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성조(入城祖)의 현조(顯祖)이신 정무공은 본관은
행주요휘 (諱)는 건(虔)이요, 호(號)는 현암(眩庵), 전호(前號)는 청파(靑坡)인데 그 당시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서 살았다하여 공(公)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 오늘의 청파동이다. 나라에서는 공에게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로 추증하고 또 청백리(淸白吏)에
녹(錄)하였다. 시호는 제왕, 영상, 명현들의 공덕을 사후에 추증하는 명칭이요 녹은 이런 업적을 사후에 표창하여 하사하는 물자 나
토지이다.공께서는 천성이 순수단아하시고 정서가 온후할 뿐 아니라 재기발랄하여 일찍부터 학업에 정진하여 성균관서 효경(孝敬)과 대학, 중용 및
문학을 익혔다. 세종조에 효도와 청렴이 출중하다 하여 포의탁배(布依擢拜: 선비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로
사헌부지평(司憲付持平)에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인명하는 것)되어 호조참판, 전라, 함경, 평안 삼도 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대법관)을 거쳐 한성판윤(서울특별시장), 판중추부사(무임소장관)등을 역임했다. 세종 25년(1443년) 9월에 정무공을 제주목사로
제수되었는데 이때 사원부와 사간원에서는 언관(言官)을 잘못도 없는데 외직에 임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고처 제수하여 주도록 건의하였으나
왕께서는 「그대들 말이 옳긴 하지만 비록 언관이라 할지라도 인품과 재능과 도량이 적합하면 외직에 임명하는 것도 무방하다」고하여 그대로
임명되었다. 공이 제주에 도착한 것은 1443년 12월이었다.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 청백한 목민관으로 유명할 뿐아니라, 남다른 선정을 베푼
사실을 여러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제주에는 성주왕자직의 후신으로 토관예우제도 도입되어 좌우도지관을 두고 각 토관소마다 이졸과 봉족을
두어 사역을 시켰는데 이들 도지관은 도장을 가지고 양민을 사역할 수 있는 등 많은 권리를 행사했음으로 자연 수령과 대립되는 관계가 되었으며
백성들의 이중부담을 안게 되었다. 따라서 전목사때부터 여러번 이 토관들에 대한 폐단이 알려져 이때에 이르러 도지관 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하고
관인을 회수하는 한편 진무와 부진무를 두어 오직 방어임무만을 담당하도록 했다. 공이 제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얼마나 백성을 사랑했는가를 실증으로
보여준 한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에서는 말을 비롯하여 토산물을 매년 조정에 진상해 왔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전복은 매우 귀중한
진상품이었다. 이 귀한 전복을 조달하기 위한 해녀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이졸들이 전복을 탐내어 진상을 빙자하여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이 많아 해녀들의 고통이 가중되었다. 공은 해녀들의 채취현장을 직접보시며 그들의 어려움과 이중으로 고통당하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고와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우선 공 자신부터 전복을 먹지 말아야 겠다고 결심하고 이때부터 제주도를 떠날때까지 2년동안 일체 전복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목사가 이렇게 솔선수범함으로 중간 착취하던 이졸들도 자연 삼가하게 되어 해녀들의 노고가 점차 떨어졌다고
한다. 목사의 또 한가지 일화는 황해도 연안군 군수로 있을 때 일이다. 이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오는 고장이었는데 부임해오는 군수마다
붕어를 좋아했다. 그래서 붕어를 잡어다 드리는 것이 관습이되고 말았는데 백성들은 붕어를 잡아 바치는 일이 귀찮아서 군수를 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붕어무덤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공께서 이곳에 부임하자 이 고을사람들은 전례대로 붕어를 잡아 바쳤다. 그러나 공께서는 거절하고 큰 잔치나 귀한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붕어잡는 것을 금지시켰다. 더불어 술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고을 백성들은 원님 이 술을 마시지 못 하는 줄 알고
권하기조차 아니했다. 그러다가 임기가 끝나 떠나가게 되자 그 곳 선비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여 송별회를 열었다. 그러자 공은 그 날 선비들이 주는
