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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5-20 16:28
[참판공(遠),26세]송사(松沙)기우만(奇宇萬)-의병장 1846~1916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4,327  
기우만(1846-1916).jpg대동보 亨-140p

 
* 호는 송사(松沙) 자는 회일(會一)
* 약력 : 1881년(고종18) 유생을 이끌고 정부의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疏首)라 불림
           1896년 광주향교에서 의병을 모아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으나 고종의 의병해산령을
           받고 해산시킴
           5월 장성에서 다시 기병하였으나 왜병에게 잡혀 옥고를 치르고 1908년 순천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다 고종의 강제퇴역 소식을 듣고 은둔생활을 함
           종신토록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세금을 거부하는 등 항일활동을 계속함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 저서 : 송사집(松沙集)
 
성사조선 24대 현종 12년(1881년) 8월17일, 지금의 황룡면 아곡리에 있는 대학자
노사 기정진의 집 안채에서는 만삭의 며느리 이씨 부인이 초저녁에 문고리를 붙잡고
신음하다 얼핏 잠이 들었는데, 방 한가운데서 구들장을 뚫고 죽순이 솟아 파랗게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이날 새벽 동이 틀 무렵, 이씨 부인이 셋째 아들을 낳았으니 이 아들이 바로, 민비가
왜놈들의 손에 무참히 시해되자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운후 계속 향일 운동을
전개한, 호남 의병장 송사(松沙)기우만 선생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인 노사 선생에게 훌륭한 학문을 익혀 문장이 뛰어나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전라어사의 학행원(학문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어사가 추천하여 벼슬을
주는 제도)에 올라 익능참봉으로 임명되었다.
 
참봉벼슬을 하였음으로 기참봉으로 불리었다.
1894년 동학운도 당시에 유생들이 동하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다.
동학군이 향리에 들어왔을때 선생의 집은 학자의 집이라 하여 농민들 스스로 약탈을 삼갔다.
1895년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우게 되니 그 비문을 지었다
 
당시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궁궐로 난입하여 명성황후 민비를 무참히 시해하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국민들이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궐기하였다.
이 참변 소식을 들은 선생도 통곡하면서 그날부터 이불과 요 대신 거적 자리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머리맡에는 항상 칼을 두어 원수를 갚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선생은 호남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성, 광주, 나주 등지에서 의병들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는데, 왕명을 받들고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의 의병 해산 권유로,
자신이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아 놓고서도 한달 남짓 되어 다시 해산을 명령할 수 밖에 없었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이 전국에 알려지자 협약에 반대하는 겨레의 울부짖는 고함은
산과 들로 메아리쳐, 드디어는 애국적인 의병의 항쟁으로 확대되어 일본군에 무력으로
항거하게 되었다.
이 무렵 55세가 된 기우만에게는 조정에서 중추원의관을 내리고 주암관이란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고, 호남지방의 의병들과 연락하여 적을 칠 계획을 세웠지만 애석하게도 체포되고
말았다.
광주 경무소에서 일본 경찰의 신문에,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의 오랜 원수이다.
임진, 정유의 난리는 그만 두고라도 을미사변은 네놈들이 한 짓이니 조선의 백성 치고
너희 살을 씹고 살 가죽을 벗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내가 동지를 모아 원수를
 갚으러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선유사가 내려와 타이르므로, 부득이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가 동굴에 살면서 이제껏 북바치는 울분을 삼켜왔으니 어찌 잠시인들
복수할 것을 잊었겠느냐?"하였다.
또 말을 이어 "이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 마음먹은 일을 제대로 펴지 못했는데,
작년 10월에 5조약이 이루어짐으로써 나라는 있으나 설 땅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마다 분함과 원통함을 품고 100명이 왜놈 한 명만 죽이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대담하고도 의젓한 모습과 피끓는 애국충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일본 관헌이 20일 후 다시 심문한 자리에서도, "손에는 비록 한 치의 쇠붙이도 없지만
가슴 속에는 향상 수만의 병사가 있어 강물 소리만 들어도 철갑을 떨치고 나가 쳐부술 것을
 생각하고, 산의 나무만 보아도 의병을 만들어서 오랑캐를 쫓아 버리기를 원했는데,
늙음은 날로 오고 병은 심하여 가족과 산 속으로 들어가 목숨을 끊어지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 백 낙구가 큰 뜻을 천하에 펴기로 한다는데 비록 알지는 못하나 마음만은
서로 통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방안에서 편안히 죽는 것은 면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큰 은인이다."고 하여 애국심의 변함없음을 강조하였으며, 그 뒤 며칠 있다가
선생은 잠시 석방되었다.
그러나 1년 뒤 다시 왜경에 잡히게 된 선생은 옥고의 시달림도 아랑곳 없이 오직 나라를
구하려는 대쪽같은 의지를 굽힐 줄 몰랐다.
그리고, 1910년 8월억울하게 한일합방이 되자 목놓아 울며 마을 뒤 대밭속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 여러날 햇볕을 보지 않고 침식을 끊었다고 한다.
그후 선생은, 제자들과의 강학을 일삼아 유학에 전념하였고, 수천명 제자 중에는 명인 석학이 많이 나왔다. 그 뒤 1906년 10월 28일, 평생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칼을 갈다가 한을 풀지
못한채 그만 눈을 감았다. 선생의 저서에는 문집 27권이 있고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출처 : 장성군청 http://www.jangseong.jeonnam.kr, 한국 역대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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