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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6-05 22:10
[덕성군(進), 16세] 기의헌(奇義獻) 1587~1653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2,174  
• 자는 사직이시고 호는 기은(棄隱)이며 다른 호는 육오당(六吾堂)이다.
• 1587년 1월 9일 미시에 태어나시다.
• 벼슬은 병절교위 용양위 부사과 이시다.
• 1653 계사년 음력 4월 9일 양력으로 5월 5일에 돌아가시다.
• 묘는 광주 무등산 서쪽 산기슭 원지곡에 갑좌甲坐(8시30분방향)로 있다.
  비석, 상석, 주석이 있다.
• 아들 침이 지은 가장, 방손 판서 기언정이 지은 비문과 강재 송치규가 지은
  행장, 판서 서영수가 지은 묘표, 방손 기우만이 지은 갈명이 있다.
  유고 한권이 세상에 전한다.
  1627 정묘년과 1636 병자년의 난리에 거듭 동지들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1636 병자년에는 의병을 이끌고 여산에 이르러 화의가 성립되었다고 소식 듣고
  서로 함께 통곡 하고 돌아왔다. 1688 무진년에 용동사에 배향되었다.
• 부인은 의인 광주조씨 지기의 딸이고 사용순선의 손녀이고 참의 안정의 5대손이다.
  의녕 남인수의 외손녀이다.
  1592 임진년에 태어나시어. 1673 계축년 1월 27일 양력으로는 3월 15일 수요일에
  향년 82세로 돌아가시다.
• 묘는 소고룡 도천 마을 뒤에 임좌(5시30분 방향)로 있다.
  비석, 갈석, 상석, 주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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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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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부군의 이름은 의헌이고, 자는 사직이며, 자호)은 기은(棄隱)이시다.
기씨는 행주 사람인데. 행주는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이다.
순우(純祐)라는 분이 계셔서 고려에서 벼슬하였는데, 관직이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이 분이 수전(守全)을 낳았는데,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고, 장군과 정승에
출입하면서 공을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면(勉)이란 분이 계셨는데, 관직이 공조전서였다.
이분이 건(虔)을 낳았는데, 세종조에서 포의로서 발탁되어 지평에 임명되고, 대사헌을
역임하고 숭정대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장릉(莊陵:단종) 말에, 병을 핑계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천년(天年:천수)을 마치었다.
시호는 정무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월사 이상공 정구)가 그의 신도비명을 지었다.
이분이 축(軸)을 낳았는데, 관직이 장령에 이르렀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찬()을 낳았는데, 관직이 홍문관부응교)에 이르렀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곧 부군(府君)의 고조(高祖)이시다.
증조(曾祖)의 이름은 진(進)이신데, 장사랑경기 전참봉을 지내고, 순충보조공신과
숭정대부의정부 좌찬성 겸판의금부사에 추증되고, 덕성군(德城君)으로 봉해졌다.
그 비(妣)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진산(晉山:진양) 강씨이다.
덕성군과 모제(母弟:친동생)인 전한 준(遵)은 모두 성리학을 섬겼다.
덕성군의 호는 물재(勿齋)이고, 전한(典翰)의 호는 복재(服齋)이다.
복재선생이 먼저 조적(朝籍:벼슬명부)에 올랐는데, 밝고 곧은 마음으로 조정에서
이름을 떨쳤으나 불행히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그래서 덕성군은 당세에 대하여 다시 뜻을 두지 않고 즉시 과거를 포기하고
광주 소고룡리로 내려갔다.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참봉에 임명되었는데, 나중에 둘째 아들 대승(大升)의
현귀함으로 인하여 관작(벼슬)을 추증받고 군(君)으로 봉해졌다.
기씨가 광주(光州) 사람이 된 것은 덕성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대림(大臨)이신데, 종사랑동부참봉을 지내고,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 비(妣)는 숙부인에 추증되었고, 울산(蔚山) 김씨(金氏)이다.
고(考)의 이름은 효분(孝芬)이신데, 병절교위용양위부사과를 지냈고,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숙부인에 추증되었고, 함풍 이씨이다.
그 부친은 유회(維晦)인데 동중추 종인(宗仁)의 증손이다.
