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幸州奇民)의 원시조(原始祖)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이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建國)한 문성대왕(文聖大王)인
기자(箕子)이시다. 성(姓)은 자(子)요 이름은 서여(胥餘)다. 인류역사의 가장 권위(權威)있는 사서(史書)를 집필한
사마천(司馬遷)(B.C145∼B.C86)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3120여년이 지난 기원전(紀元前) 1122年에 세워진
왕조(王朝)가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고 했다. 개국(開國)에 관한 여러 문헌(文獻) 가운데서 기자동래설(奇子東來說)을 가장 신뢰있게
주장(主張)하고 있다. 동래설(東來說)의 그 내용을 보면 「은(殷)나라의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왕(王)노릇을 했다」는 설(說)이다. 그런데 일부 사학자(史學者)들은 이 기록(記錄)을 부정(否定)하고 있으나 한글학자 한갑수(韓甲洙)
선생을 비롯해서 서울大學校 박시인(朴時仁)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의 이형구(李亨求) 연구관, 중국(中國)의 저명한
사학자(史學者) 임혜상(林惠祥)씨 그리고 중공 고고학회(中共考古學會) 등 각계에서 이 역사적(歷史的) 기록(記錄)의 타당성(妥當性)을 적극
주장(主張)하고 있다. 특히 상서대전(尙書大傳)과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 송미자세가(朱微子世家), 후한왕부(後漢王符)의
잠부론(潛夫論)과 동이열전(東夷烈傳) 제75를 살펴보면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기자조선은 실존했던 왕조”宗報記事참조) 이밖에
영조(英祖) 52년(1776)에 서명웅(徐命 )이 기자동천(箕子東遷)의 사적을 기술한 기자외기(箕子外記)와 조선(朝鮮) 선조 때 문신
윤두수(尹斗壽)와 이이(李珥)가 각기 따로 쓴 실기(實記)를 광해군 때 평양의 선비들이 이를 합편(合編)하고 다른 기록을 첨가하여 간행한
기자지(箕子志)〈5권 1책〉를 읽어보면 역사 속에서 기자(箕子)의 실기(實記)를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태조(太祖) 문성대왕(文聖大王)을 시작으로 2대(代) 장혜왕(蔣惠王)에서 39대(代) 장평왕(章平王), 40대(代) 종통왕(宗統王),
41대(代) 애왕(哀王) 즉 준왕(準王) 때에 와서 역사적 변고가 발생됐다. 그 당시 연(燕)나라가 한(韓)의 대군(大軍)과 합세하여 침략해
오므로 왕검성에서 할 수 없이 남쪽 진국(辰國)으로 피신하여 내려가게 되니 이 때가 기원전(紀元前) 194년이다. 이렇게 해서 태조 문성대왕으로
부터 41代 기준(箕準)까지 929년 동안 향수(享壽)한 기자조선왕조(箕子朝鮮王朝)는 마감하게 된다. 남쪽으로 내려가 도착한 곳이 지금의 전북
익산시 왕궁면(全北 益山市 王宮 面). 여기에 정착한 기준(箕準)은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름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마한을 창건한 1世는 기준(箕準)이 아니고 그의 아들 기탁(箕卓)이며 마한(馬韓) 1世는 무강왕(武康王)으로 제위하여 삼한시대(三韓時代)가
열리게 된다. 지금도 무강왕릉을 일명 익산쌍릉(益山雙陵)이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5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일이면
청한팔봉왕릉종친회(淸韓八峰王陸宗親會)의 주관으로 시제(時祭)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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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쌍릉 : 사적 제87호.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 57번 무강왕(武康王).
