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송화 출생.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미생물학을 연구하였으며,
1932년부터 만주의 일본인 회사인 대련만철(大連滿鐵) 부속연구소에 근무하였다.
1943년 만주의과대학에서 논문 「페스트균의 항원 분석」 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 교수로 재임중 면역학분야 발전에 끼친 공로로
1968년 대한민국학술원상과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의계(醫界)의 개척자(開拓者)들」(정구충, 『의협신보(醫協新報)』, 1983)
□ 생애
기용숙의 출생지는 황해도 송화군 천동면 석탄리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친이 천동면 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재령군 장수면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1925년에 평양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면서 의학에 뜻을 품고 상경,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의전 세균학교실에서 2년 동안 유일준 교수의
지도 하에 발진티푸스와 포도구균의 병원성 등에 관해연구하고 1년간 내과의국에서 임상경험을
얻은 후 유일준 교수 추천으로 만주 따렌(大連) 시에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위생연구소
연구원으로 입국하여 공부하였다.
1932년부터 43년까지 위생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1942년 6월에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만주에서 산발하는 각종 전염병의 연구에 종사하였으며 특히 페스트와
콜레라 유행 시 방역요원으로 종사하였다.
연구소에서 각종 생물학적 제재의 검정 실무를 담당하면서 “면역학에 있어 항원항체 반응의
이론적 연구”, “항체 글로부린에 대한 연구”, “각종 세균 항원의 면역 화학적인 분석”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그 중 만주의과대학에서 연구과제를 받아 수행한 “페스트 균 항원에 대한
연구”로 1942년 6월 경의전에서 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기용숙은 만주 생활 당시 일본인으로부터 은사상(銀賜賞)을 받을 정도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았으나 당시 임시정부에 재정 지원을 하고 있던 터라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에 따라 학위취득 후 조선으로 돌아와, 1943년 10월 대구 동산병원 소아과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다. 소아과 근무 틈틈이 대구의전에 출강하다 1945년 해방 후 10월 경성의전
미생물학교실의 주임교수로 취임하였으나,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효되면서
경성대학과의 통합 과정에서 교수직을 내놓고 보사부 산하 세균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나 서울의대 미생물학교실 주임교수로 근무하던 허규 교수가 이른바 “5교수 사건”으로
1947년 9월에 교실을 떠나고 6.25 전쟁 때 작고하자 다시 후임으로 주임 교수직을 맡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기전인 1949년 11월에 연구차 도미하여, 디프테리아 면역혈청 생산에
관해 연구하다 1년후 부산피난 전에 귀국하였다.
전쟁이 끝난후에는 미네소타 대학 교환교수 훈련계획에따라 미국 피츠버그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1년간 유학하여 바이러스 연구와 생물물리학(biophysics)에 관해 연구하였다.
이후 서울의대 미생물학교실에서 1970년 8월 3일 정년퇴임 때까지 근무하였다.
기용숙이 1957년 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서울의대 미생물학교실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미생물학교실 내에 실험이나 실습을 위한 기자재가 전무하였고 교실원들은 미네소타 프로젝트 등
해외 연수를 받기 위하여 자주 교실을 비워야 했다.
1957년 기용숙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제자인 박진영, 이호왕도 돌아오면서 미생물학교실은
외형을 갖추게 되었으나 여전히 연구를 위한 재정적 지원은 극히 적어 1970년대 중반까지
제대로 된 연구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부학교실을 제외하고 당시 기초교실중 직접 실험 실습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실이었기 때문에 후학들이 미생물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승훈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연구 및 교실운영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은 극히 미미하여 기선생님을 비롯한 교실원들의
의욕은 높았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다. 특히 기선생님은 주임교수로서
대학원과정생의 연구지도에 그리고 휴가중에 특별히 미생물학 공부를 하고 싶어 찾아오는
학생들에 대한 배려 등에 고심하시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였다.”
기용숙이 서울의대에 재임하던 시기는 이런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눈에 띄는 연구성과를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의대 재임 시절 국내 미생물학교실과 연구의 기틀을
다져 부산대학교, 가톨릭대학교, 경희대학교의 미생물학교실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가톨릭대학교 미생물학교실의 건설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전해지는데
가톨릭대학교 미생물학교실 외래교수도 겸임하면서 후학들을 직접 지도하였다.
기용숙의 후학 지도 자세는 매우 엄격했다. 과학도로서의 엄중한 자세를 강조하면서
애매모호한 이론과 주장은 과학의 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때만 되면 집담회나 세미나를 개최하여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후배들의 잘못이 있으면
가차 없이 지적하였다.
학생 지도의 경우도 구두시험에서 모르는 부분을 ‘모른다’라고 대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차 없이 낙제점을 주는 등의 모습이 에피소드처럼 내려온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새로 배우려는 학구적 태도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은 연구 후배들이 느낀 기용숙의 연구자로서의 태도와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궁핍했던 당시의 연구 여건을 극복하는 끈질긴
탐구자세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부란기를 전기가 없어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세균 배양을 하지 못하자 신체를 부란기처럼 이용하여 세균을 배양했다는 에피소드,
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실험원들이 유리관과 버너를 이용하여 피펫과 시험관을 만들었다는
에피소드 등에서 당시의 열악한 연구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기용숙은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연구회를 조직하고 연구소 설계의 꿈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는데, 1946년부터 연구소 조직을 천명하였으나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1950년대 말경부터
한국군 내의 유행성출혈열 발생이 문제가 되자 육군 의무부대 제3야전 병원에 출혈열연구소가
설치되었는데 기용숙과 전종휘, 이기녕 등이 자문관으로 임명되어 환자 발생 상황을 검토하고
진료에 대해 자문하는 한편, 연구원들의 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기용숙은 방역조치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바이러스 분리에 노력을 기울였다.
바이러스 분리를 위해 유행성출혈열연구소에서 미생물학부가 분리되어 서울로 이전한 데에는
기용숙의 끈질긴 설득과 노력이 컸다. 당시 기용숙이 바이러스 병원체 분리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으나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기초 작업을 한 것이다.
1975년 이호왕이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학자들의 노력이크지만
기용숙이 주도했던 역할이 두드러진다.
1961년 6월에 이르러 국립보건원 내 한국형 유행성출혈열 연구소 미생물부의 여러연구원들을
모아 미생물연구회를 만들었다.
육군유행성출혈열연구반 장교들의 회합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미생물병연구소 설립을 위한
기초작업이기도 하였다. 지지부진하던 상황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실험동물에 대한
연구 욕구와 생물학적 제제생산 분야에서의 요구가 덧붙여지면서 1971년 생물의학연구회로
개칭되면서부터이다. 이 모임은1974년 대한면역학회 창립 발기로 이어졌다.
기용숙은 1948년부터 1959년까지 11년간, 그리고 1967년과 1969년에 대한미생물학회 회장,
1969년 대한이식학회 초대 회장, 1974년 대한면역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면역학회의 설립은 기용숙의 오랜 소망이었는데,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악성 림프종으로 1974년 10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