이 요청하는 표문을 보내기도 했다.
 
“저희 나라는 상국의 역대 조종(祖宗) 때부터 외람되게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영광을 누려왔습니다. 풍속이 중국에 비해 부끄러운 점이 많긴 하나 천행으로 상국의 가르침을 듬뿍 받아왔습니다. 저희 나라의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 이씨는 대대로 관직을 지낸 예의바른 명문 집안 출신으로 황후를 길러 내었습니다. 황후께서 상국의 궁궐에 드시어 상서를 쌓아 태자를 낳으셨으니5) 응당 이씨를 높이 받들어야[碧縷6)] 마땅할 것입니다. 상국 조정에는 인척들이 모여 기쁨을 나누며 자손들에게 길이 경사가 있기를 기원하는 보르차[孛兒扎]라는 관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관례를 시행할 때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대부인 이씨를 위하여 성대한 의례를 베푸시어 그를 사랑하시는 각별한 은총을 보이신다면 모든 일족들이 친족을 화목하게 대하시는 폐하의 의리에 감동하여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맹세할 것입니다. 또한 온 나라가 정성을 다해 찬미를 돌리며 영원토록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할 것입니다.”
 
이에 원나라 황제(皇帝)가 만만태자(巒巒太子)7)·정안평장(定安平章) 등을 보내 보르차[孛兒扎] 잔치를 열어 주었다. 왕과 공주가 연경궁(延慶宮)으로 행차한 후 공주와 태자는 남쪽을 향해 앉고, 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각각 앉았다. 왕이 술을 부어 먼저 무릎을 꿇고 태자에게 올리니 태자가 서서 받아 마셨다. 그리고 태자가 술을 부어 이씨에게 올린 다음 왕과 공주에게도 올렸다. 잔치가 끝나갈 무렵 사신의 하인들이 서쪽 계단에, 호위 군사가 동쪽 계단에 앉아 차려놓은 고기를 누가 많이 먹고 먼저 다 먹었느냐로 내기를 하는 오락판을 벌였다.
 
잔치가 끝나자 모두 뜰로 내려와 나란히 선 다음 사신은 서쪽에, 기철과 권겸 등은 동쪽에서 각각 몽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다들 뜰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리고는 모시베 1필(匹)을 잡고 둘러서서 몇 차례 빙빙 돌며 가무를 벌인 다음 잡고 있던 베필을 조각조각 나누었다. 이 잔치에 베를 오려 꽃을 만드느라 사용된 베가 모두 5,140필이었으며, 다른 물건도 그 만큼 들어갔다. 이로 말미암아 물가가 폭등했으므로 그 후의 모든 공적·사적인 잔치와 각종 재(齋)에 유밀과(油蜜果)8)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후 원나라에서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며 본국에서는 이씨를 위해 경창부(慶昌府)를 설치했다. 또 원나라에서는 직성사인(直省舍人) 망케[忙哥]를 보내 기철을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으로 임명하고 옷과 술도 내려주었다.
 
왕이 무슨 일 때문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장형에 처한 후 유배보내려고 하자 기철이 왕에게 규정(糾正)이 죄를 지었지만 그렇게 하면 후대에 비난을 받을 것이 우려된다고 건의하자 왕이 즉시 그를 석방했다. 원나라에서 왕에게 공신호를 하사했는데 기철이 마침 자기 모친을 뵈러 요양(遼陽)에서 왔다가 왕에게 축하의 시를 올리면서 자신을 신하라고 부르지 않았다. 원나라에서 기원의 아들 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를 보내 기철을 영안왕(榮安王)으로 고쳐 봉해 경왕(敬王)으로 임명했으며, 또 3대를 추봉(追封)해 왕으로 삼고 기철을 대사도(大司徒)로 임명했다.
 
당시 권겸(權謙)과 노책(盧頙)이 둘 다 자기 딸을 원나라에 바쳐 총애를 받고 있었다. 기철이 권겸 등과 함께 서로 의탁해 권세를 휘둘렀으나 천하가 소란한 것을 알고는, 자신이 거듭된 악행으로 남의 원한을 샀기 때문에 만약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게 될 경우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이에 미리 스스로의 안전을 꾀하고자 친척과 심복을 권력의 주요 지위에 포진시키고 자신을 도울 일당들을 은밀히 요소요소에 심었다.
 