대왕묘 |
그러니까 기자(箕子)의 42세손(世孫)인 기탁(箕卓) 무강왕의 왕릉이 현존하여 있는 것과 또 평양시 기림리 (箕林里)에는
기자릉(箕子陸)이 있는데 1102년(고려 숙종조) 분형을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성종, 고종 때 증축했다. 묘 앞에 정자각과
중수기적비(重修紀蹟碑)가 있고 기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1430년〈세종12년〉에 비(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변계량(下季良) 지었으며
1612년(광해군4)에 숭인전(崇仁殿)이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더라도 기자조선이 실존왕조였음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30∼40여 주변나라를
다스려 오던 마한(馬韓)의 왕조가 8세 원왕(元王) 기훈(箕勳)왕 때에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에게 나라를 빼앗기므로 마한의 왕조가
177년만인 BC17년에 무너지게 된다. 이때에 원왕 기훈(箕勳)에게는 우평(友平)과 우성(友誠), 우량(友說) 세왕자가 있었는데 우성은 백제에
귀의 하여 온조왕조에 시중(侍中)〈요직의 으뜸 벼슬〉으로 봉직함에 행주기씨(幸州奇氏)의 득성조(得姓祖)가 되고 우량은 신라에 귀의하여
상당한씨(上堂韓氏) 지금은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으며 우평은 고구려에 귀의하여 북원(北原) 즉 太原 解干씨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한
8世 원왕(元王) 기훈(箕勳) 왕자인 우성을 득성시조(得姓始祖)로한 기씨 혈통은 우성의 아들 창원(昌原)을 2代, 안식(安植)을 3대(代)의
순으로 이어지는 64代는 해보(海甫), 65代 문유(文儒)까지는 문성왕 기자로부터 114代가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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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전 :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장대재 기슭에 서있는 숭인전(崇仁殿)은 고조선 후기왕조인 기자조선 의 기자왕을
제사지내기 위해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에 지은 사당이다. 처음엔 기자사(箕子祠)라고 부르다가 1612년(조선 광해군 4년)에 개수하면서
숭의전이라고 고쳐 불렸다. 숭의전은 본래 재계청과 문,비각,행랑 등 10여채로 이루어진 사당의 본전이었다. 숭의전의 본전은 현재 숭령전 옆으로
옮겨져 있는데, 정면 3간(12.97m), 측면 3간(8.72m)의 겹처마 합각지붕으로 아루어져 있다. 내부는 통칸으로 하고 통천장으로 시원하게
개방해 놓았다. 숭의전은 사당 건물이긴 하나 고려말기의 것으로 당시의 건축미와 구조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사진제공- 북한연구소,
통일부 묵한자료센터) |
기씨 득성조로부터 65代인 문유의 아들 순우(純祐)가 고려 인종조(仁宗朝)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門下省의 正二品 벼슬)로
등용하게 됨으로 해서 명실공히 행주기씨의 중시조(中始祖)로 혈통의 세계가 이어나가게 된다. 다시 순우를 중시조 1世로 시작하여 대대로
이어져 기록되어 나가는 행주기씨대동보(幸州奇氏大同譜)가 탄생됐다. 이것이 곧 우리 씨족의 세계(世系)가 기록되는 족보이다. 이제 족보를
들추오 넘겨보면 1세 순우(純祐) →2세 수전(守全) → 3세 필선(弼善) 순으로 이어져 가는데 10세에 눈을 돌리니 중흥조(中興祖)이신
건(虔)자 정무공(貞武公) 할아버지 존함 더욱 돋보인다. 고려조에 들어 중시조 우성(友誠)의 등용(登用)을 시작으로 고려중엽 이후
순우(純祐)의 손자 윤위(允偉)대장군(大將軍)과 윤숙(允蕭)대장군이, 고종(高宗)때 무인(武人)으로 이름을 떨쳤고, 탁성(卓誠)부원수(副元帥)는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待郞平章事)의 판이부사(判使部事)에 올랐다. 또한 홍수(洪壽)는 최충헌(崔忠獻)에
협력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오르는 등. 200여년간 공신과 충신들이 많이 배출되어 나라에 기여함으로 기씨가문의 융성기(隆盛期)를 누리게 된
것이다. 특히 고려말기에 기자오(奇子敖)의 딸로 기씨가문에서 태어나 1333년 8월 원(元)나라의 조공녀로 끌려가 궁녀로 일하다가 타고난
미모와 총명함 때문에 황제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원(元)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고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원나라의 이름은
완자홀도(完者忽都)라 불렀다. 황후가 되기 직전 제2황후로 책봉되었을 때 이미 고려가족들에게 원(元)나라로부터 관작(官爵)이 주어졌다. 아버지
기자오는 영안왕(榮安王)에 봉(封)해졌고, 어머니도 삼한국 대부인(三韓國 大夫人)에 봉해졌다. 또 삼대(三代)를 추존하여 왕(王)이라는 칭호를