술잔을 하나도 사양하지 않고 모두 마시면서 종일토록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그때서야 비로서 고을 백성들은 원님께서 술을 마실 줄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폐단이 될까봐 일부러 마시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 제주목사 재임 시 그곳에는 나병환자가 많았다. 사람들이
전염될 것이 두려워 부모자식일지라도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 방치시켜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며 살고 있었다. 하루는 공께서 관내순시 도중
해변에 당도했는데 바위 밑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 그 곳을 살펴보니 나환자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정무공께서는 가슴아파하면서 바로
삼읍(三邑)에 구질막을 설치하고 나환자 백여명을 모아 남여 구별하여 수용시켰다. 이들에게 의복과 양식, 약품을 공급하도록 하고 목욕탕도 마련해
해수로 목욕하도록 했으며 고삼원을 복용케하는 등 의생과 스님으로 하여금 치료를 담당하게 했다. 1445년(세종 27년)11월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를 보면 나환자가 69명 중 14명은 사망하고 10명은 아직 병중에 있으며 45명은 회복되는 차도 있다고 했다. 이러는 중
공께서 제주를 떠날 때 치료를 받고 살아남은 나환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은혜를 잊지 못했다. 또 그 당시 제주도의 풍속은 장례제도가 정착되지
못해 부모형제가 죽으면 그 시체를 산등성 골짜기에 버려왔다. 공은 부임벽두에 전지역에 령을 내려 관을 준비하고 염장에 법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때부터 제주도에는 장례제도가 도입되어 정착화된 것이다. 그 뒤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백발남녀 수백명이 동헌 뜰아래 엎드려
말하되 「우리의 시체를 새가 쪼고 짐승이 씹는 원고와 해골이 딩구는 것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공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공께서는 손자를 보지 못하고 계시는데 금년에는 반드시 어진 귀손을 얻게될 것이며 장차 가문이 번영할 것 입니다.」하고 물러갔다. 사실인즉 공께
서는 삼형제가 있었지만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그 꿈은 들어맞어 그 해 기축(奇軸)이 찬(纘)을 낳고, 이어서 자를 낳았다. 찬은 뒤에 복제준과
덕성군 진, 형등 5형제를 두었으며 준은 또 대항(大恒) 이렇게 자손이날로 번창하여 드디어 성리학의 대가 고봉 기대승(대사간)과 영의정 기자헌
등 석학 정승들이 배출되었다. 공은 1445년(세종 27년) 12월 2년 동안 제주목사의 임기를 마치고 검지중추부사가 되어 제주를
떠났다. 그 이듬해 병조참의에 제수되고 이어 형조참의를 거쳐 1448년(세종 30년) 전라도 관찰사겸 전주부윤이 되었다. 뒤이어 호조참판,
중추원부사 등을 지냈고 1451년 문종때 함경도관찰사, 단종때는 한성부윤, 대사헌, 인순부윤, 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계유정란으로
1455년 수양대군이 전권을 장악하고 세조(1456년)로 등극하자 모든 벼슬을 거절하는가 하면 1457년(세조 3년)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갈
것을 간절히 요청해와도 사양하고 초야에 묻혔다. 조선왕조실록(세종, 문종, 단종, 세조)등을 토대로 살펴보면 공(公)은 세종때부터 세조때까지
적어도 20여년 동안 관직생활을 수행하는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1455년 수양대군이 모든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안맹을 칭탁하여 관직을
거절하며 두문불출, 눈 뜬 소경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 일찍부터 깨끗한 청백리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음으로 그 인재를 얻고 싶어 세조는 대군때에 세번이나 공의집을 방문해 벼슬길을 권했으나 그때마다 공은 「뜨고 보지 못하는 장님이
어찌 세상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거절하곤 했다. 그러자 화가난 세조는 공의 안맹을 시험하려고 바늘을 가지고 갑자기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행하였으나 눈을 뜬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이때부터 눈이 멀었다는 듯으로 호를 현암(眩庵)이라고 칭했음) 이렇게 충의와 굳은 절의를
평생지키며 온 백성의 명성과 덕망을 받아 온 정무공(貞武公)은 1460년(세조 6)12월 29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청백리(淸白吏)로
기록에 올랐으며 절의파 사림의 중진으로 숭앙받아 왔고, 시호를 정무라 했으니 정은 청백수절이요, 무는 강강직리이라. 이설이 분분하나 장성의
추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공은 후세에 매월당 김시습과 같이 생육신지일야(生六巨之一也)라 하여 추모해오고 있다. 이는 정조대왕이
확인해주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