부군은 만력 정해(丁亥: 1587)년 정월 초구일 미시에 소고룡리 집에서 태어나셨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계부(季父:작은아버지)
이신 곡성현감(谷城縣監) 효전(孝荃)공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25세 때 신해(辛亥:1611)년에 조씨(趙氏)에게 장가갔다.
조씨는 본관이 광주(廣州)인데, 그 부친은 지기이고, 그 조부는 부사용을 지낸 순선이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였다, 게다가 마음이 동요할 때 참는 성질은
공부를 통하여 단속하였다.
그래서 즐거움과 성냄을 경솔하게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남들에게 귀천과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따지지 않고 대하여, 모두에게서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 향당에서도 모두 그러하였다.
이 때문에 손님과 친구들이 항상 좌석을 가득 채우고 담소하였는데, 종일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중 어떤 이는 그가 세상과 혼합한다고 의심하였는데, 밖으로는 가부(可否)를
분명히 하지 않는 듯하였으나, 그 실상은 경위(涇渭:맑음과 탁함)가 몹시 분명하였다.
그래서 일을 처리할 때 강단이 남들을 뛰어넘음이 있었다.
선조를 받드는 예절에 있어서는 더욱 그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다.
시속에서 꺼려야 할 것에 구속되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부군은
항상 이를 옳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시속의 꺼림으로써 제사를 지내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향리(鄕里)에서도
모두 그것에 따라 변하였다. 계부(季父)와 백씨(伯氏:형)를 섬기는 것은 엄한 부친을
섬기는 것처럼 하였다. 중년에 효령으로 옮겨 살았는데, 고룡리와의 거리가 10리가
되도록 멀었다.
매번 삭망 때가 되면 가묘를 알현하고 물러 나와서 계부와 백씨를 뵙는 것을 상례로
삼았는데, 일찍이 혹시라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신미(辛未:1631)년에 백씨가 숙질을 오래 앓았는데, 집으로 받들어 모셔와서
온갖 치료방법을 써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데 있어서 모든 것을 몸소 조처하고 마련하였는데, 그 심력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여러 조카들은 모두 미처 혼인을 하지 못하였는데, 자신의 아들처럼 양육하여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그중 막내는 아직 어려서 집에 데려다가 교육하고 양육하였다.
그가 부인을 얻어서 따로 살게되자. 전부와 잡요를 모두 조처하고 간여하지 않도록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종일관 한결같은 마음을 끝까지 다하였던 것이다.
부군이 세상에 계실 때, 백씨의 장자인 계박이 소종사의 일을 맡아서 받들었는데,
어려서 기질(奇疾: 낫기 힘든 병)에 걸렸다,
부군은 종사가 장차 무너질까 걱정하여 힘을 다하여 치료하였다.
그리고 그 자식에게 훈계하여 그 일을 완수하도록 하였다.
대개 이런 일들은 부군에게는 소절(踈節:간략한 예절)에 불과하였지만,
향리에서는 감탄하고 흠모하여 따르고자 한 것들이다.
천계(天啓:명나라 熹宗의 연호) 정묘(丁卯: 1627)년 노비 같은 강홍립과 도적 같은
한윤이 오랑캐 군사를 인도하여 의주로 갑자기 쳐들어와서 연이어 평양과 황주를 함락시켰다.
이에 조정과 재야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대가(大駕:임금의 수레)는 강도(江都:강화도)로 행차하고, 동궁은 전주로 남하하였다.
사계 김선생(金先生:김장생)이 호소사가 되었는데, 부군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거도유사로
삼아서 병사와 군량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장차 날을 정하여 근왕(勤王:왕을 호위함)을 하려고 하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 속에서 군사를 해산하였다.
다만 학가(鶴駕:세자의 수레)를 여산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숭정 병자(丙子:1636)년 12월에 오랑캐 군사가 경성에 쳐들어오자,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 중궁과 세자와 여러 빈궁들은 강도(江都:강화도)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있을 때, 애통(哀痛)한 조칙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부군은 또다시 거의도유사로서 병사들을 이끌고 청주에 도착하였는데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통곡하고 군사를 해산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꿈속에서 시를 지었는데 “병자 정축 연간에 큰 난리가 일어나니, 성군의 수레는
어디로 향해야 하나? 금일에 자신이 쓸모없다고 말하지 마오. 백발백중의 오호) 활을
수중에 스스로 지녔다네,”라고 하였다.
