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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21 01:34
기자지(箕子志)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783  
1) 1580년(선조 13)에 윤두수가 기자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책. 3권 1책. 목판본.
 
윤두수가 1577년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명나라의 선비들로부터 기자에 대하여 많은 질문을
받았으나 충분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 계기가 되어 편찬하였다.
지나와 우리나라의 경서 사서 시가 비문 등에서 기자에 관한 사실과 논평들을 모아놓은 자료집으로서
논서 서경 등의 경서류와 사기 고려사 등의 사서류를 비롯하여 악지 요동지 풍속통의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자료가 인용되어있다.
권수에는 기자상 및 찬에 이어 치조선도 진흥범도 정전도 사당도 등 10개의 그림이 실려 있다.
수집된 자료들은 전(傳) 녹(錄) 논 기 찬(贊) 부 사(辭) 조(操) 가(歌) 시 등으로 분류하여
제1권에는 전부터 논까지 제2권에는 기부터 가까지 제3권에는 시를 수록하였다.
전과 녹에서는 사기 서경 예기 송사 등에서 기자에 관한 사실을 뽑아 수록하였는데 특히 녹에서는
고려 숙종 7년(1102)의 기자묘의 설치로부터 조선 선조 4년(1571)의 기자 하마비를 설치하기까지
우리나라의 기자에 대한 사당설립 제사에 대한 기록을 담고있다.
논은 공자 정자 주자 등의 논평을 모은 성현론과 한비자 사마천 이백 김시습 등의 논평을 모은
제자론으로 분류되어 있다.
기에서는 유종원 변계량 등이 지은 비문을 수록하였다.
찬 부 사 조 가 시에서는 도연명 동월 권근 서거정 이이 김시습 등이 지은 시가를 수록하였다.
이 책은 16세기의 사림이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성리학이 심화되는 사상 정치계의 전반적인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서는 기자가 단순히 후조선의 시조이며 지나문화의
전수자였다는 점에 역점을 두기보다는 도학정치의 핵심인 왕도와 명분 및 절의의 실제적인 구현자로서
숭봉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이는 기자지가 잡다한 자료를 일정한 체계가 없이 늘어놓아 기자에 대한 통기를 살필수 없다하여
이를 정리한 기자실기를 기자지가 편찬된 해에 바로 뒤이어 내놓았고 윤두수는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1590년에 평양지를 편찬하면서 기자지를 증보하였으며 이이의 기자실기를 함께 수록하고
부록 2권을 합편하여 5권으로 간행하였다…………….박광용

 
2) 1897년(고종 16)에 정인기 등이 기자에 관한 사설 논평 등을 모아 엮은 책 9권 3책.
 
1580년에 윤두수가 편찬한 기자지가 자료집으로서 기자에 관한 사실을 빠뜨린 것이 많아 이를 다시
모아 수록하고 체재를 재정리하기 위해 간행하였다. 권수에는 기자상 부찬 기자수필이 있고
윤두수의 기자지에 실린 사적도와 사기도 외에 홍범구주에 관한 도해와 성탕이후부터 기자에 이르는
기자의 보계도가 실려 있다. 세계는 기자가 동래한 때로부터 기자조선의 마지막왕 애왕 기준이
남하한 때까지의 41대 929년의 세계와 애왕 기준이 남하하여 세운 때로부터 마한이 망한 계왕에
이르기까지의 9대 177년의 세계를 수록하고 있다. 홍범 전 녹 사전 치제문 어제치제문 부 시 사 조 가
찬 논 설 어 변 서 기 발 비문 등으로 분류되어 있는 바 홍범에는 홍범구주에 관한 논설이,
어제치제문에는 명나라 태종 및 조선의 태조로부터 정조의 치제문이 수록되어 있다.
발문에는 정인기 외 7인, 교정에는 이손영 외 5인, 수집에는 정이기 외 3인, 선서에는 권란 외 5인,
감인에는 이규화 외 3인이 참가하였다. 서문은 기정진이, 발문은 송병선이 썼다…….박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