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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세 및 현재 주요 인물 자료
 
작성일 : 13-06-06 16:13
[참판공(遠), 15세] 기효간(奇孝諫) 1530~ 1593
 글쓴이 : 운영자
조회 : 1,966  
공(公)의 휘(諱)는 효간(孝諫)이고, 자(字) 백고(伯顧)이며, 기씨(奇氏)의 세계(世系)는 행주(幸州)에서 나왔는데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정무공(貞武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린 휘 건(虔)의 5대손(代孫)이다. 고조(高祖)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豊儲倉副使)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 휘 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조(祖) 휘 원(遠)은 돈용 교위(敦勇校尉)로 침착하고 안존하여 도량[器度]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고(考) 휘 대유(大有)는 진용 교위(進用校尉)로 호조 판서(戶曹判書) 고흥군(高興君)에 추증되었으며, 비(妣)는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경인년(庚寅年, 1530년 중종 25년)에 태어나 만력(萬曆)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5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이 64세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크며 마음은 온화하고 외모는 엄정하여 젊어서부터 과거 공부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경전(經傳)을 가지고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며 상세히 가르쳐 주기를 청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 당숙(堂叔)인 문헌공(文獻公) 고봉 선생(高峯先生, 기대승(奇大升))에게 나아가 질문하며 강론하였는데, 두 분 선생이 모두 허여(許與)하였다. 그리고 항상 ≪소학(小學)≫으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법도(法度)로 삼아 애를 써가며 부지런히 스스로 지키면서 일찍이 잠깐 사이라도 방심하여 지나치지 않았으며,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선천적으로 타고나, 판서공이 세상을 떠나자 묘소 곁의 여막(廬幕)에서 기거하며 새벽과 저녁에는 성묘(省墓)하고 돌보며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쇠퇴하지 않았고, 크고 작은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이 갖추어 지극하였으며, 부득이한 일이나 연고가 있지 않을 경우 일찍이 한번도 동구(洞口)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 3년 동안 죽(粥)을 먹으면서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에 그 상사(喪事)를 마치도록 일찍이 질병에 걸린 적이 없었으므로, 인근[鄕隣]에서 탄복하며 신명(神明)이 도운 바라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산 이름을 제청산(祭廳山)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대체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금까지 고로(故老)가 가끔 그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공은 부귀(富貴)와 이달(利達)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바가 없었다. 동생 기효근(奇孝謹)은 글씨을 잘 쓰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기질이 호탕 비범하여 얽매이지 않았는데, 스스로 재능을 지니고도 기용되지 않음에 분개하여 마침내 문학(文學)을 버리고 무예를 업으로 삼자, 공이 매번 책망하기를, “얻고 잃는 것과 곤궁하고 현달하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으니 애당초 사람의 힘으로 이룰 바가 아닌데, 어찌 학술을 바꾸기까지 하면서 반드시 쓰여지기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더구나 무예가 어찌 남아(男兒)가 처음으로 벼슬하는 길이겠는가?” 하였는데, 뒤에 효근이 마침내 무예로 벼슬길에 나가자, 공이 항상 애석하게 여겼다. 그리고 후학(後學)을 이끌어 나아감에 있어 곡진하게 타이르며 가르치고 계도하여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를 논하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시켜 그 기량을 다하게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학도(學徒)가 비록 단지 강독(講讀)에 응하기만을 일삼는 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비루하게 여기거나 과오로 여기지 않았으며,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 미워하는 것은 바로 그의 타고난 성품이기 때문에 향리(鄕里) 사람으로 착한 자는 진취시키기를 부지런히 하여 싫어하지 않았으며, 악한 자에 대해서는 비록 드러내 놓고 배척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여 그의 문려(門閭)를 지나는 자는 더러 돌아보거나 머뭇거리면서 반드시 공이 보지 않는 곳을 경유하여 빠르게 달려갔는데, 사람을 시켜 보게 하면 틀림없이 향당(鄕黨)에서 의로운 행실이 없는 자였으니, 그가 소인(小人)에게 엄격히 꺼림을 당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품이 관대(寬大)하여 좋아하고 노여워함이 빨리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빈객(賓客)이 좌석에 가득한데 같은 동네에 사는 상한(常漢)이 대문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으므로 온 좌중이 모두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끌어내려 엄중히 다스리려고 하자, 공이 굳이 말리며 말하기를, “이 상한이 평소에는 이와 같이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감히 무례하게 여럿이 모인 좌중을 침범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본성을 상실한 것으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을 것이요, 신중하게 마구 형장(刑杖)을 가하여 뒷날의 근심을 불러들이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조금 지나 그 사람이 떠난 지 수백 보(步)가 안 되어 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의 주밀하고 신중함에 감복하였다. 공의 문장은 과거 급제를 차지하기에 충분하지만 한번도 과거 시험장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행실은 당세에 드러나기에 충분하지만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은거[隱約]하면서 조금도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없었다. 어느 날 재종형(再從兄) 승지(承旨) 기영(奇苓)이 공에게 나아가 벼슬하기를 매우 열심히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번거로운 것은 싫어하고 한가한 것을 즐기며, 수고로운 것을 미워하고 조용한 것을 즐기는 것이 나의 타고난 성격입니다. 그리고 허황된 명성의 부림을 당하여 즐기는 바를 버리고 싫어하는 데로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므로, 기영이 더욱 극력 요청하였으나 공은 거절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니, 기영이 그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오늘날 인품(人品)을 논한다면 내가 자네에게 미치지 못함이 진실로 동떨어진다. 그러나 뒷날 세대 (世代)가 조금 멀어질 경우 사람들이 내 뒤를 비교하여 자네 뒤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는데, 한 때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졌다. 그것은 대체로 이때가 을사년(乙巳年, 1545년 명종 즉위년)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 임백령(林百齡)ㆍ이기(李)의 남은 세력의 화염이 오히려 모두 꺼지지 않아서였다. 공이 일찍이 노 선생(老先生, 하서 선생(河西先生)을 지칭함)께서 봉황(鳳凰)이 천 길[千仞]을 나는 기상(氣像)이 있어서 바로 더욱 멀리 가볍게 솟아올랐으므로 손을 써서 처단할 수 없었음을 감탄하며 칭송하였는데, 공이 그의 진출과 은퇴를 이미 살펴서 스스로 결정한 것이니, 이것이 그가 일평생 동안 세상을 피하여 숨어살면서 입신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공을 추천해 올려 기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 또한 어찌 없었겠는가?