그리하여 장치 반역을 일으키려고 여러 도의 병기를 검열했으며 황제의 조칙을 전하는 사신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유언비어를 선동하면서 은밀히 날짜를 정해 거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왕이 소연을 베푼다는 핑계로 재추들을 모두 궁정에 모이게 한 다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홍의(洪義)와 재신(宰臣) 배천경(裵天慶)9) 등을 보내 기철·노책·권겸 및 기철의 아들인 찬성사(贊成事) 기유걸(奇有傑)과 조카 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 권겸의 아들인 만호(萬戶) 권항(權恒)과 사인(舍人) 권화상(權和尙), 노책(盧頙)의 아들인 행성낭중(行省郞中) 노제(盧濟) 등을 불렀다. 기철과 권겸이 먼저 도착하자 밀직(密直) 경천흥(慶千興)·황석기(黃石奇)10)와 판사(判事) 신청(申靑) 등이 왕에게 은밀히,
 
“두 놈이 왔으나 그 나머지 아들과 조카 및 노책 부자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일이 누설될 경우 불의의 변이 일어날지 모르니 빨리 해치우는 게 좋겠습니다.”
고 건의하니 왕이 옳은 말이라 여겼다.
 
즉시 밀직(密直) 강중경(姜仲卿)11), 대호군(大護軍) 목인길(睦仁吉), 우다치[亏達赤] 이몽대(李蒙大) 등을 시켜 장사를 매복시켜 두게 했는데 장사들이 불시에 튀어나가 철퇴로 쳤다. 기철은 즉각 쓰러졌고 권겸은 피해 달아나는 것을 쫓아가서 자문(紫門)에 이르러 죽이니 피가 궁궐문에 낭자했다. 또한 기철의 종자 두 명도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주교(朱橋)에 던져버렸다. 홍의(洪義)가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자 기철과 권겸의 부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금위(禁衛) 사번(四番)12) 군사가 한꺼번에 동원되니 온 길마다 창검이 번득였다.
 
강중경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노책의 집으로 가 그를 잡아 죽인 후 북천동(北泉洞) 노상에 버렸다. 기유걸(奇有傑)은 배천경과 함께 궁궐로 가다가 도중에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달아나 숨었다. 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노제(盧濟)·권항(權恒)·권화상(權和尙) 등 및 나머지 일당들도 모두 달아나 숨었으므로 전국에 명해 수색 체포하게 했다. 또 세 집의 노비들을 몰수해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유비창(有備倉) 등 여러 창(倉)으로 예속시켰다. 많은 무뢰배(無賴輩)들이 변란을 틈타 궁성을 약탈하자 엄한 계엄령을 내리고 재상으로부터 서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리들이 무장한 채 궁성을 숙위했다. 이어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후 왕통을 물려주시면서 행정 제도와 법률을 제정하시니 이에 상하가 서로를 도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또 우리 충헌왕(忠憲王 : 고종)이 원나라 조정에 귀부해 정성을 다하니 원나라 세조(世祖)께서 옛 풍속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하고 구원해 주셨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도 이제껏 한번도 신하로서의 예의에 어긋남이 없이 제후로서의 직분을 다하고 공물을 성의껏 바쳐왔다.
 
그러나 지금 기철·노책·권겸 등과 같은 자들이 원나라 조정에서 위로하고 구원해 준 뜻과 우리 선조들께서 나라를 세워 왕통을 잇게 해주신 법도를 무시한 채 자기 권세를 믿고 임금을 능멸했으며 위세를 함부로 부려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끝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원나라 황실과 인척임을 감안해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불만을 품고 몰래 반역을 도모하여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다. 다행히 천지와 신령들 덕분에 기철 등이 모두 이미 처형당했거니와 도주한 기유걸·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권항·권화상 등 흉악한 무리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한가귀(韓可貴)13)와 구정(具貞) 등은 나라의 명령을 어기고 고의로 반역자들을 놓아주었으므로 모두 법에 따라 형벌을 내릴 것이다. 반역자들을 잡아오거나 소재를 알려주는 자에게는 각각 공로에 따라 그 반역자의 재산으로 상을 줄 것이며, 위에 든 반역자 이외의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형벌은 일체 면제한다.”
 