대개 그 충용과 기의가 평일에 축적되어 꿈속에서 조짐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정묘 병자 연간에, 그 적개의 의기를 펴서 쓸 수 있었는데 끝내 울울하게 펴보지 못하였다.
품고 있던 주책(籌策:계책)이 적지 않았음을 대략 볼 수 있다.
당시 호남 일로(一路:한 지역)는 인재의 부고(府庫:국가의 창고)였는데, 조정과 제야에서
진퇴를 의지할 만한 사람으로서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사계선생이 남하했을 때 격문으로 불러서 도유사를 위임하여 한 지역의 군무(軍務:군사사무)를
주관하게 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유독 부군에게 있었다.
그것은 그 학문이 순정하고 기의가 일찍 드러나서 한 지방의 사림들이 소중하게 여겼음을
 여기에서 개괄하여 알 수 있다.
이후로부터 개연히 당세에 대한 뜻이 없어졌다.
단사표음조차도 자주 걸렀지만 편안하게 거처하였다.
‘육오(六吾)’라고 그 당(堂)의 이름을 지었는데, 대개 “나의 음식을 먹고, 나의 샘물을
마시고, 나의 옷을 입고, 나의 하늘을 즐기고, 나의 분수를 지키고, 나의 수명을 마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뜻을 시로 표현하였다.
일찍이 또 「기은설」을 지어서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뜻을 스스로 말하였다.
그것은 이른 바 “군평(君平:엄준)이 이미 세상을 버리니, 그래서 세상 또한 군평을 버렸다”는 것으로써 당시의 추세를 보인 것이다.
당시는 세력가에 붙어서 지름길을 타고 명리(名利)를 취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날 듯 하였다.
광해군 당시에는 선비들에게 청렴결백한 기풍이 없어서 다투어 곡경(曲徑:옳지 않은 길)을
통하여 과거를 취하였다.
관리 중에 남내한 성신이란 사람이 부군에게 권하기를 당시의 재상을 만나 뵙고 진취를
도모하라고 하였다. 부군은 못들은 척하였다.
대개 당시의 재상(기자헌)은 곧 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스스로 그 일을 함에 있어서
일찍이 한 통의 편지도 없었는데, 부군에게 평소에 지니고 있는 뜻을 물었다.
대개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어찌 탁연하여
미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집에 보관하고 있는 『계몽서』가 있는데,
덕성군이 일찍이 보면서 애완하였던 것이다.
고봉에게 제목을 쓰게 하였고, 곡성공에게 전해주었다.
곡성공은 부군에게 전해주었다. 난리를 겪으면서도 잃지 않았는데, 보배로 간직하여
집안에 전할 뜻을 책 뒤에다 적었다.
양의(兩儀:음양) 사상 분괘(分掛:괘를 나눔) 설륵(揲:괘를 세어서 뽑음)에 대한 뜻이
소연히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하였다.
충분히 어리석음을 깨우쳐줄 수 있는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뒷날 마땅히 도를 아는 사람이 이것을 알아줄 것이다.
또한 시가 있는데 “일리가 이미 양의 앞에 갖추어 있는데, 속유들은 어찌 식견이
천 갈래로 나뉘었는가, 동풍이 개울가 풀의 초록으로 불어오고, 흰 눈발은 구천으로부터
분분하네.”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외워 전하면서 역학에 심오하다고 여겼다.
그 첫 구절은 문인 학사들의 원고 속에 종종 칭술되었다.
일찍이 『주역』『중용』『대학』 대전과 설문청의『독서록 중의 긴요한 말들을 손수
뽑아 적어서 후손에게 주었다.
또한 『심경』『근사록』을 읽고서 「좌우명」을 지었는데, 그 의미를 펴서 글로 지어 자질들을 훈계함이 간절하였다.
예의가 없고 배우지 않으면, 그것은 말을 할 줄 아는 금수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 말은 어찌 한 집안의 교훈일 뿐이겠는가? 우산 안선생(安先生:안방준)이 일찍이 글을 지어 길야은(吉冶隱:길재)의 출처가 분명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하였다.
부군 또한 글을 지어 그것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논자들은 모두 부군의 말을 공평한 견해라고 여겼다. 대개 미묘한 곳을 드러내어 유심한 이치를 천명하는 것이 군자의 대의이다.
