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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5-28 15:39
[10세] 기건(奇虔)-문인 1390~1460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518  
  • 호 청파(靑坡), 시호 정무(貞武)
  • 조선 전기 문신, 판중추원사
□ 개설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현(顯)의 후손이다.
 
□ 내용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번도 먹지 않았다. 또 제주목사로 나가서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 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의 유약함을 기화로
그해 권력을 농단하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고 공론의 보장을
요구했으며,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 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청맹(靑盲 : 당달 봉사, 눈뜬 장님)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나올(羅兀 : 너울이라고도 함)을 창안해 부녀자들의 외출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해서,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뒤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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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字는 향원向遠. 1360년에 태어나시어 음력陰曆으로 1460년 경진庚辰 12월 29일,
  양력陽曆으로 1461년 2월 9일 월요일月曜日 돌아가시다.
• 호號는 현암眩庵 또는 세상 사람들은 청파靑坡라 한다.
  지금의 서울 청파동靑坡洞은 공公이 사시던 동네를 세상 사람들이 청파靑坡가 사는 동네라
  해서 청파동이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조선 세종 때 효도와 청렴으로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집의執義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벼슬이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1품)에 이르렀다.
• 조선 세조때 시호諡號가 정무貞武이고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다.
  시법諡法에서 정貞은 청백수절淸白守節이고 무武는 강강직리剛强直理의 뜻이다.
  세조실록에는 경진년(1460) 겨울 12월 계묘삭癸卯朔 신축辛丑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기모奇某 죽음. 시호는 정무이다, 청백수절은 정貞이요, 형민극복刑民克服은 무武다 라고
  기록돼있다.
• 묘墓는 고양高陽 원당면元堂面 효릉孝陵에서 서쪽으로 2패리牌里 떨어진 사근사沙斤寺
  지금의 성사동星沙洞 산54번지 산꼭대기에 묘좌卯坐 서향西向으로 있다.
  비碑와 혼상석魂床石 향로석香爐石 양羊 말馬 장군將軍 등의 석물石物이 있다.
  상국相國을 지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 찬성贊成을 지낸 추암楸岩
  오억령吳億齡이 지은 갈명碣銘, 후손 기세철奇世哲이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
  덕德과 업적業績이 해동명신록과 동국여지승람이 기록되어있다.
  제주 유생사(有生祠)에서 제사지낸다.
  1697년 조선 숙종肅宗 정축년丁丑年 장성長城 추산사秋山祠와 덕양서원德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남기신 시詩 2수首를 최연촌집崔烟村集에서 볼 수 있다.
  친필 글씨 1절絶은 명가필보名家筆譜에서 볼 수 있다.
  상소문上疏文 2도度는 국조실록國朝實錄에서 볼 수 있다.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교지敎旨는 후손 기노백奇老伯의 집에 보관되어 있다.
  평안도平安道 관찰觀察 교문敎文은 경인회록庚寅回祿에 있다.
•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 음력 7월 29일 돌아가시다.
  아버지는 좌산기상시左散騎尙侍 홍보洪保, 할아버지는 대제학大提學 홍준洪浚, 증조부는
  대제학大提學 홍유洪侑. 외가는 남양南陽 홍洪씨, 외할아버지는 개성판윤開城判尹
  홍유구洪有龜.
• 묘는 합장合墳. 묘아래 신도비神道碑와 제실齊室과 위토位土가 있다.
  제주는 스스로 거북등껍질이라 풀이한다.自濟州解龜也. 수레와 의복은 본부에만 있다.
  車服有本府 초가지붕을 수리하는 모든 것은 방목된 암말에 의한다修葺皆去之放牝馬之
  병아리들은 한산 양지에 머무르고雛於漢山陽留 고래수염 채찍은 조관의 벽과 오르는 배에 있다
  鯨鬚之鞭於朝館之壁及登舟 배를 따라 모여 떠나지 않는 것이다
  舟沿會不發 고사가 말하길稿師曰 가는 길에 반드시 기이한 화폐가 있다
  必有奇貨隨行 공이 탄식하며 말하길公歎曰 나는 가을에 털끝만큼도 가질 것이 없다
  吾秋毫無所取 다만 신발신고 헤진 곳을 꿰멜뿐이다.