기철 등이 점탈했던 인구와 토지는, 도첨의사(都僉議司)가 도감(都監)을 세우고 사람들의 신고를 받아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곧이어 기유걸·기욀제이부카[奇完者不花]·권제·권화상을 체포해 처형했으며, 노항(盧恒)만은 평소 권세에 의지한 일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모면하고 제주(濟州 : 지금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기유걸이 처형당할 때 구경꾼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으나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동생인 상호군(上護軍) 기세걸과 평장(平章)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는 당시 원나라에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난을 피해 머리를 깎고 비구니 행세를 하고 있던 기철의 처 김씨는 체포되어 순군에 수감되었으며, 어린 자식 기샤인[奇賽因]도 머리를 깎고 흥왕사(興王寺)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죽었다.
 
그 일당인 금녕군(金寧君) 김보(金普),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에센테무르[李也先帖木兒], 행성원외(行省員外) 조만통(趙萬通), 동첨(同僉) 홍익(洪翊)14), 찬성(贊成) 황하연(黃河衍), 평리(評理) 이수산(李壽山)·밀직(密直) 왕중귀(王重貴), 대언(代言) 황하연(黃河宴), 호군(護軍) 황하식(黃河湜), 전 대언(代言) 홍개도(洪開道), 전 우윤(右尹) 전림(田霖), 선공령(繕工令) 김의렬(金義烈), 환관 대호군(大護軍) 정용장(鄭龍莊)을 유배형에 처했으며 전 밀직(密直) 임군보(任君輔), 전 광흥창사(廣興倉使) 임인기(林仁起), 전 호군(護軍) 김남득(金南得)15), 전 낭장(郞將) 노지경(盧之卿)을 장형에 처했다. 곧이어 정용장·홍익·황하연을 처형하고 세 집의 재산을 몰수 한 후, 관청에서 몰수한 재산을 매각했는데 태묘령(太廟令) 장천핵(張天翮)이 그 일을 주관했다.
 
장천핵이 몰래 자기 종을 시켜 베 17필로 비단 이불을 사서 집으로 운반하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비단은 시가가 베 17필 보다 휠씬 더 나가는데 무슨 연유로 얻었는가?” 하고 떠들며 함께 그 뒤를 좇아가자 종은, “나는 화매관(和賣官) 장천핵의 종이오.”라고 실토했다. 어사대(御史臺)에서 장천핵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그의 동생인 대호군(大護軍) 장천지(張天志)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를 받고 면직만 당했다.
 
기철 등이 처형되자 그 모친 이씨는 근심으로 홧병이 났다. 당시 나라에서는 서북방면에 장수를 보내 원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면서 봄·가을로 공물 바치는 일만 마지못해 했을 뿐이라 서로 간의 소식이 거의 두절되었다. 원나라 황태자가 금강길사(金剛吉思)를 보내 이씨를 데려가려 했으나 이씨가 굳이 사양하는 바람에 사신이 세 차례나 그냥 돌아갔다. 이에 황태자가 첨사원첨승(詹事院僉丞) 보동(保童)편에 옷과 술을 보내고 금강길사는 그냥 머물러서 봉양하게 했다. 이씨가 죽자 관에서 장례를 치루어 주면서 쌀 2백 석과 베 2,500필을 부의했다.
 
기세걸의 아내 방씨(房氏)는 평리(評理) 방언휘(房彦暉)의 딸인데 기씨 일족이 패망한 후 김용이 방언휘를 으르고 꾀어 방씨와 간통했다. 남편이 있었던 몸이라 김용이 그 여자를 제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문객인 정언(正言) 최수자(崔守雌)의 처로 삼아 주었다. 김용이 유배되자 왕이 방언휘와 최수자를 순군(巡軍)에 가두고 장형에 처했다. 김용이 처형당한 뒤에는 나라 사람들이 방씨를 빼앗았으나 뒤에 기세걸이 원나라로 데리고 갔다. 원나라가 패망하자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요심관리(遼瀋官吏)인 평장(平章) 김바얀[金伯顔], 우승(右丞) 카라바투[哈刺波豆], 참정(參政) 덕좌불화(德左不花) 등과 함께 원나라의 잔당들을 불러 모아 동녕부(東寧府)에 할거하며, 자기 아비가 처형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우리 북쪽 변방을 침구해 원수를 갚으려 했다. 왕이 지용수(池龍壽)와 양바얀[楊伯顔]16)을 시켜 공격에 나서게 하자 기샤인테무르는 도망쳐버렸다. 이에 관한 기록은 「지용수전(池龍壽傳)」에 나온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철 [奇轍]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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