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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5-28 23:12
[7세] 기황후(奇皇后)-원나라 황후 1318~1370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7,423  
 
기황후.jpg
□ 약 력 :  1318~1370
  행주산성 바로밑 내성리(內城理) 태생.
  원나라 순제(順帝, 혜종)의 황후.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시호(諡號)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 대표 관직 : 원나라 황후
□ 배우자 : 원나라 혜종
□ 자 녀 :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
 
 
     타이페이 고궁박물관 소장
 □ 생애와 활동사항
  · 1318년(1세)    기자오의 세째딸로 출생. 
  · 1332년(15세)  원나라 공녀로 차출
  · 1333년(16세)  (충숙왕 복위 2) 환관 고용보, 원 순제(1320~1370)의 다과 시봉 궁녀로 발탁.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 타나시리의 핍박-인두 지짐. 수시 채찍질. 
  · 1335년(18세) 황비 타나시리 일족 모반. 타나시리 죽음.
  · 1335년(18세) 황비 타나시리 일족 모반. 타나시리 죽음.
  · 1335년(18세) 황비 타나시리 일족 모반. 타나시리 죽음.
  · 1339년(22세) 황자 아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아  제2황후로 책봉되었으며 황후가 된 뒤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황실재산의
              근거지로 만들고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 1340년(23세) 제2황후로 책봉
                      .실권자 바얀 실각 후. 
  · 1351년(34세) 홍건적의 난 발발, 원나라 쇠퇴기 진입 
  · 1353년(36세) 아들 아유시리다라(14세)를 황태자 책봉에 성공.
                      (고려)정치적인 파장을 낳음.-고려 내 기황후의 모친 이씨에 대한 대접이 달라짐
                      기황후의 부친, 당시 사망했던 기자오의 榮安王 왕호를 일자왕호 敬王으로 고침.
                      (공민왕과 거의 쌍벽을 이루거나 능가하는 위상. 공민왕에게 굉장히 큰 위협)
                  * 쿠빌라이의 손자인 충선왕이 그 왕호를 물려받은 뒤에 ‘심왕’이라는 일자 왕호로 고쳐 받음.
                  (고려)원나라에서 모친 익주이씨 생신에 만만태자를 보냄. 공민왕이 참석하여 태자에게 잔을 올림.
                        좌석배치;상석-태자와 노국공주, 동-공민왕, 서-익주이씨
  · 1356년(39세) 
 
                      ▲(고려)공민왕, 기철 등 친원파 제거. 기철 일가 몰살.(병신정변)
ㅇ 1358년(41세) 북경 대기근 구휼. 10만 아사자 장례.
ㅇ 1358년(41세) 북경 대기근 구휼. 10만 아사자 장례.
ㅇ 1359~1362년(42~45세) 태자파 형성, 기황후 친정체제 확립.
                      ▲(고려) 홍건적 1,2차 침공. 원과 공동 대응, 친원정책
ㅇ 1363년(46세) ▲(고려) 기황후의 공민왕 폐립조치의 일환으로 김용이 흥왕사의 변을 일으킴.
                                  수상 홍언박( 洪彦博 ), 안도치( 安都赤 ) 등이 피살되어 왕의 측근세력이 붕괴
ㅇ 1364년(47세) ▲(고려) 1월, 원 순제(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임명하고
                                   최유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케 하였으나 패퇴. 이 때 기황후의 친족인 기삼보노( 奇三寶奴 )를 원자元子,
                                   김용( 金鏞 )을 판삼사사( 判三司事 ), 최유를 좌정승( 左政丞 )으로 편성,
                      덕흥군의 침공이 참패로 끝나자 원 정국의 변화. 기황후측 세력 일시 퇴조, 태자파 삭사감과 박불화                        유배. 태자파와 대립하던 발라첩목아( 孛羅帖木兒 )가 집권, 경효왕 복위 및 덕흥군 왕위 취소.
                      최유를 체포해 고려로 압송.
                      반황태자파 볼루드 테무르 대도 연경 점령, 기황후 포로됨.
ㅇ 1365년(48세) 황태자파 케코 테무르 대도 연경 회복, 기황후 복권.
ㅇ 1366년(49세)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 피탈. 몽고로 축출됨.
 
중국 베이징 도서관 희귀본실에는 기 황후와 원 순제의 최후에 대해 적고 있는 <북순사기>가 있는데,
    신하 유길이 도피하는 원 순제를 수행하며 17 개월 동안 쓴 책이다. <북순사기> 에 의하면 원 순제와 황후,
    황태자 일행이 대도를 떠난 것은 1368년 7월이다. 도피행로는 상도, 응창을 거쳐 초원으로 이어진다.
   도피를 하는 중, 기 황후는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1년 6개월의 도피 끝에
   몽고의 깊숙한 초원, 카라코롬에 이르러 순제는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이양한 뒤 세상을
   떠난다. 기황후가 낳은 아유시다리 황태자는 북원의 황태자가 되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야산에 기황후의 능이 있다고 한다.
다만《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야산에 기황후의 능이 있다고 한다.
 
 
  1365년에는 정후가 되었다.
  기황후는 나라가 기근에 시달렸을 때는 자정원의 곡물이며 재산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선정을 배풀었음은 물론 친정인 고려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를
  하였다.
  충렬왕 이후 80여년간 계속되던 원나라에 의한 고려에 대한 공녀 징발을 금지하였고,
  환관의 징발을 축소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立省論) 논의를 폐지하도록 하여 고려의 주권과 독립을 보장했다.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風)'이라고하여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몽골 중심의 천하에서
  고려의 의복, 음식 따위의 풍속과 제도를 전파시켰다.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연천에 기황후의
  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으며 연천군에서는
  2013년 10월 이곳을 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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