  但所着靴子縫弊 고로 사주의 공인과 길삼의 차례는 강물에 던져 배가 순순히 흘러 얻는
  과실이다
  故 使州工緝之第投于江舟果順流 뱃사람이 감동하여 말하길舟人咸曰
  영공의 청렴결백은 강의 신 역시 그 다름을 알리라令公廉潔江神亦示其異也하였다云
•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무공貞武公 청백리淸白吏 기공奇公 신도비명神道碑銘
• 현 상국相國 (영의정) 기공奇公(자헌)이 어느날 서신書信과 가장家狀으로써 정구廷龜에게
  부탁하여 이르기를 [우리 6대조 판추判樞 (판중추부사의 약칭)공公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가
  150 여년이 되어서 묘소가 고양高陽에 있으나 현각顯刻한 비碑가 없고 세대世代가 멀어서
  가승家乘에 사적事蹟이 빠졌으므로 고증考證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 오래가면 더욱 민멸泯滅하여
  전하는 것이 없어질 것이다,
  이를 두려워하여 이제 국사國史 및 글 잘하는 여러사람諸公의 저술한 문집으로써 세상에 전하는
  것들에 나타난 것을 참고하여 이와 같이 서차序次를 하였으니 이것은비록 10에 2, 3도 되지
  못하나 또한 공公의 평생을 축략築略할 수 있는 것이니 그대는 비명銘을 지으라] 하기에
  정구廷龜는 공公의 추원追遠하는 정성精誠을 아름답게 여겨 이를 받아(拜受) 읽어보았다.
  공의 가장家狀에 이르기를 공公의 이름(諱)은 건(虔)이고 행주인幸州人으로 천자天資가
  영발英發하고 학업學業이 정수精粹하였다,
  집이 청파靑坡 만리현萬里峴 (서울 청파동, 만리동지역)에 있었으므로 항상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까지 왕래往來하면서 반드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등의 경서經書를 외었다.
  영묘英廟 (세종)조朝때에는 포의布衣(벼슬이 없음)로 발탁拔擢되어 지평持平에 임명任命되었고
  호조戶曹, 형조참의刑曹叅議와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거쳤으며 연안부사延安府使,
  전라감사全羅監司, 제주목사濟州牧使,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의 외직外職을 거쳐서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옛날에 부인婦人들이 출입出入할 때에는 개두蓋頭 (머리덥개)가 없었으므로 공公은
  새로운 제도制度와 모양을 처음으로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는데 (이제의 남바우)이것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달성達城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와 태평한화太平閑話의 기록에는 [연안부延安府에는
  붕어가 생산되는 큰 못이 있었는데 전임前任 부사府使가 붕어를먹기 좋아하여 폐단이 백성에게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붕어무덤이라고 비웃었다,
  공公이 이곳의 부사府使가 되어 이르기를 {어찌 입과 뱃속이 즐겁자고 청렴淸廉에
  상처傷하리요?} 하고 드디어 먹지 않았으며 손님을 대접하는 때가 아니면 고기잡기위해
  그물 던지기를 엄嚴하게 금지하였으므로 주민들은 크게 즐겨하였고 손님들은 시詩를 지어
  찬미하엿다].
  또, 성현成俔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는 이르기를 [기추재奇樞宰는 평생에 복어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르기를 {일찍이 제주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이 복어잡는 고생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차마 먹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제주의 옛 풍속에는 그의 부모를 매장하지 않고 죽으면 구덩이에 버렸었다,
  공公이 부임전에 고을에 경고하여 관棺을 갖추어 염을 하고서 매장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어버이를 매장하는 법이 공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온 경내境內가
  탄복歎服하였으므로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졌다.
  어느날 공公은 꿈에서 300여명이 뜰아래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謝禮함을 보았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공公의 혜택惠澤으로 우리들의 뼈가 땅에 묻히었으니 땅 위에 드러나는것을
  면免하게 되었습니다,
  보은報恩할 길이 없사오나 공公께서는 꼭 금년今年에는 현손賢孫을 보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에 公의 아들 세명이 모두 아들이 없었다가 과연 이해에 공公의 아들 장령掌令
  이름(諱) 축軸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찬이었다.
  찬의 다섯 아들은 형逈과 원遠과 괄适과 진進과 준遵이었는데 형逈은 지평持平이었으며
  준遵은 응교應敎였고 형逈의 손자 영苓은 승지承旨이었으며 또 그의 현손玄孫 협協은
  강화부사江華府使였다. 원遠의 손자 효근孝謹은 개백군皆伯君이였으며 괄适의 아들 대정大鼎
  장령掌令이었고 진進의 아들 대승大升은 대사간大司諫이였다.
  준遵은 세상에서 복재선생服齋先生이라 칭稱하였고 대승大升은 세상에서 고봉선생高峰先生이라
  칭稱하였는데 모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사림士林의 관면冠冕(우두머리)이 되었다.
  복재服齋의 아들 대항大恒은 판윤判尹이었으며 또 그의 손자 자헌自獻은 현재 영의정領議政이니
  아 ! 성盛하도다.
 
  공公이 노산魯山(단종)조朝 때부터 벼슬을 끊고서 문門을 닫고 세상일을 사절하며 사서四書,
  삼경三經, 좌전左傳, 강목綱目 등을 손수 초하였다.
  광묘光廟(세조)가 잠저潛邸(왕이 되기 전의 집)에 있을 때에 여러 번 공公의 사제私第를
  찾았으나 공公은 청맹靑盲을 칭탁稱托하였으므로 광묘光廟는 어느 날 침針으로 찔러 시험해
  보려 하자 공公은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면서 피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광묘光廟는 마침내 공公을 기용起用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因하여 또한 화난禍亂도 면免하였다.