공이 고향에 살면서 일찍이 고을의 수령을 찾아보지 않았는데, 어느 수령이 평소 공의 명성을 듣고 본 고을에 부임하여 공이 와서 자신을 만나보게 하였으나 공이 찾아가서 만나 보아야 할 예(禮)가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자, 수령이 곧장 일을 가지고 부르면서 자못 위협을 가하므로, 공이 어쩔 수 없이 관부(官府)에 들어가기는 하였으나 당(堂)에 오르지 않았는데, 수령이 자기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당에서 내려와 자리로 맞이하며 옷깃을 여미고 공경히 인사하였다. 이에 사례하고 보낸 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의 명성을 의심스럽게 여겨 시험하려고 하였는데, 오늘 그 분을 보니 참으로 이른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군자[隱德君子]’였으므로, 내가 그분을 억지로 관부에 오게 한 것을 후회한다.” 하고,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공경하며 섬겼다. 공이 같은 고을의 서태수(徐台壽) 공과 변이중(邊以中)공, 그리고 무장(茂長)의 변성온(卞成溫)공과 그의 아우 변성진(卞成振)과는 서로 친한 친구였으니, 김 선생(金先生, 하서 선생)이 돌아가시자 수산(水山)에다 사우(祠宇)를 창건(刱建)한 것은 공이 이 네 분과 실제로 앞장서서 한 것이었다. 변공(卞公) 또한 모두 하서(河西)의 제자로 덕행(德行)이 숨겨져 벼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항상 패랭이[蔽陽子]를 쓰고 미투리[草履]를 끌면서 다녔는데, 공이 변공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 영접하여 서로 토론하고 강학(講學)하며, 더러는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회포를 풀면서 며칠 밤낮을 끌어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변공도 무릇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면 역시 공에게 와서 질정하였다. 공이 일찍이 스스로 금강거사(錦江居士)라고 호(號)를 지었으며, 또 거처하는 곳의 서재(書齋)에 편액(扁額)을 ‘이인(以忍)’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자신을 극복하고 사사로움을 버리는 데에 인(忍)보다 더 싫은 것이 없으며, 또한 (당(唐)나라 때) 장공예(張公藝)가 9대를 함께 살았던 일을 추모(追慕)한 까닭이기도 하였다.

아! 공의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로 당연히 후세에 전해져야 할 것이 당초에 여기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지금 대략 나타낸 것은 바로 그의 자손이 입으로 외면서 대대로 지켜온 것이며, 또한 향당(鄕黨)의 고로(故老) 및 문하생[門生]이 스승에 대하여 전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집안의 대수[家世]도 짧고 기록도 제때에 하지 않아 없어질 듯이 지금까지 이른 것이 1백 년이 채 못되었는데, 세상에서 공을 아는 자가 없으니 슬프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네이버 지식백과] 기효간 [奇孝諫]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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