부군이 어찌 야은에게 사적으로 아부하여 그렇게 하였을 것인가? 다만 군자가 남을 논할 때에는 마땅히 그 대체(大體:대략)를 살펴볼 뿐이다.
터럭을 불어대면서 흠을 찾는 것은 충후한 도리가 아니지 않나 싶다.
대개 향리 인근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소송이 있으면 부군에게서 그 판정을 구하였다.
부군은 옳고 그름을 깨우쳐주고, 짧은 말로 그것을 절충하였다.
누구도 그것에 승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소위 말에 앞서서 믿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항상 심의를 입고서 선왕이 법으로 정한 복식으로 여겼다.
그런데 굽은 소매의 제도에 대해서는 선유들도 상세하게 알지 못함이 많았다.
부군이 뜻으로써 추론하여 대략 그 제도를 터득하였다.
사람들이 선왕이 남긴 제도를 잃지 않게 되었다고 여기고 지금의 복식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세간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간사에 있어서 사람이 만드는 것이 불필요한 것인데도 누가
만드는가?”라고 하였다.
의학과 복서에 대해서도 또한 모두 널리 통달하였다.
산수에 대해서는 더욱 정통하였다. 무자(戊子:1708)년 간에 서울에 사는 대종에서 정무공을 제사하지 않는 사판을 함부로 묻어버렸다.
부군은 종손 진흥과 삼종제 전정언 만헌에 편지를 보내어 신속히 다시 만들라고 명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정언은 병으로 죽고, 진흥은 죄로 죽었다.
끝내 일을 이루지 못하여 종사가 마침내 끊기고 말았다.
부군은 항상 이를 통한으로 여겼다.
계사(癸巳:1713)년 부군의 춘추가 67세였는데, 지난겨울에 병을 얻어 6개월 동안이나 앓으셨다.
4월 초9일에 여러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시고 말았다.
몇 개월 전에 두 마리 뱀이 와서 무는 꿈을 꾸셨는데 상서롭지 않다고 여기셨다.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임종)이 과연 사월 사일 청명(淸明)에 있었다.
살아 계실 때 꿈을 꾸면 반드시 이와 같은 징험이 있었다.
아! 슬프구나! 이듬해 갑오(甲午:1714)년 주치(州治:고을의 治所)에서 남쪽 10리의
갑좌 경향의 들로 옮겼다.
그 마을은 지한동(池閑洞)이라 부르고 원지(元地)라고도 부른다.
자녀는 4사람인데, 장녀는 충의위 이원혁(李元赫)에게 시집갔다.
장남은 전()이고, 차남은 불초(不肖) 침(琛)인데, 신묘(辛卯:1651)년 별과에 올라서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다. 막내딸은 요절하였고, 이씨의 부인이 된 딸과 두 아들에게는 모두 자녀들이 있는데 모두가 어리다.
스스로 생각건대 선고의 입심(立心:지조)과 제행(制行:덕행)은 고인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시대와 운명이 서로 어긋남이 있어서 세상에서 현달하지 못하고, 겨우 선조의 음덕으로 사과에 추증되었을 뿐이다.
불초자식은 어둡고 우매하여 면목이 없어서 부친의 교훈을 받들 수가 없었다.
평소에 자식의 직분을 다 할 수 없었는데 과거에 오른 후에도 또한 병으로써 근심만 끼쳐드렸다.
부군에 대하여 나의 죄가 하늘까지 통하여 생명을 온전히 함을 바랄 수가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아이들 모두가 집안을 보전해야 하는 것은 또한 선고가 남기신 뜻이었다.
그래서 모진 목숨을 구차하게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스스로 생각건대 선고의 언행과 사실은 그 전함이 없을 수가 없는데, 세월이 점차 오래되고 인사가 변천하면 혹시 알 수 없게 될까 두렵다.
이에 감히 그 지행(志行:지조와 덕행)의 만 분의 일이나마 편찬하여 마땅히 당세의 군자에게 요청하여서 그의 수윤(修潤:고치고 윤색함)을 얻어 천표로 삼아서 후손들에게 알려줄 계획이다.
울부짖으며 추모함이 쇠하여 끊어지니 호천이 망극하다.
연월일, 불초 아들 침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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