추증했다. 오빠 기철(奇轍)은 행성참지정사(行省參知政事)로 삼아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관할케 하고 동생 기원(奇轅)으로는 원(元)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다. 한편 고려에서도 원(元)에서 높여 추증함으로 그냥 있을수 없었다. 오빠 기철에겐 정승(政丞)에다
덕성부원군(德城府院 君)으로 봉했고 동생 기원을 덕양군(德場君)으로 봉하기도 했다. 14세의 어린 나이로 원(元)의 궁궐에 들어가
황후(皇后)가 되고 아들은 원조(元朝)의 대통을 이어 몽고의 왕 소종(昭宗)이 되게 했던 奇皇后는 「고려판 신데렐라」였다. 당시 동아시아를
지배했던 원실(元室)의 처가된 고려 기씨들은 위세가 대단했다. 기철과 기원은 고려 조정을 좌지우지 뒤흔드는 실력자로 등장했다. 다시말해「기씨
천하(奇氏天下)」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 원(元)나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1351년 고려에선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했다. 공민왕은 주원장(朱元障)의 명(明)나라가 지나본토를 원(元)의 지배로부터 수복해 가는 대륙의 풍운을 기회로 포착하여
백여년 원나라의 속박을 물리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공민왕이 친원파(親元派)를 제압하려는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기철을 중심으로한 기씨일가를 모두
계획적으로 희생(犧牲)시켰다. 한 전문 역사가가 지적한 것처럼 기황후가 부모의 나라인 고려에 미친 영향은 대원제국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그야말로 미미하다고 했다.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뛰어난 미모와 지략의 여인 기황후(奇皇后)이야말로 인류역사에서 최후로 등장한 유목민족제국과 그
운명을 같이 한 것이다. 그렇게 갈망하던 황후도 되었고 사랑하는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다. 1368년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북벌이 단행되고 경성대도(북경)가 점령당하자 순제왕을 따라 북쪽 개평으로 도망갔었다. 아들「애유식리달렵」이 황제로 즉위했으니 바로 북원
소종황제(昭宗皇帝)다. 그러나 즉위 7년 후에 1378년 사망했다. 아마도 아들의 죽음까지를 다 목격한 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을
것이리라. 이제 중국(中國)에서는 기황후(奇皇店)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원(元)나라 역사를 다룬 「원사(元史)」에서 기황후에 대한
기록의 전문을 모처럼 복간하는 宗報에 실어 다시 한번 기황후에 관한 역사적, 인물사적 관찰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완자홀도 황후 기씨는 고려사람이다. 황태자 애유식리달렵을 낳았다. 원래 집안은 미천했으나 후에 귀하게 되어
3대가 모두 왕작으로 추봉되었다. 처음 휘정원사 독만질아가 궁녀로 들여보내 순제에게 차를 다려 올리는 일을 했다. 황후의 성품은 영리하고 꾀가
많았다. 어느날 황제의 총애룰 받게 되었다. 그뒤 「답납실리」 황후의 시기를 받아 몇차례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답납실리」 황후가 살해된 후
순제는 그녀를 황후에 봉하고자 했으나 승상 백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백안이 승상에서 파하게 되자 사자반의 주청으로 제2황후로 세워
흥성궁에 거처케 했으며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고쳤다. 황후는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여효경(女孝經)과 역사책을 읽었으며 역대로 좋은 행실을 보인
황후를 찾아 모범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산해진미 등 귀한 물품을 바치면 먼저 태묘(大廟)에 아뢴뒤 맛을 보았다. 경성에 기근이 들었을 때 황후는
먹을 것을 풀도록 명령했다. 또 금은, 곡식, 옷감 등을 내어 자정원사 박불화에게 명하여 대도(북경) 주변 열한곳에다 무덤을 만들어 죽은 사람
10여만명을 장사지내 주었다. 당시 순제는 정치를 매우 태만히 했는데 황후는 황태자 애유식리달렵과 함께 순제의 양위를 추진하고자 박불화를 승상
태평에게 보내 의중을 떠 보았다. 그러나 태평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후는 다시 태평을 궁으로 불러 연희를 베풀며 그에게 자진해서 나서 줄 것을
권했으나 태평은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후와 태자는 그를 원망하게 되었다. 순제도 황후의 뜻을 알고 화를 내고는 황후를 멀리하여 두달동안
얼굴을 보지 않았다. 박불화가 황후의 신임을 많이 얻고 있었는데, 한번은 박불화가 조정에서 탄핵을 당하자 황후가 어사대부 불가노를 비꼬며
박불화를 위해 변명을 해 주었다. 불가노가 다시 박불화를 탄핵하려 하자 황후가 이를 알고 오히려 다른 어사들을 사주하여 불가노를 탄핵, 그를
조하로 유배보냈다. 황후의 기씨 집안은 고려에서 황후의 위세를 믿고, 교만하게 구는 바람에 고려왕의 노여움을 사 모두 죽임을 당했다.