  공公이 졸卒함에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고 하였는데 시법諡法에는 청백수절淸白守節
  정貞이라 하였고 강강직리剛强直理를 무武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청백淸白을 서록敍錄하였고 자손子孫들은 음직蔭職(선조의 공훈으로 벼슬함)으로
  등용된 이가 많았다.
 
  아 ! 공公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이 이에 그치지 않았을 것인데 많이 나타나지않았으니
  가석可惜한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조我朝(조선)의 인재는 세종 때 보다 더 풍성盛하였음이 없었거늘 공公은 과거科擧를
  거치지 아니하고서도 대헌臺憲(사헌부)에 발탁拔擢되어 벼슬을 하였으니 공公이 동류同類에서
  뛰어나서 높은 이름이 온 세상의 큰 기대를 질머졌음이 어떻다고 하겠는가? 훌륭한 임금과
  현명한 신하가 서로 만나서는 몸은 이미 바쳤으며 세상일이 어렵고 위급함에 이르러서는
  어찌 할 수가 없으매 벼슬을 버리기를 폐사와 같이 보고 병을 칭탁稱托하여 자취를 감추었다가
  하늘이 내린 수명을 마치었으며 마침내 절개를 변하지 않았고 이름을 또한 완전히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죽음을 지키어 도道를 선善히(守死善道)하고 밝고 철哲하여 몸을 보존(明哲保身)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서 공公이 위대함을 보겠도다.
  명銘에 기록하기를 [덕양德陽의 기씨奇氏는 은사殷師 (기자)로부터 파생派生하였도다,
  면면綿綿히 성대盛大하니 적후積厚로 터전을 삼았도다.
  공公은 그의 후예後裔인지라 당연히 유풍遺風이 있었도다,
  우리 세종임금을 도와서 성명과 공적(聲庸)이 작저焯著하였도다,
  청렴淸廉한 것으로 자지自持하였으며 오직 선善을 베풀었도다,
  이것은 공公의 세행細行(자세한 행적)이니 사람들이 규측窺測(규모를 측정)할 수 있으나
  덕행德行과 정사政事는 유술儒術로써 이도吏道에 통달通達하였도다,
  모두 학문의 추급推及된 것이니 또한 공公의 여사餘事였도다.
  위태危殆한 조정朝廷에서 벽립壁立(벽처럼 곳게 서서)하되 기미幾微(때를 알고)를 보아
  자수自守(스스로 지켜)하였도다.
  확호불발確乎不拔한 그의 뜻을 가可히 불부不負하였다고 이를지다,
  공리功利로 병病이 되지 못하였으며 위무威武로 굴屈하지 못하였도다.
  간난艱難한 때에 정정貞正하고 견수堅守하였으니 이와 같은 절개가 있었도다,
  이는 후손이 있음이 마땅하니 어찌 음보蔭報만 이리요? 현인賢人과 석덕碩德을 독생篤生하여
  선연蟬聯히 등용登用되었도다.
  원원한 저 가성佳城(묘소)이여 200여년이 되었도다,
  공公의 묘소를 뉘가 다스렸는고? 공公은 훌륭한 후손을 두었도다.
  후손은 그 누구 인고? 나라의 상상上相 (영의정)이로다.
  이로써도 공公의 덕德은 미진未盡하니 더욱 멀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춘추관사
  (知經筵春秋館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
  (知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이정구(李廷龜)가 찬(撰)하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지경연의금부(知經筵義禁府) 춘추관(春秋館)
  훈련원사(訓練院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
  (五衛都摠府都摠官)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김병시(金炳始)가
  서(書)하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영경연(領經筵) 홍문관
  (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원임규장각제학(原任奎章閣提學)
  홍순목(洪淳穆)이 전(篆)하다.
  위의 비명碑銘은 만력萬曆(명나라 신종의 연호로 1573년부터 1620년까지)의 사이에 이루었
  금년今年 숭정崇 禎(명나라 의종의 연호) 오주五週(60갑자가 6번 돌아간) 기묘년己卯年(1879)에
  비로소 돌을 세우니 아 ! 250 유여년有餘年이 되었다.
  그의 전전輾轉히 지내온 이유는 번잡煩雜하여 감敢히 다 말하지 못하겠고 또는 반드시
  다 말할 것도 없다,
  오래 답답하던 나머지에 온 종중宗中이 힘을 모았으니 정진正鎭은 일루一縷의 숨이위급危急하여
  능能히 있으며 없다고 할 것이 되지 못하니 비碑의 뒤에 두어 말을 년치年齒가 많음으로써
  손피遜避할 수가 없으니 황공皇恐하며 황공皇恐할 뿐이다.
  갑진년甲辰年 (1844)에 불초不肖한 후손 정진正鎭은 소기小記한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기묘년(고종 14년, 1879년) 10월 일에 시작하여 임오년(고종 17, 1882년)
  11월에 후손 양연이 세운다. 16대손代孫 우대宇大 번역, 18대손 회근會根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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