지정 23년(1363년) 황후는 태자에게 ‘나를 위해 복수를 해 줄 수 없겠냐?며 호소했고 마침내 대도에 머물고 있던 고려 왕족을 고려왕으로
기씨 집안의 아들 삼보노를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동지추밀원사 최첩목인(최유)를 승상으로 삼아 1만 군사를 일으키고 아울러 왜병에게도 통고하여
그를 맞이 하게 했다. 압록강을 건너는데 사방에서 복병의 공격을 받아 17명만 살아 돌아오는 참패를 당했다. 황후는 크게 참담해 했다. 지정
24년(1364년) 7월 "패라첩목아"가 군사를 일으켜 황궁을 침범했고, 황태자는 "기녕"으로 도망가 패라첩목아 토벌을 명했다. 화가난
패라첩목아는 감찰어사 무기종을 사주해서 황후가 국정을 바깥에서 교란하고 있기 때문에 황후를 황궁밖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케 했다. 순제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정 25년(1365년) 3월(패라첩목아는) 마침내 황후를 재색총관부에 유폐시키고 그 측근 요백안불화로 하여금 감시하게
했다. 4월 패라첩목아는 황후를 핍박하여 환궁케 한 다음 인장을 빼앗아 거짓으로 태자를 소환케하는 글을 쓰게 했다. 황후는 다시 유폐되었고,
이에 황후는 몇차례 미녀를 패라첩목아에게 바쳤으며, 백일만에 비로소 환궁했다. 패라첩목아가 죽자 황태자를 경사로 불러 들였고 확곽첩목아로
하여금 대군으로 황태자를 옹호하여 입성케 한 다음 순제를 위협하여 황위를 양위케 하려 했다. 확곽첩목아가 그 뜻을 알고 경성 30여리 밖에
이르러 군사를 진영으로 돌려 보내고 말았다. 이 때문에 황후와 황태자는 그를 원망하게 되었다. 제1황후인 백안홀도 황후가 세상을 뜨자
12월 중서성에서 황후를 제1황후로 세우는 것이 당연하며 자정원을 고쳐 숭정원으로 하고 이를 중정원에서 아울러 주관하자는 건의를 올렸으나 순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 순제는 마침내 황후에게 책보(冊實)를 내렸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 아래 사람의 도리로 부부만한 것이
없다.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내조하는 것 또한 고금의 도리다. 이제 그대 숙량합씨(肅良合氏: 숙량합으로 봉한다)는
천하의 어머니로 공경스럽고도 근검절약하는 행동으로 천하를 이끌고 황가를 빛냈으니, 이제 옥채옥보(玉채玉寶)를 내려 황후로 삼노니 더욱 힘써 짐을
보좌하여 영원한 복이 되도록 하라.」이후 지정 28년(1368년)에 순제(順帝)〈1320∼1370:타환첩목이〉를 따라 북으로
도망갔다. 이상과 같은 중국 역사기 「원사(元史)」의 내용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보면 기자조선의 태동과 발전사를
시대별로 확인하면서 원의 몰락과 고려의 몰락으로 기씨일가에 곤욕(困辱)스러운 퇴조(退潮)의 역사를 맞이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았으나
조선조(朝鮮朝)에 들어 오히려 명문(名門)의 영예(榮譽)를 얻게 한 행주기씨(幸州奇氏)의 중흥조(中興祖)의 인물이 탄생됐으니 그 분이 바로
정무공(貞武公)(1391∼1460) 기건(奇虔)
어르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